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35 송광사 (하)

浮萍草 2013. 6. 25. 07:00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막힌 우연
    고종의 전패 자리에 경안군의 원불이 자리해 경안군 용상에 앉힌 것은 누구의 뜻이었을까 조가 즉위한 후 노론의 집권에 반발하는 소론과 남인들이 전국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호서의 이인좌 호남의 박필현, 영남의 정희량이 주축이 되어 주도한 무신란(戊申亂)이 바로 그것이다. 반란의 주동자들이 내건 명분은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영조는 경종을 죽인 범인이고 또한 영조가 조선의 적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반란군은 “독살된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붙였다. 이 반란에 아무런 동조도 하지 않았던 밀풍군은 졸지에 역적의 괴수로 둔갑했다. 오항명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반란세력들이 진압되자, 밀풍군은 목을 매 자살했다. 소현세자가 피를 토하며 죽었을 때부터 예정돼 있던 운명이었다. 현종 대에 예송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로 인해 수차례의 사화가 발발한 것도 영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무신란이 발발한 것도 그 이면에는 소현세자의 적통이 진짜 임금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송논쟁 당시 조대비가 효종의 상복을 1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가 아닌 차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주장은 왕실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어 송시열 등의 조정대신들은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가는 등 처벌을 받았다. 영조 대에 발발한 무신란 또한 소현세자의 적통이 살아있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처럼 소현세자의 적손들은 조선왕조에 엄청난 위험분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왕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밀풍군의 죽음 이후 경안군의 후손들은 역적 집안으로 낙인찍혔고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숨을 죽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경안군을 위해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은 본래 송광사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다. 이때의 관음전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한국전쟁 후 퇴락해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이후 송광사에서는 이 보살상을 성수전 안으로 옮기고 성수전의 이름을 관음전으로 개칭하였으니 현재 송광사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멋스러운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 한 가지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성수전은 본래 고종을 위해 조성된 기로소원당이었다. 기로소는 2품 이상의 문신들이 70이 넘으면 들어가는 사교모임으로 고종은 51세가 되던 1903년(광무 3) 기로소에 입사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송광사를 기로소원당으로 삼으면서 왕실의 장인들을 파견해 경내에 성수전을 신축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전까지 성수전에는 고종 황제 부부의 전패가 모셔져 있었고 기로소 대신들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불화가 걸려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종의 전패는 치워졌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관음전의 보살상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최근까지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이 누구를 위해 조성된 것인지 왕실과 연관이 있는지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이 보살상이 경안군을 위한 조성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더라면 보살상은 진즉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2009년 송광사에서 관음보살상의 개금을 위해 복장을 열자 여기에서 경안군의 저고리와 발원문이 들어 있었다. 이때에서야 비로소 고종의 전패가 놓여있던 자리에 경안군의 원불이 자리잡았고 그동안 조정의 당상대신들이 경안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음이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고종의 위패를 치우고 그 자리에 경안군의 원불을 놓은 것은 아마 사람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교신문 Vol 2915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교수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