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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장마와 입추

浮萍草 2013. 8. 16. 09:59
    재해 있을 땐 법회 열어
    삼보귀의 위신력으로 재난극복 확신 바탕 삼국시대부터 기청제…감사 뜻 ‘보사제’도 秋는 中伏과 末伏 사이에 드니 한여름 속에 이미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장마와 함께하는 삼복더위는 불쾌지수도 높아 더위와 씨름하는 시절이건만 어느 사이 하늘은 가을기운을 머금은 채 조금씩 높아가고 있었던 게다. 이 무렵은 벼가 한창 익을 시기라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말이 있다. 귀 밝은 개가 벼 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락의 생장속도가 빠르다는 비유이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햇빛이 필요하기에 입추에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 든다고 점친다. 그러나 양력 7월말 8월초에 찾아드는 장마가 입추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입추를 지나서도 비가 계속되면 날이 개기를 기원하며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기록이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왕조마다 수차례 기청제를 올리며 천지신명에게 간절한 뜻을 빌었다. 모내기철에 가뭄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며 비를 바랐건만 돌아서기 무섭게 또 장마걱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청제는 주로 숭례문.흥인문.돈의문.숙청문의 사대문이나 종묘에서 사흘간 지냈고 그래도 개지 않으면 되풀이했다. 제를 지낼 때 정성을 다하여 인조는 기청제를 지내는 제문(祭文)에서“소자가 변변치 못해 노여움을 산 것인데 아무 죄 없는 백성들에게 어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부디 미천한 정성을 살펴 하늘의 뜻을 돌려주시어 완악한 음기를 몰아내고 태양을 뚜렷이 보여 만백성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라며 간절히 빌었다. 긴 장마가 든 1778년의 여름날, 정조는 사대문에 기청제를 지내도록 명하며 “몇 차례 제를 지내다보면 재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혹 해이해질 염려가 있으리라. 더구나 지금 음산하게 내리는 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니 더욱더 조심하고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기우제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청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을 닫았다가, 기청제를 지낼 때면 북문을 닫고 남문을 열었다. 북쪽은 음과 수(水), 남쪽은 양과 화(火)에 해당하기에 물과 불, 비와 햇볕을 상징하는 문을 여닫았던 것이다. 기우제나 기청제를 지내서 감응이 따랐을 때는 감사의 뜻으로 보사제(報謝祭)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보사제는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영조.정조.순조.고종은 열 차례 이상을 올린 바 있다. 예컨대 영조는 1739년 음력 6월 초하룻날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자 매우 기뻐하며 보사제를 명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종묘에서 친히 제사를 올려 사흘 안에 비가 오면 바로 보사하지만 성 밖에서 친히 제사하여 비가 왔을 때는 규례가 없으니 입추 지난 뒤에 행하실 것” 을 권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가을은 너무 늦다. 개거든 곧 행하라”고 명하여 은혜의 보답에 날을 받거나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명쾌히 보여주었다. 올해는 장마가 50일 이상 계속되어 역대 최장기로 기록된다니 예전이라면 일찌감치 기청제를 치렀을 법하다. 가뭄.장마.질병 등 재해가 있을 때마다 법회를 개최하고 삼보의 위신력에 의지해 국난극복의 활로를 열어온 불교의 역사 또한 깊다. 재난에 더욱 간절히 부처님을 찾는 것은 영험에 대한 기대보다, 대자자비의 부처님과 간절한 기도가 만나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 불교신문 Vol 2936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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