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21> 대전역 플랫폼과 가락국수

浮萍草 2013. 8. 10. 09:42
    허기진 완행 승객들 기차 떠날까 마음 졸이며 국수 한그릇 후루룩
    축~축 처지는 가락 구슬픈 가사의 노래 ‘대전블루스’를 오랜만에 들었다. 
    맨 정신에 이 곡을 듣는 경우란 없다. 술 한잔 취기로 얼큰해진 차 속이거나 비가 내려 우중충해진 창문 바깥을 볼 때다. 
    노래가 불릴 당시의 기억은 없다. 
    원곡보다 80년대 초 조용필이 리바이벌한 노래가 더 친숙하다. 
    지지리 궁상의 쥐어짜는 사랑노래는 딱 질색이다. 
    하지만 국민 오빠의 절절한 창법과 짙은 호소력으로 부르는 ‘대전블루스’는 예외다. 
    나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대전블루스’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불린다. 
    세상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청승맞은 빌리 할러데이의 ‘l’m a fool to want you’가 지닌 생명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꽃보다 청춘들마저 노래방에서‘꼰대’들의 십팔번 격인 ‘대전블루스’를 꺼이꺼이 불러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세대를 넘은 이별의 아픔을 담은 노랫말의 공감인지 대전역의 상징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1980년대 대전역 가락국수 판매소에서 열차 승객들이 가락국수를 먹고 있다. 재빠르게 국수를 먹는 모습 속에 늘 바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겼다.
    코레일 제공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 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폼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 분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보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대전블루스, 1959년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해 노래 ) ‘대전발 영시 오십 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열차편성 시간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시간에 떠나야 한다. 당시를 살았던 모두의 기억에 영시 오십 분은 불변의 시간으로 굳었다. 대개 지명과 시간이 들어간 음악과 영화가 히트하면 후광효과는 대단해진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아야 할 것 같고 시애틀에 가면 잠들면 안 될 것 같다. ‘나인 하프 위크’는 또 어떤가. 대전을 떠올리면 우선 가락국수가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먹거리는 필요 없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먹었던 가락우동의 맛과 냄새 조바심 같은 것들이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복원되기 때문이다. 40대 이상의 연령층 대부분이 ‘대전발 영시 오십 분 목포행 완행열차’와 가락국수의 추억을 갖고 있다. 그들이 모두 대전역에서 사랑하고 헤어졌을 리 없다. 대전에 특별한 연고가 있지도 않다. ‘대전블루스’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어야만 가락국수의 추억은 강렬해진다. 대전역과 가락국수의 자동연상은 종만 치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과 같은 조건반사로 자연스럽다. 동일한 기억으로 묶인 동년배들의 유대의식은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진다. 교통의 요지인 대전역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리는 중요역이다. 열차 편성을 바꾸기 위해 혹은 중간 점검을 위해 정차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새마을호 같은 특급열차를 빼면 몇 분에서 몇 십분 동안 모든 열차가 머물렀던 대전역이다. 가락국수는 몇 분의 짧은 시간 동안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 몇 곳에 있던 간이 건물에서 쫓기듯 허겁지겁 먹는다. 별 다른 먹을거리도, 돈도 없었던 보통사람의 가락국수 한 그릇은 궁핍한 시절의 아름다움으로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여유가 넘칠수록 빈약해지고 모자랄수록 강렬해지는 선택의 기억은 모두의 습성 아니던가. 상술은 추억보다 언제나 발 빠르다. 지금도 대전역 플랫폼 내엔 깔끔한 인테리어의 우동집이 여전히 영업을 한다. 역 주변에는 ‘대전역가락국수’란 상호를 내건 점포들도 많다. 원조를 자처하건 짝퉁이건 모두 사람들의 추억 속에 있는 대전역 가락국수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천안에 호두과자가 있다면 대전엔 가락국수다. 대전역 가락국수가 아무리 유명해도 이젠 새로 생긴 국수집엔 들어가고 싶지 않다. 가락국수의 기억은 춥고 배고프며 주머니가 얇아야만 이어지는 회로인 탓이다. 돈은 없어도 지갑은 온갖 신용카드로 불룩하다. 아저씨가 된 지금 채신머리없이 쫓기듯 뛰며 허겁지겁 먹을 순 없다. 완행열차를 놓쳐도 느긋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열차가 온다. 수틀리면 더 편한 고속버스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부산이나 목포에 가기 위해 대전역에서 내려야 할 일도 없다. 도어 투 도어의 여행이 현실로 바뀐 지금 대전역이란 스치는 통과역일 뿐이다. 이젠 먹지 않아도 별로 배고프지 않다. 가락국수가 아니더라도 더 맛있는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다. 탄수화물 공포를 아는 이상 밀가루 덩어리인 가락국수를 일부러 찾아 먹을 일도 없다. 기차 안에선 어여쁜 아가씨가 뜨거운 원두커피를 내려 판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남자 판매원의 카트엔 온갖 먹거리가 넘친다. 앉아서 손만 내밀면 의자 앞 테이블은 바로 식탁으로 바뀐다. 산전수전 다 겪어보니 ‘대전블루스’를 부른 예전 가수들은 참 좋았겠다. 히트 곡 하나면 몇 십년을 우려먹고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젠 열심히 써 대고 사진 찍어 봐도 우려먹긴커녕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한다. 대부분의 작가 나부랭이의 작업 시효는 이제 시간 단위로 이어나가야 할 처지다. 그 대표격이 바로 나다. 대전역 가락국수의 추억을 우려먹어야 하는 신세는 처량하기만 하다. 아니다. 50~60대 세대들은 분야별 경쟁이 치열하지 않던 시절의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다. 힘들었지만 세상을 수월하게 살았을 개연성이 높다. 과거가 좋았다고 떠드는 모습이란 지독한 오만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옛날보단 지금이 훨씬 더 낫다. 추억의 실체란 사실 부풀려진 감상이기 십상이다. 대전역 플랫폼 안에서 팔던 가락국수의 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멸치국물에 말아낸 가락국수의 맛이 뭐 그리 대단할까. 세상의 맛있는 음식은 얼추 다 맛보았다. 두루 먹어보니 비로소 객관적 판정의 잣대가 생겼다. 추억 속의 음식들 대부분은 설렁설렁 얼렁뚱땅 만들어낸 빨리빨리의 맛이었다. 거칠고 투박하며 무성의의 극치인 음식이 대전역 가락국수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면발이 뚝뚝 끊어지는 찰기 없는 가락국수는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겼다. 주름진 굴곡엔 기름때로 새카맸다. 떨어져 나간 냄비의 귀는 짝짝이이기 십상이었다. 국물이 줄줄 흐르는 냄비를 폭 좁은 스테인리스 난간에 올려놓고 서서 먹는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는 일은 보통이다. 기차가 그대로 있는지 수시로 돌아보아야 한다. 후루룩 소리 요란하게 먹어대는 가락국수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유부조각 몇 개와 대충 썬 파가 둥둥 떠다니는 고명이 전부였다. 포장도 안 한 대나무 젓가락이 다발로 꽂힌 젓가락 통은 터져 나올 듯 통통했다. 가락국수는 얼큰해야 직성이 풀린다. 시뻘건 고춧가루는 아예 뚜껑 없는 사각 통에 담겨 있다. 세련된 통에 담긴 고춧가루를 언제 우아하게 뿌려 먹을까. 멸치국물이 시뻘겋게 될 때까지 듬뿍 퍼내 뿌려야 흐뭇하다. 가락국수는 단무지를 곁들여야 제 맛이다. 일일이 집어먹을 시간이 없으니 통째로 국물에 담가 먹은들 누가 뭐랄까. 가락국수를 파는 간이 건물 안엔 면적의 반도 더 차지한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멸치다시를 우리는 가마솥은 연신 흰 김을 뿜어내며 끓었다. 추운 겨울 서리서리 피어나는 뿌연 김은 이내 유리창에 들러붙어 기묘한 형상의 성에로 선명했다. 가락국수집 창문은 한겨울에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허기진 승객을 맞아야 하는 탓이다. 한데 대전역 가락국수의 맛과 그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왜 이리 선명할까? 되돌리지 못하는 시간의 미화는 대치의 음식을 완강히 거부한다.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어서면 반드시 우동을 먹게 된다. 별 다른 이유란 없다. 몸의 기억을 그대로 옮기는 조건반사일 뿐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의 고유한 습성임을 이제 알겠다
    Munhwa Vol         윤광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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