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19> 강릉 시민관 극장쇼

浮萍草 2013. 7. 26. 19:50
    여인들 분바르고 사나이 셔츠 풀며… 환호·눈물 쏟아내던 ‘문화 오아시스’
    우연하게 페이스북을 보다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고 울컥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체국 건물이 들어서 있는 1960년대 강릉 시민관이다. 당시 강릉 시민관은 영동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극장 쇼 공연이 열렸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 대부분은 강릉 시민관 앞 임당동 사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동고속도로에서 강릉시내로 진입하는 관문에 자리했던 그곳은 최대 번화가였다. 명주군청이 바로 앞에 위치했고 속초와 삼척 등 영동지역을 사통팔달로 이어준 강원여객 터미널 그리고 강릉 KBS 영동지국과 강릉극장과 동명극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70년대 한 극장쇼 무대에 선 가수 나훈아. 최규성 씨 제공
    1960년대 코흘리개 시절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매일같이 강릉 시민관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주로 한국영화를 상영했던 시민관은 가끔씩 영화 간판이 아닌 유명가수들 쇼 무희들이 장식된 화려한 간판이 걸려 내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극장 쇼가 열리는 날엔 가수들과 코미디언 야했던 댄스 걸들을 구경하기 위해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어쩌다 남진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이 출연하는 날은 강릉시 전체가 들썩거리는 축제일이었다. 아침부터 극장 쇼에 가려는 강릉 시내 누나들과 아줌마들의 분 냄새가 시내를 진동하며 도시 전체가 달뜨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취학 전 꼬꼬마였던 나는 매일같이 모르는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의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가 무료로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극장 쇼가 열리는 날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도 너무 많고 입장료가 배로 뛰어서인가 출입문에서는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는지라 쉽게 입장 할 수 없었다. 악단의 신나는 연주 소리와 더불어 관객들의 자지러지는 환성과 탄성이 극장 밖으로 새어나와 고막을 자극 했다. 도대체 극장 안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극장 쇼에 입장할 수 없었던 나는 영화를 통해 갈증을 풀었다. 1966년 개봉했던 영화 ‘밤하늘의 블루스’는 전라에 가까운 댄서들과 유명 가수들이 노래하는 극장 쇼 장면이 등장한다. 박춘석과 그 악단을 필두로 전설의 보난자 악단 워커힐 악단, 그리고 이기송과 그 악단까지 악단만 해도 4팀 이나 등장한다. 앞뒤가 패인 비키니 형식의 무대의상을 입은 무희들의 모습은 사뭇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다. 신나는 댄스곡에 맞춰 등장한 미모의 댄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며 선정적인 춤사위에 여섯 살 어린아이 였던 필자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충격에 휩싸여 넋이 나갔었다. 사실상 1950년대부터 한국대중가요계는 영화를 노래했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중가요와 영화는 공생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 전국 어디를 가도 동네마다 극장이 한두 개씩은 존재했다. 극장의 스크린 앞에는 널찍한 무대가 있었다. 극장 쇼를 위한 무대였다. 1960년대는 영상시대가 개막했지만 TV 수상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다. 지방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서조차 유명 연예인들의 얼굴을 직접 보기가 불가능했다. 이는 왜 영화와 쇼를 구경할 수 있었던 극장이 대중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는지를 증명한다. 구경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 극장과 극장 쇼는 대중의 문화적 갈증을 해갈시켜준 거의 유일한 오락 공간이었다. 극장 쇼는 인기가수나 배우를 헤드라이너로 내세우고 무명가수 코미디언, 섹시한 무희의 춤을 곁들인 일종의 버라이어티쇼 형태로 진행되었다.
    1972년 가수 남진이 군 제대 직후 시민회관에서 가진
    귀국 리사이틀에 몰린 관객들. 최규성 씨 제공
    극장 쇼에서 인기 높은 가수들은 양복을 벗어 던지고 무대 위에 드러누워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아슬아슬한 반라의 무대의상을 입은 댄서가 뇌쇄적인 춤을 추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아이스께끼, 하드를 빨던 청년들이 무대로 뛰어올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방 삼류극장의 극장 쇼의 전형적 풍경이다. 보통 극장 쇼는 일류 개봉관보다는 낙원 키네마 한일 남대문 노벨 천일 화양 동양 성남 시대 연흥 제일 신영 천호 미도 서울극장 등 2류 극장이나 변두리극장 무대가 각광받았다. 1961년에 완공된 시민회관은 극장 쇼의 결정판을 보여주었다. 당연 당대의 대중음악인들의 꿈의 무대로 통했다. 극장 쇼의 최고 인기가수는 방송에 주로 나와 조용하게 노래하는 가수보다 열정적이고 파격적인 무대를 선 보였던 가수들이었다. 극장 쇼 흥행업자는 쇼 일정을 나오면 출연시킬 가수 코미디언 악사 댄서들을 물색하기 위해 스카라극장 인근 다방들을 순례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규모가 큰 극장 쇼나 유명가수 리사이틀 전국을 도는 순회공연 때는 단체로 움직였기에 한두 번 리허설을 했지만 지방 극장 쇼 무대는 다방에서 선발된 음악인들이 급조되어 무대에 오르는 열악한 시스템 이었다.
    극장 쇼 흥행업자는 첫 공연 직전에 고사를 지냈다. 규모가 큰 무대는 만면에 미소를 띤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고사상을 차렸고 극장주와 쇼 흥행주는 흥행을 위해 제법 거금을 넣은 봉투를 희사했다. 극장과 흥행 단체는 대개 4·6제로 수입을 나누었다. 같은 날 동시다발적으로 극장 쇼가 열렸던 서울은 출연자들이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펑크를 내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 서영춘은 서울과 지방의 극장 쇼를 커버하느라 비행기를 상시 이용했었다. 하루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질 못해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이미 이륙한 항공기가 서영춘을 태우기 위해 회항했던 진풍경은 극장 쇼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1969년 당시 인기 걸그룹이던 이시스터즈가 서울
    시민회관의 신성일·윤정희의 극장쇼 무대에서 노래
    하고 있다. 최규성 씨 제공
    한두 달씩 지방을 순회하는 극장 쇼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피소드를 낳았다. 1963년 무랑루즈 쇼단이 기획한 ‘신성일 엄앵란쇼’와 ‘신성일 윤정희 쇼’는 당대 최고의 극장 쇼였다. 부산 제일극장과 태화극장을 겹치기 공연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목이 아팠던 이미자가 제일극장 공연이 끝나고 태화극장 공연을 앞두고 병원에 갔다 펑크를 냈던 것. 핵심가수 없이 쇼를 진행해 관객들의 온갖 야유에 분기를 참지 못한 쇼 단장은 이미자의 뺨을 때려 기절 시켰다. 이미자는 냉수를 먹고 몸을 주무르는 소동을 벌인 후 정신을 차렸으나 아무런 항의를 못했다. 지금과는 달리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형편없었고 상대적으로 연예계의 막강 권력자로 군림했던 극장 쇼 흥행업자들의 위상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1965년 최희준은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 달라며 난리가 났다. 하숙생은 새롭게 시작된 KBS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사실 최희준은 지방순회공연을 떠나기 전 급히 녹음만 마쳤을 뿐 가사를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5일 만에 치솟아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 때문에 당황한 그는 급히 가사를 적어 노래 하는 황당 사건을 연출했다. 1960년대 극장 쇼의 슈퍼스타 정원은 극장 쇼 무대와 음반만으로 각종 신문, 잡지와 전국의 방송국에서 50여 개의 가요상을 수상하며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민간 방송 시대가 열리며 방송의 비중이 중요해졌던 당시 극장 쇼 무대는 방송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녔었기 때문. 패티김, 이미자, 최희준, 김상희는 말이 필요 없는 60년대 스타였지만 극장 쇼 무대의 진정한 스타는 정원, 쟈니리, 트위스트 김, 이금희, 남석훈, 이태신이었다. 하루 4회 공연에 700원(당시 택시 요금이 30원)을 받는 무명 가수였던 정원은 1966년 서울 낙원극장 공연 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정진흡의 주선으로 시민회관 이미자 쇼 무대에 섰다. 순서가 왔다. 긴장해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최창권 악단이 악보를 요구하며 무명 가수에게 서러움을 안겼다.
    오기가 발동했다.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얼굴에 검은색 칠을 하고 도리구찌 모자를 쓴 채 와이셔츠를 밖으로 빼 묶는 특이한 모습으로 무대에 나갔다. 빠른 템포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 ‘하운드 독’을 슬로 템포로 변형해 노래하자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이에 당황한 밴드는 앙코르 연주를 반대했지만 그날따라 썰렁하던 객석에서 모처럼 좋은 반응이 터져 나오자 흥분한 쇼 단장은 직접 앙코르 반주를 지시했다. 신이 난 정원은 핸드 마이크를 들고 객석과 무대를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다 아예 무대에 드러눕는 파격적인 스테이지 매너로 열창했다. 정원은 무려 4차례 앙코르를 받으며 단숨에 개런티 3000원을 받는 가수가 됐다. 극장쇼의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당시 극장 쇼 무대의 최대 라이벌 쟈니리와 정원 가운데“누가 노래를 더 잘 하냐”며 관객들은 경쟁을 부추겼다. 서울 서부역 앞 봉래극장. 팝 가수들만 출연했던 쇼에 처음으로 함께 출연을 해 팬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당시 청바지에 청재킷을 즐겨 입었던 정원 트위스트 김 쟈니리는 ‘양아치 클럽’으로 불리며 극장 쇼 무대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1969년 MBC TV 10대 가수상을 받은 가수들이 이듬해 광주극장 무대에 올랐다. 배호 차례가 되었지만 무대에 서기 직전 쓰러져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사회자가 양해를 구했지만 관객들이 막무가내로 “배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흥겨웠던 분위기는 차츰 ‘입장료를 돌려 달라’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며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배호는 ‘죽더라도 무대에서 죽겠다’며 사회자의 등에 업힌 채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특유의 구슬픈 저음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더욱 애절했다. 험악했던 장내는 일순 눈물바다로 돌변했다. 국내무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탠딩 박수가 터져 나오며 땅콩이 비 오듯 무대로 쏟아졌다. 당시 극장 쇼 무대의 인기 여부는 꽃이 아닌 무대에 떨어진 땅콩의 양에 따라 매겨졌었다. 1971년 12월 저 유명한 김추자의 ‘소주병 난자사건’이 터졌다. 시민회관에서 컴백 리사이틀을 잡아놓았던 그녀는 공연무산위기를 맞았다.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이 장면은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오랜 공백기를 보낸 김추자는 1972년 12월 시민회관 리사이틀로 재기를 꿈꿨다. 극장 쇼 선전간판을 걸기가 무섭게 이번엔 화재로 인해 또다시 공연이 무산되었다. 1975년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로 불릴 만큼 인기를 회복했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며 좌절했다. 1978년 5월 방송, 음반을 제외한 극장 쇼와 밤무대에 한해 해금이 되자 대한극장에서 재기 리사이틀을 열었다. 총 관객 3만 명이 운집했던 극장 쇼 공연에서 김추자는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노래했고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이때 드레스가 흘러내렸고 가슴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극장 쇼는 1970년대 들어 열기가 조금씩 식어갔다. 1972년 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최고의 무대를 잃어버린 극장 쇼는 지방과 변두리극장의 삼류 쇼로 명맥을 유지하다 1980년 컬러TV 등장과 더불어 장렬하게 사라졌다.
    Munhwa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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