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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명동 음악살롱

浮萍草 2013. 7. 20. 09:13
    록과 맥주 그리고 사이키 조명… 70년대 젊은이들의 해방구
    1968년 한 여성잡지에 실린 미도파살롱의 대표그룹 ‘바보스’ 사진.“靜(정)이 싫다,情(정)도 싫고”라는 말은 역동적인 젊은이들의 심정을 나타낸다.문화일보 자료
    사진

    박인수와 윤항기가 출연한다는 내용의 닐바나 클럽 광고.(왼쪽 사진) 1971년 음악살롱 아마존에서 펼쳐질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을 알린 광고.(오른쪽 사진) 문화
    일보 자료사진
    국전쟁 이후 인간에 대한 신뢰가 파괴되고 공동체에 대한 환멸이 지식인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 만나야 했다. 만나서 서로의 마음속에 든 고통을 꺼내놓고 확인하고, 울고 웃었던 과정은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을 불러들인 곳은 명동의 폐허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다방이었다. 1950년대 문화예술이라는 콘텐츠와 다방이라는 문화업소의 결합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시대가 되면서 대중문화라는 콘텐츠와 상업업소라는 조합으로 대체됐다. 이후 명동은 1980년대가 되기까지 한국인들의 내면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장소로서 한국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지역이 됐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게 춤바람이다. 카바레는 1960년대에 이르러 성인들의 대표적인 유흥업소로 자리 잡았다. 카바레는 비교적 대형업소로 무대와 생음악, 댄스홀과 접대부가 필수였다. 그에 비해 19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바(Bar)는 소규모 업소로서 음악을 틀고 접대부와 더욱 은밀한 행위를 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술값은 비싼 업소였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청년들은 독자적인 문화가 없었다. 세력도 미약했고 경제력은 바닥이었기에 모든 소비행위는 성인들이 주도했고 성인들의 욕망이 곧 대중문화였다. 이런 성인들의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담아냈던 잡지가 ‘명랑’(1956년 창간)과 ‘아리랑’(1955년 창간)이었다. 명동은 이들 잡지의 단골 소재였고 판매 장소였다. 바의 여주인들에 대한 기사인 ‘명동가를 주름잡는 여인들’(명랑 65.1), 극장쇼에 관한 뒷얘기 기사인 ‘쇼쇼쇼’(아리랑 65.4)와 같은 기사들에서는 1950년대의 전화를 수습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미국식 대중문화에 젖어들고 있었던 명동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자세하게 담아냈다. 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에서 근무하는 바걸들의 사진들 카바레에서 선정적인 쇼를 펼치는 쇼걸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사진은 대중들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치정, 불륜, 연애에 대한 실화를 가장한 독자수기가 20% 정도를 차지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글들이야말로 한국 대중소설의 시초이고 보고인 셈이다. 이런 명동의 분위기는 1960년대 중반 새로운 미국식 대중문화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등장하면서 음악감상실이라는 새로운 업소를 탄생시킨다. ‘세시봉’을 대표로 하는 이 음악감상실은 비록 상업성을 표방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지닌 주인들이 경영했다. 따라서 음악감상실은 새로운 청년문화 산실 역할을 하면서 1970년대부터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는 청년들의 새로운 음악문화인 통기타음악과 록음악의 진원지가 됐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을 겨냥한 값싼 막걸리집이 등장한다. ‘쌍과부집’ ‘이모집’으로 불렸던 이곳에서 가난과 정에 굶주린 젊은이들이 과부나 이모들의 훈훈한 정에 이끌려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다. 이렇게 분위기가 저렴하게 바뀌기 시작하자 ‘갈릴레오’ ‘은마차’ ‘귀거래’ 등과 같은 바는 명동을 떠났고 ‘살롱’이라는 새로운 업소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중반에 소공동의 ‘뉘앙스’ ‘봉주르’ 등으로 시작된 살롱은 처음에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10평 정도의 자그마한 홀에서 오전과 오후에는 차와 식사를 팔고, 저녁에는 호스티스들이 양주를 파는 다방 식당 바를 겸한 업종이었다. 아가씨와 양주가 있으니 당연히 술값은 비쌌고 고객은 주로 부유층들이었다. 그런데 성인들의 고급주점으로서의 살롱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그 출발은 1966년에 미도파백화점(현재 명동의 영플라자 위치) 5층에 개업한 ‘미도파살롱’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 차를 파는 형태로 기존의 살롱과 같았으나 오후 6시 이후는 대폭 넓어진 홀에 밴드와 가수를 고용해 생음악을 감상하며 맥주를 마시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1963년에 키보이스와 애드포가 결성되면서 한국도 그룹사운드 바람이 불기 시작해 대중음악계가 변했고 이런 음악을 듣는 젊은 고객 들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룹사운드들의 주무대였던 미8군 무대는 미군 철수 조짐으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해 그것을 대체할 무대가 절실히 필요했던 단계였다. 이런 변화를 수용해 ‘미도파살롱’은 이길봉악단의 반주로 미8군 출신의 가수 현미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등이 노래를 해 성인고객을 유치함과 동시에 키보이스, 바보스 미도파스 등과 같은 젊은 그룹사운드의 생음악으로 젊은 층까지 대거 끌어들였다. 이후 ‘미도파살롱’은 명동에서 한국 록음악의 중심지가 됐다. 이렇게 명동에서 시작된 새로운 음악살롱은 더욱 대형화되면서 인근 지역으로 확대됐다. 명동의‘뉴멕시코’소공동의‘엑스포’와‘라스베거스’무교동의‘월드컵’과‘올림피아’청계천의‘아마존’ 등은 300∼400평의 넓은 홀에 저렴한 술값과 생음악 연주라는 전략 으로 업계의 판도를 바꾸어나갔다. 이 중에서 특히 젊은 층을 상대로 한 살롱은 ‘코스모스’를 비롯해 ‘라스베거스’ ‘닐바나(Nirvana)’ 등이었다. 소공동의 경향신문 뒷골목에 자리했던 ‘라스베거스’가 아마추어 팝콩쿠르 고고경연대회를 벌였고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와 같은 외국 그룹의 실황연주 필름을 상연 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코스모스’에 이어 1970년쯤 등장한 ‘닐바나’는 그룹사운드에 집중함으로써 록음악의 명소가 됐다. 오리엔탈호텔에 자리 잡은 ‘닐바나’는 히식스 키브라더스 데블스, 피닉스 등 당시 정상의 록그룹을 전속시켰다. 한국 록음악의 초기시대를 다루었던 2008년의 영화 ‘고고70’의 배경이 바로 ‘닐바나’ 음악살롱이었다. ‘닐바나’는 입구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크게 날개를 편 아프리카산 콘도르의 박제표본이 손님을 맞았다. 발을 들여놓으면 통로에는 온갖 조류와 맹수가 블랙라이트를 받아 금방 달려들 듯하다. 전쟁의 폐허 속의 재건을 상징하는 철조망과 빌딩의 신기루 속을 뚫고 2층 닐바나의 플로어에 당도하면 더욱 환상적인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사이키델릭의 스트로브라이트 창백한 블랙라이트 아이스크림조명 쿨링조명 회전조명 브라운라이트 환구조명 베이비스포트와 핀스포트 록밴드의 사운드가 5색으로 채색되는 컬러오르간조명 등 모든 첨단 조명이 총동원됐다. 이런 조명들이 화려한 스테인리스로 장식된 천장과 바닥에 반사되면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그야말로 닐바나(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느낌을 주었다. 실내 장식은 예술작품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인도의 사원을 연상케 하는 홀의 네 벽과 기둥에는 세계적인 명작 현대 예술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선데이 서울’은 1970년 8월 16일자에 ‘조영남의 잦은 증발로 코스모스 살롱은 울상’이라는 기사를 실었는데 조 군이 ‘빵꾸’를 내면 같이 출연하는 가수들이 더 노래를 불러야 했다고 썼다. “코스모스 살롱의 파라다이스 룸에 출연계약을 맺고 있는 조영남은 심심하면 빵꾸를 내곤 해서 모처럼 기대하고 찾아갔던 팬들에게 실망을 주기가 일쑤. 더구나 입구에는 ‘오늘 조영남 출연’이란 포스터까지 붙어있어 믿고 들어간 사람은 사기당했다고 씁쓸한 표정. 그런데 코스모스 쪽의 말을 들어보면 조영남은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증발해 버리곤 해서 어쩔 수 없다는 해명. 조 군이 빵꾸를 내면 같이 출연하는 가수들(캔디시스터즈, 송창식 등)이 그만큼 더 노래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당시 한 주간지에서는 ‘김홍탁 군 코스모스에서 이빨로 전기기타 연주’라는 타이틀로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살롱 코스모스에서는 최근 점증하는 고고선풍에 발맞추기 위해 지난주부터 매주 화요일 ‘코스모스 어 고고’ 프로를 마련, 고고팬들까지 흡수하고 있다. 그곳 전속 그룹인 히식스가 들려주는 우드스톡 축제 레퍼토리 및 작년에 작고한 사이키델릭 음악의 귀재 지미 헨드릭스식의 의상과 연주를 리더 김홍탁이 재연한다. 치아로 전기기타를 연주하는 리더 겸 작곡가 김홍탁의 열연 외에도 미8군 스테이지에서 활약하는 록그룹을 게스트로 초빙하는데 MC에는 오랜만에 TBC 라디오의 DJ 최동욱이 다시 등장한다.’(주간경향 1971년 5월 5일자) 중년층을 상대로 하는 ‘뉴멕시코’ ‘월드컵’ ‘아마존’과 같은 살롱들은 젊은 층을 상대로 하는 살롱과는 그 분위기가 달랐다. 웨이트리스가 술좌석에서 시중을 들며 말 상대를 해주고 무대에서는 캄보 풀밴드 악단이 트로트 계열이나 팝 계열의 반주에 인기가수가 노래를 하고 쇼걸의 농도 짙은 스트립쇼까지 펼쳐졌다. 바,나이트클럽에서 한 번 기분 내려면 입장료,호스티스비 테이블차지 등으로 1만 원 정도로도 모자라지만 이런 살롱은 1인당 1000원(1970년 당시 극장요금 200원) 정도면 하룻저녁 생음악과 함께 느긋하게 즐길 수 있으니 살롱이라는 업소는 1970년대 초반 명동의 새로운 유흥업소로 나날이 번창해갔다. ‘아마존’은 그 규모나 출연진에 있어서 여타 살롱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남진이 군에 간 사이 급속히 부상한 나훈아 때문에 남진이 1971년 6월 제대한 이후 이 두 사람은 1971년 가을에 시민회관에서 숙명의 라이벌전이라는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민회관 공연을 앞두고 이들의 인기를 이용한 작은 소동이 ‘아마존’에서 벌어졌다. 1971년 8월 20일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업소에서 라이벌 대결을 벌인다는 광고가 ‘아마존’에 나붙었다. “쇼킹화제 인기 타이틀매치 퍼레이드 남진 대 나훈아 두 거성이 숙명의 상면. 생각도 못할 가요계 사상 처음으로 한 스테이지에서 마주친 숙명의 두 거물급 싱어의 불 뿜는 열전의 밤”이라는 선정적인 문구와 히트송 대결 팝송 대결,신곡 취입 보고 히트송 바꿔 부르기 입장고객 전원의 인기투표 등 팬들을 유혹할 만한 내용을 광고했다. 하지만 남진은 자신의 쇼를 기획했던 AAA 쇼단과 계약을 할 때부터 공연을 앞두고 업소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돼 있어서 이런 출연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광고는 업소가 수익을 목적으로 상의도 없이 추진한 무리한 출연계획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남진은 나오지 않았고 나훈아만 출연해 남진이 꽁무니를 뺀 모양새가 됐다. 이에 따라 쇼단장은 남진을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고 열 받은 남진은 업소를 연이어 고소했다. 시민회관 라이벌 대결을 앞두고 신고식 한 번 뻑적지근하게 한 셈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청년문화세대는 정신적 가치가 아니라 육체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들이 기성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주려 했다. 이에 기성세대는 온몸을 강타하는 굉음의 록음악에는 고개를 흔들었고 장발과 미니를 보고는 혀를 찼으며 대마초에 이르러서는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청년세력들의 육체적인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담아낸 매체가 주간지다. 당시의 연예주간지는 표지부터 선정적이었고 잡지 중간에 3개의 면으로 펼쳐지는 누드 브로마이드 사진은 남성들의 성감대를 정확히 겨냥한 것이었다. 고민남 고민녀로 시작해 “어찌하면 좋습니까”로 끝맺는 성상담은 성에 대한 태도가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신중현의 대마초 흡연기를 상세히 소개한‘신중현의 해피스모크 환각여행기’(주간경향 1970년 6월 24일) 같은 기사는 1970년대 청년들이 추구했던 사이키델리아의 충실한 보고서다. ‘한국 최대의 보컬그룹잔치 5·16기념 경연대회’(선데이서울 1969년 5월 4일)와 같은 중요한 음악사건까지 다룸으로써 본격 대중문화잡지를 지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Munhwa         김형찬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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