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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자호텔 일대

浮萍草 2013. 8. 17. 10:12
    최초의 아파트 →미군 숙소 →외신기자클럽… ‘西村’ 랜드마크
    요즘 흔히들 서촌(西村)이라고 부르는 서울 종로의 효자동 일대는 그야말로 평범한 소시민이 사는 곳이지만 경복궁과 청와대 바로 옆에 자리한 까닭에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사건들과 서민의 삶을 둘러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다. 서촌에 있는 유정미용실의 외관은 1970년대 그대로다. 지금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스타일의 폰트와 색상으로‘파마 올린머리 전문’등의 글자를 시트지로 오려 붙여 추억을 되살린다. 미용실 주인 조유정 원장 본인의 이름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었다. 내가 오래된 간판을 새로 달 생각은 없었냐고 물어보니 원장님은 오히려 멀쩡한 걸 굳이 왜 바꿔야 되냐며, 저 모습 그대로가 좋다고 한다. 그런 원장님의 철학 덕분에 아마도 앞으로도 유정미용실 외관이 바뀔 일은 없을 것 같다. 효자동 7평짜리 미용실에서만 40여 년을 보낸 탓에 유정미용실은 효자동 청운동 일대까지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1935년 우리나라 첫 아파트로 건립됐던 내자호텔은 한국 근현대사의 곡절을 간직한 건물이었다. 설재우 씨가 옛 사진 속 장소였던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에 내자
    호텔 사진을 대고 촬영한 독특한 사진. 설재우 씨 제공

    설재우 씨가 부친이 운영했던 양복점 ‘미림라사’ 자리에 위치한 서울 신교동의 상가건물과 옛 사진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냈다. 설재우 씨 제공

    유정미용실의 주특기는 파마와 고데(집게처럼 생긴 기구를 불에 달궈 머리를 다듬는 미용방법)다. 일명 ‘후까시(부풀림)’를 잔뜩 넣어 우아한 분위기를 낼 때 많이 하는 스타일이다. 덕분에 중년 여성 단골이 많다. “미용술은 과학이 아니라 감각이기 때문에 의술만큼 어렵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그녀는 쇠고데기를 30년 넘도록 고집스럽게 불에 달궈 쓰고 있다.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덴 특별한 이유가 있다. 파마는 약이 좌우하지만 고데는 손재주가 좌우하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쇠집게는 볼륨을 확실하게 잡아줘서 섬세한 웨이브와 경쾌한 탄력을 줄 수 있어 분위기를 수천 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젊은 미용사들은 그걸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으니 집게로 머리칼 태우기가 십상이라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명절날 미용실은 고데 하러 오는 여성들로 대목을 이뤘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단다. 은근슬쩍 엿듣는 단골 이야기도 재미있다. 청와대가 목전이어서일까, 인근에 부잣집이 많아서일까.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가 생전 단골이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씨가 효자동 살던 1990년대 후반 간혹 들러 고데를 말고 갔다고 한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북한 가기 전 이 미용실에 들러 마무리를 했다고 자랑이다.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금천교시장(혹은 적선시장이라고도 불린다)의 좁은 골목을 따라 약간 올라가다보면 오른편에 솥뚜껑 같은 철판 앞에 빨간 플라스틱 원형 의자가 놓인 곳이 있다. 반짝이는 간판도 없고 조명이 있는 번듯한 매장도 아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그저 비닐천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약 40년 동안 그 좁은 한 평짜리 장소에서 떡볶이만을 팔아온 김정연 할머니의 가게이자 보금자리다. 김 할머니는 거의 100세가 다 되셨지만 지금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할머니가 만드는 떡볶이는 이름 그대로 떡을 볶아 만들어내는 떡볶이다. 떡볶이에선 투박한 된장과 간장 맛이 진하게 난다. 특이한 방법이지만 특별한 맛은 아니다. 하지만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은 할머니를 존경하고 끊임없이 찾는다. 몇 해 전 김 할머니는 전세금 800만 원과 은행에 저금해서 모은 1500만 원을 합친 2300만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유산으로 기탁했다. 젊을 적에는 채소와 꽃을 팔고, 나이 드신 뒤로는 떡볶이로 악착같이 번 돈이었다. 또한 할머니가 사회에 내놓은 건 떡볶이뿐만이 아니었다. 70대에 이미 신체 전부를 장기기증하기로 약속하셨다. 김 할머니는 원래 이북 출신으로 개성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사셨는데 그만 6·25전쟁이 난 것이다. 어머니의 장사를 돕던 그녀는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혼자 서울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 집을 떠난 사이 북쪽으로 가는 길은 영영 끊겼다. 그녀는 순식간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렸고 그 뒤로 가족들은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 일상에서 즐거움을 잊었다고 한다. 이북에서 늙은 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고생할 생각 때문이다. 어머니, 남편, 어린 자식들까지 아마 할머니는 모든 걸 잃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는 평소에 통 웃질 않으신다. 그래서 더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어딘가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자식 같은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등록금을 대준 학생들은 또 다른 자식들이 되었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꽃이 열댓 개씩 들어와서 시장 상인들이 “할머니 꽃장사 해도 되겠다!”고 농을 던진다. 적선(積善)이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 ‘착한 일을 많이 함’이라 나와 있다. 김 할머니는 떡볶이 팔아 돈만 버는 장사꾼이 아니라 사회의 큰 적선가였다. 내가 낸 떡볶이 값은 할머니께서 또 누군가에게 전달할 적선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떡볶이를 먹고 나서 마음도 배불러지는 느낌이 든다. 할머니의 오랜 벗인 작은 흑백 TV 옆엔 고운 카네이션 한 송이가 늘 놓여 있다. 나는 별명이 ‘길동이’라고 불릴 만큼 길에서 쭈그려 앉아서 차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먹고살기가 바쁜 시절인지라 아버지는 밖에 일하러 나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시면 나는 길동이답게 늘 혼자 밖에 나가서 놀았다. 내가 노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신교동 사거리에서 ‘미림라사’라는 양복점을 하고 계셨다. 건너편 삼양슈퍼(현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자리) 계단에 늘 쭈그리고 앉아 추사로를 왔다 갔다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했다. 추사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청계천을 따라 난 복개된 길이다. 1986년 7월 18일 자하문길로 통합됐다. 1983년 10월 TV와 라디오에서는 버마 아웅산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경복궁역과 청와대를 잇는 추사로에는 마치 가을운동회 날처럼 동네 골목 거리마다 태극기가 조기로 물결처럼 이어져 있었다. 군인아저씨들을 태운 지프차 육공트럭 등 각종 군용차들은 청와대를 끊임없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심지어 탱크가 지나갈 때도 있었다. 아웅산 테러로 온 나라가 정신없던 날 밖에 놀러나간 내가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결국 찾으러 나갔는데 항상 있던 자리에 가보니 내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동네 어디에 있겠지 싶어서 주변 골목을 찾아봤는데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파출소에서는 찾아보고 연락준다고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저녁 늦게 돼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곳은 추사로 끝자락에 있는 내자파출소였다. 근처 내자호텔에 인상착의가 비슷한 아이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주한미군 숙소로 유명했던 내자호텔(현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은 금천교시장 옆에 있었는데 신교동에서 내자호텔까지는 약 1㎞로 성인이 걸어도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아마도 추사로에 걸려 펄럭이는 태극기들을 졸졸 쫓아가다보니 끝에 나온 내자호텔이 아이에겐 마치 보석상자같이 보였던 것일까. 아무튼 내가 생애 처음으로 간 호텔이 내자호텔이 된 셈이다. 내자호텔은 국내 최초의 아파트로서, 우리나라 신식건물의 대명사였다. 이 건물을 건립한 기업은 경성 미쿠니(三國)상사다. 중국, 일본에 석탄과 석유를 수출하던 미쿠니상사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한국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해 회현동과 내자동에 관사를 짓고 ‘미쿠니 아파트’라고 이름 붙였다. 특히 회현동 아파트는 벽돌로 지어진 반면 내자동 아파트는 콘크리트 자재를 썼고 외관도 현대식으로 설계됐다. 4층 본관과 3층 별관으로 나뉘어 세워진 이 아파트는 독신용 28가구 가족용 41가구 등 총 69가구 규모로 지어졌다. 새로운 주거양식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 셈이다. 일제강점기의 주거용 건물로는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엔 내자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주한미군 숙소로 사용됐고, 6·25전쟁 때는 종군 외신기자클럽이 들어서 세계적인 뉴스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내자호텔은 이렇게 근현대사의 아픈 사연과 역사의 곡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건물이었지만 사직터널이 기존의 2개에서 3개로 늘어나면서 도로 확장과 함께 결국 1990년 8월에 허무하게 철거되고 만다. 국내 최초의 아파트로서 건립된 지 55년 만의 일이다.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진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만약 내자호텔이 지금도 남아 있었더라면 서울 도심 속 또 다른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아웅산 테러사건도, 내자호텔도,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겪었던 근현대사의 흔적들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촌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엔 청계천과 내사산(백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중심으로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五部) 구역을 정했다. 조선 초기에는 내사산을 각각 동산(낙산) 서산(인왕산) 남산(목멱산) 북산(백악산)으로 불렀다. 이렇게 물줄기와 산줄기, 길 등 자연 지형에 따라 도시 구역을 나누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각 부에 속하는 마을을 부르기 쉽게 ‘○촌’이라고 칭했다. 예컨대 북부 백악산 근처에 있는 마을이면 ‘북촌’ 남부 목멱산에 있는 마을이면 ‘남촌’ 하는 식이다. 하지만 지명에 들어있는 방향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으로 나뉘지 않아 실제와 차이가 있는 경우가 나타났다. 때문에 일부 지역은 명칭이 혼재되기도 했다. 서촌 지역은 5부 중 북부의 일부와 서부의 일부에 해당된다. 북촌으로도 불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 지역은 ‘서산(인왕산)이 있는 동네’ ‘왕이 사는 궁궐 경복궁의 서쪽 마을’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서촌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1934년에 경성부(현 서울시)에서 발간한 경성부사 제1권 202페이지를 보면‘서촌에 있는 다섯 활터가 삼청동 옥인동 누상동 필운동 사직동에 위치한다’ 고 기록돼 있다. 경성부사는 고대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울 역사를 집대성한 최초의 서울통사다. 해당 내용은 고종황제의 부름으로 황학정 창건 당시 우궁수를 지냈던 황학정 5대 사두 성문영이 쓴 ‘황학정기’(1928)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서촌에 살았던 중인(中人)계층들이 시사모임을 전개하면서 남긴 시 중 최윤창의 금지사환(金知事換)을 살펴보면“동촌·서촌 시단(詩壇)이 있어 지난 삼십년 백전에 취했었지. 동촌은 삼청동 일대를, 서촌은 인왕산 기슭 필운대(弼雲臺)일대다”라고 했다. 이때 서촌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대에서 활동한 모임이나 단체의 이름들은 서대 서원 서사라 통칭하며 방향이나 위치 개념으로서‘서(西)’라는 명칭이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르는 게 무리이거나 타당성을 논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Munhwa         설재우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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