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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대문운동장

浮萍草 2013. 7. 12. 23:12
    응원은 뒷전, 막걸리 돌리다가 파도타기 한번 해주던…
    1958년 10월 21일 미국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와 사실상의 국가대표였던 전(全)서울군(軍)의 경기가 열렸던 당시의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운동장 전신).

    왼쪽 사진은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오른쪽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많은 팬을 불러모은 선린상고 박노준 선수. 문화일보 자료사진
    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대문운동장의 공기는 늘 땀 냄새와 술 냄새로 어질어질했고 심지어 곳곳의 구석진 곳에서는 지린내마저 풍겨 콧등을 찌푸리게 만들곤 했다. 여름엔 더웠고, 봄·가을엔 추웠으며 딱딱한 의자는 엉덩이가 아팠고 등받이가 없어 몇 시간 동안 앉아있자면 허리도 뻣뻣해졌다. 또 대개의 순간에 무언가에 몰입하고 흥분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맨정신으로 겉돌아야 했고 그러면서 이게 그렇게 기쁜 일인지 이게 그렇게까지 분노스러운 일인지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래서 정작 그곳이 사라진 지금, 얼추 그 언저리에 멀뚱히 세워져 있는 조명탑을 볼 때마다 이렇게 내 가슴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은 스스로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 시절 나에게서도 동대문이라는 지명이 묘한 흥분을 이끌어내곤 했다는 점은 어쨌건 인정한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쯤 청계천 고가도로 밑으로 큰길 따라 죽 늘어서 있던 수백 개의 헌책방을 건너건너 돌다보면 만 원짜리 한두 장만으로도 더 이상 무거워서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책을 고를 수 있었고 그 블록 안쪽 으로 모세혈관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라디오니 카세트니 하는 꿈의 전자제품들 혹은 ‘소련군이 쓰던 쌍안경’이라거나 ‘수심 100m까지 완전 방수되는 전자손목시계’라는 따위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미심쩍어지는 신기한 아이템들이 가득했다. 어느 골목에서는 동네 레코드가게의 반 값 혹은 3분의 1 값에 살 수 있는 불법복제 가요 테이프들이 넘쳐났고 또‘소장가치’가 있다고 굳게 믿었던 이소룡과 저우룬파 (周潤發)가 주연한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들 역시 동네 대여점에서 신작 테이프 두어 개 빌리는 값에 파는 가게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배 속이 좀 출출해지면 역시 동대문운동장 앞 포장마차에서 팔던 기가 막히게 고소하던 토스트, 그리고 냄비에 후루룩 끓여서 다시 담아 내주던 사발면, 또 냉커피, 보리냉차 아니면 겨울엔 설설 끓는 양동이에서 막 꺼내들면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뜨겁던 유리병 속의 베지밀. 하지만 청룡기나 황금사자기 같은 고교야구대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그 거리에서 한가하게 토스트나 씹어서는 안 됐다. 그런 날에는 전라도, 경상도, 또 가끔은 충청도나 강원도까지 각 지방에서도 사투리가 제일 억센 이들로만 골라 모아다가 목청대결이라도 벌이는 듯 소란스럽고 정신사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에 마땅한 패거리도 없이 혼자 흥과 술에 취한 어느 아저씨가 건네는 실없는 소리에 무심코 말대답이라도 하며 걸려들었다가는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전에서 원래 9회 말이 4대 4 동점으로 끝나야 하는 것을 심판이 3루에서 주루방해 판정을 하는 바람에 군산상고가 운 좋게 끝내기로 이긴 걸 아느냐는 전설부터 시작해서 1981년 봉황기 대회 결승에서 박노준이 발목만 부러지지 않았어도 선동열 못지않았을 거라는 한탄까지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고교야구사를 꼼꼼하게 도 복기하는 대강연을 꼼짝없이 다 들어야만 하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다닌 건 대학 때가 처음이었고 그때는 이미 열렬하게 응원하던 프로야구팀이 따로 있던 처지인지라 동대문야구장이 ‘나의 무대’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우리 학교 야구부가 결승전에나 오르고 그래서 결승전이 열리는 날 대부분의 수업이 돌발적으로 휴강을 하면 ‘여기서 마시나 거기서 마시나’하며 조금 색다른 주점 삼아 찾는 곳이 동대문야구장이긴 했다. 그러면 어차피 야구경기는 뒷전에 놓고 막걸리 사발 돌려대다가 점수라도 내거나 뺏기면 그저 파도타기 응원에라도 끼어들 듯 한 번씩 소리 질러주고 한 번씩 노래 불러주고 한 번씩 3 3 7 박수나 쳐주면 되는 곳이 그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심상하게 겉도는 입장이었다고는 해도 결국 경기 초반 한두 점 밀리던 것을 역전 홈런 한 방으로 뒤집어놓을 때의 찌릿한 전율감을 또 그렇게 앞선 채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 벌이는 풀카운트 승부에서 상대팀 마지막 타자가 파울을 네댓 개씩이나 쳐대며 버틸 때의 적막한 초조함을 그리고 끝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버티며 우리 팀 투수가 던진 10구쯤 되는 공에 상대 타자의 시원스러운 헛방망이질이 나오며 우승이 결정될 때의 황홀한 희열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쨌든 그렇게 요란하고, 대단하고 시끌벅적한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창하고 신나는 기념할 만한 일들이 해마다 달마다 일어나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내 기억과 몸에 저장되어 왔던 공간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뉴밀레니엄’이라며 호들갑스럽게 맞이한 21세기가 막 시작되면서부터 동대문운동장을 없앴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이따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꾸준히 최신식 의류쇼핑몰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촌스러운‘시장’에서 ‘패션 메카’로 탈바꿈한 동대문 일대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남은 칙칙한 낡은 콘크리트 더미를 치워버리고 녹지로 가꾸면 주변 상점과 부동산의 가치가 훌쭉 뛰어오르리라는 아이디어들이었다. ‘물론 이해도 가고, 일리도 없지 않다’ 싶은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하랴. 남대문 시장을 활성화하겠다고 남대문을 철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떻게 손님 좀 더 모으고 겉모양 좀 깔끔하게 꾸며보겠다고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겠나. 그러자고 결정이 나더라도 수십 년간 그곳에서 뛰고 응원하고, 함께 울고 웃은 이들이 수백 만은 될 텐데 그들이 과연 그걸 용납할 수가 있겠는가. 뭐 그런 느슨한 생각들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 몇 해가 지나고 추진력 좋기로 소문난 건설회사 회장 출신의 서울시장이 취임해 뚝딱 청계천고가도로를 없애버리고 복개됐던 청계천을 복원하는가 싶더니, 동대문운동장의 공원화 계획을 수립해 착착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터전을 잃은 청계천 노점상인들이 모두 동대문운동장으로 몰려와 운동장을 순식간에 벼룩시장으로 바꿔놓더니 다시 다음 시장 대에는 ‘설마’ 하는 틈에 동대문운동장의 철거 계획이 확정되고 슬금슬금 곳곳에 공고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세상은 그저 조용했다. 철거가 시작되기 서너 달 전, 마지막으로 봉황기 고교야구대회가 치러지고 또 대통령배 대학야구대회가 치러졌지만, 십수 년 전과는 달리 한산해진 스탠드 한쪽에 ‘철거 반대’를 나지막하게 외치며 홀로 나풀거리던 현수막 한두 개를 제외하면 과연 한두 달 뒤 이 운동장에 닥쳐올 운명에 대해 사람들이 알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기이했던 평온함이 그 야구장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8일 이미 며칠 전부터 관중석 플라스틱 의자를 뜯어 실어내는 시설관리공단 트럭 몇 대와 주변 군부대 행보관들이 선탑해온 ‘육공’트럭 몇 대가 다녀가며 황량해진 스탠드에 중장비의 육중한 해머질이 시작됐고 다시 이듬해 봄에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 휑한 불모지가 한 덩어리 남겨 지게 됐을 뿐이다. 거대한 야구와 축구와 육상과, 스포츠 전체의 업적들 역사들. 운동장이 사라진다고 그 업적과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김준환의 끝내기 안타가 터졌을 때 군산상고의 2루 주자 양기탁이 어디쯤을 돌아 어떻게 달리다가 어디쯤에서 부산고 3루수의 몸에 걸려 휘청거렸는지를,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날린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은 어떻게 날아서 어디쯤에 떨어졌는지를 구체적인 공간과 거리의 기억으로 더듬을 수 없게 되면서 역사는 기억을 서둘러 떼어놓은 채 기록으로 화석화되어버리게 됐고 그래서 조금 더 사람들에게 훌쩍 낯설고 서먹한 자리로 멀찍이 밀려나게 된 점이 아쉬운 것이다. 돌아가신 뒤에야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처럼 이제 사라지고 ‘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어버린 자리에서 동대문운동장을 그리워 하고, 안타까워한다. 너무 쉽게 사그라져버린 그날의 열정을 떠올리며 아쉬움과 야속함으로 말이다.
    Munhwa         김은식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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