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16> 광화문 일대 ‘2류’요정들

浮萍草 2013. 7. 6. 09:27
    광화문 2류요정 아가씨들 ‘질펀한 관능’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연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의 노래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애창곡 가운데 ‘광화문연가’의 인기가 만만치 않다. 
    광화문과 별 연관 없는 사람들까지 이문세의 노래를 듣고 부르며 감응하는 이유는 뭘까. 
    모두의 추억을 되살릴 랜드마크 광화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과거에 풍류객들과 놀던 기생들은 그 시대의 패션과 기예를 선도했다. 최고급 기생집이 현대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펼쳐나간 SBS
    드라마 ‘신기생뎐’의 한 장면. 문화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광화문연가’가 주는 감흥의 동시다발적 울컥증을 겪는다. 세월 흘러 옛 흔적을 찾기 힘든 도심에 추억의 장소가 그대로 있는 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도, 언덕 밑 정동 길의 조그만 교회당도 여전하다.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 핑계가 아니더라도 광화문연가를 불러야 한다. 누군들 이곳에서 연애하고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릴없이 찾아봐도 여전히 아련하고 푸근한 기억과 냄새와 소리가 느껴지는 과거의 장소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야기가 빈곤한 젊은 시절이란 마른 종이처럼 푸석푸석하다. 알량한 이야기마저 추억 거리와 건물이 없으면 신빙성을 의심받게 된다. 세월을 딛고 서 있는 낡은 건물의 위안과 안도감은 개인사의 공백도 메워준다.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면 기억도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내용마저 부실해지기 십상이다. 한 도시를 인상 깊게 만드는 건 건축물과 거리의 모습이다. 여기에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가 더해져 시대의 풍경들을 만든다. 기억은 눈에 뜨이는 것을 강렬하게 간직한다. 세련된 옷과 자동차가 넘쳐도 배경의 건물과 거리의 빈곤함뿐이라면 슬픈 일이다. 오래된 건물이 헐리면 형체만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인간들의 기억마저 매정하게 걷어가 버린다. 서울 도심에서 그래도 변하지 않은 곳을 꼽자면 덕수궁 주변의 정동과 신문로 일대가 든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덕수궁을 재개발할 리 없다. 건드릴 수 없는 역사유적 때문에 인근에 산재해 있는 근·현세 건축물들도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나마 옛날을 떠올리고 헤어진 여자와 남자를 추억할 광화문연가를 부를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늙을 것 같지 않던 이문세의 나이가 내일모레면 육십이다. 푸릇푸릇했던 광화문의 주역들도 이제 흰머리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영감과 마님 신세다. 낡은 건물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이 든 사람도 귀하게 여겨야 옳다. ‘광화문연가’는 이문세가 부를 때 비로소 감동의 진폭을 최대치로 높여주지 않던가. 아무리 후배 가수들이 열창을 해도 원조 이문세를 대체할 방법은 없다. 하지 말라는 연애를 벌인 건 열아홉 살이었다. 광화문 주변엔 많은 학교가 있었다. 중심의 전통 명문고는 물론 북쪽의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예일여고와 선일여고 서쪽 용강동의 마포고 남쪽 후암동의 용산고 수도여고 동쪽 신설동의 대광고까지…. 이들은 학교가 마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광화문에 모여들었다. 고삐리들의 해방구쯤으로 여겨지던 당주동 골목과 신문로 주변엔 여학생들이 버글거렸다. 넘치는 여학생들을 그냥 보내면 젊음이 아니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백합제과에서 빵을 먹었으며 낙엽 진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사이로 난 길은 정동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의 통행이 적었다. 중요시설을 지키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덕분이다. 광화문 키드들은 이를 거꾸로 활용했다. 영국대사관 후문 쪽으로 연결된 후미진 골목은 수시로 키스를 하는 장소로 쓰였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화여고 쪽으로 방향을 틀면 광화문연가의 조그만 교회당 정동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풍스러운 건물은 분위기도 좋았다. 예원학교 옆엔 배정자의 별장도 있었으며 언덕 위에 솟은 러시아 공사관 건물도 있었다. 이들 장소는 멋진 데이트 장소였으며 놀이터로 쓰였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유명한 경양식집 ‘이따리아노’의 파스타를 여학생에게 사 주는 만용은 당연했다. 광화문 키드는 죽자 사자 9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직장을 갖고 애 낳고 아등바등 사는 장삼이사의 찌질한 이후 행적은 새삼 떠벌릴 내용이 없다. 광화문 키드의 직장 생활 또한 광화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 조선, 중앙일보, 서울신문 같은 유명 신문사와 mbc 방송국이 몰려 있던 광화문통은 언론인의 구역이다. 잡지사 기자로 활동했던 1980∼1990년대 대부분을 나 역시 광화문 언저리에서 보냈다. 30년 가까이 지냈던 광화문 일대의 구석구석을 모를 수 없다. 동아일보 출신의 편집장은 광화문통의 대선배였다. 당주동과 정동, 신문로 일대의 선술집과 밥집을 순례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의례적 회식의 식상함을 깨부수고 멋진 장소와 분위기로 이끈 선배의 역량은 과연 돋보였다. 지금은 재개발로 헐린 신문로 뒷골목이다. 동화면세점 뒤쪽 길부터 옛 경기여고 자리로 이어진 좁은 골목엔 허름한 술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정들이 즐비했다. 맞다! 분명히 요정이다. 정치 비화에 나오는 삼청각, 대원각, 명월관 같은 으리번쩍한 규모와 시설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여자가 나오는 고급 요릿집을 지칭하는 요정과 신문로 뒷골목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요정의 이름이 ‘비원’이었던가. 이 일대의 요정들은 주로 주변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염가 전략을 펼쳤다. 요정 주인도 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었음이 분명했다. 일반 술집과 요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술집에 여자가 있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여자의 역할과 용도다. 예전 기생의 역할은 술만 따르는 작부 역할을 거부했다. 문·사·철(文史哲)을 꿸 정도는 아니더라도 손님과 대화의 격을 맞출 줄 알았다. 게다가 여인으로서 나름의 순정을 보이는 의리를 지켰다고나 할까. 신문로 뒷골목의 요정 ‘비원’은 얼추 기생의 흉내를 내는 여자들이 나왔다. ‘비원’의 방으로 들어가면 여느 한정식 집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몇 개를 연결해 인원수에 맞춘 기다란 상엔 흰색의 식지를 깔았다.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자의 등장은 당연한 순서다. 음식이 나오면 여자는 생선의 가시를 발라 입에 넣어주었다. 뜨거운 음식은 입김으로 식혀 조심스레 먹여주었다. 인원에 따라 음식상의 가격이 정해지고 술을 무제한 제공하는 서비스가 요정의 기본이다. 맛깔스러운 한정식 요리로 배를 채우고 술이 한 순배씩 돌면 취흥이 도도해진다. 기예를 갖춘 늙은 기생의 몸놀림이 분주해진다. 벽에 세워놓았던 가야금을 켜기 시작한다. 반짝이 금박 현란한 한복의 원색은 형광등 조명을 받아 적당한 채도로 누그러진다. 가야금의 선율은 탱탱한 긴장으로 좁은 방의 공명을 증폭시켰다. 잔을 돌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새파랗게 젊었으니 주는 술잔을 마다할까. 소주와 맥주가 번갈아 섞이고 원 샷을 외치는 독촉 또한 소리 높다. 옆에 앉은 예쁜 언니들은 분주했다. 기다란 상의 저편에서 돌리는 선배의 잔을 전달해 돌리고 안주도 챙겨줘야 할 테니. 옆에 앉은 한복의 여인은 매력적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치마를 내 무릎에 덮었다. 우리의 옷이 지닌 넉넉함을 언제 느껴 볼 기회가 있었던가. 남의 시선은 가리고 자신의 손은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의외의 용도로 돋보였다. 여자의 손놀림은 빠르고 능란했다. 바지의 지퍼는 내려졌고 물건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옆자리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방 안의 풍경은 상을 중심으로 펼쳐진 우산이 흩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시를 읊고 인생을 관조하는 고담준론은 펼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 대신 산발적으로 터지는 신음과 교성, 킬킬거리는 웃음의 빈도로 대신했다. 선배는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마이크로 삼았다. 노는 이들은 놀고 노래는 불러 젖혀야 제격이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묵직한 중저음 대신 쇳소리로 날카로웠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전두환 정권을 향해 날리는 절규 같았다.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나오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언니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라 불렀다. 절망의 시대에 이렇게라도 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밖을 보면 답답하고 당장은 해결될 일이 아무것도 없을 듯했다. 경찰에 잡혀간 동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후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술을 더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고 언니의 치마 속을 더듬으며 잊어야 했다. 한 장소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원스톱 서비스가 신문로 요정의 특징이었다. 음식과 여자가 나오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편한 분위기와 싼 가격으로 직장인들을 유혹했다. 1980년대 중반 월급쟁이들의 월급은 30만 원 정도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신문로 요정에서 하룻밤 노는 데 두당 2만∼3만 원 들었던 것 같다. 이후 선배 편집장이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요정 ‘비원’을 맘먹고 들르는 아지트로 삼았다. 당시엔 신문로 주변에 요정이 몰려 있는 이유를 몰랐다. 의문은 최근에야 풀렸다. 조선 말기 퇴출된 관기들이 생존을 위해 궁 주변에 요릿집을 차리게 된 것이 출발이다. 고관대작들을 위한 고급 사교장으로 정치적 뒷거래를 위한 장소로 쓰였다. 1980년대 초반엔 일본 관광객들을 위한 특수 유흥업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 종로와 삼청동, 교남동 일대의 대형 요정들이다. 신문로 일대의 요정들은 덕수궁 주변의 관리들을 상대로 한 성격이 짙다. 덕수궁 돌담길 끝 쪽에 최근 문을 연 고급 한정식 집 또한 예전의 요정 자리임이 확인됐다. 세상의 모든 공급은 수요에 따라 가지치기를 하게 마련이다. 궁 주변에 들어선 요정과 술집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보통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었다고나 할까.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요정들은 1990년대 이후 북창동이나 강남의 유흥가로 흩어지게 된다. 요정 출신의 마담들은 다른 장소에서 풀살롱을 열었을 것이다. 한정식 메뉴가 퓨전 먹을거리로, 소주·맥주가 위스키로 바뀌게 된다. 한복 입고 기생 역할을 하던 여자들은 세련된 매너의 접대부로 변했다. 빨리 취하게 해서 남정네들의 주머니를 터는 기막힌 재주는 나날이 발전해 갔다. 도시는 다채로움을 지녀야 풍성하다. 고급과 저급이 함께 공존하는 촘촘한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고 믿는다. 세련된 매너의 종업원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강남의 술집도 필요하다. 반면 육덕진 여인네의 관능이 흐르고 질펀한 농담이 오가는 허름한 술집도 있어야 한다.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서울의 유명 맛집은 대개 뒷골목이나 시장 통과 연결돼 있다. 맛은 분위기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신문로 요정 ‘비원’이 생각난다. 분위기는 적당히 지저분하고 음식은 맛깔스러운 이상한 조화의 쾌감이 잊히지 않아서다. 게다가 한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풍기는 수더분함이 친근하고 편하기도 하다. 술집 여인네들이라는 게 모두 몸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도 당시의 언니들은 적당한 순정과 인간적 따사로움이 있었다. 행여 밤을 지새운 날 아침 머리맡에 빤 양말과 박카스 한 병이 놓여 있는 그림을 기억한다. 인간의 애정이란 별것 아니다. 상대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마음이 전부다. 이후 온갖 술집과 행태들을 보았다. 쾌적하고 안락하긴 하나 재미는 훨씬 덜하다. 술값으로 내는 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생기는 일이다. 요정에서건 시장에서 순대 국밥에 소주를 곁들이건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하나다. 조건 없이 기분 좋아야 한다는 점.
    Munhwa         윤광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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