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33 삼막사(하)

浮萍草 2013. 6. 18. 07:00
    父子간에도 나눌 수 없었던 ‘권력’
    ‘병속 새’로 살아가기에 너무 뛰어났던 강빈 뒤늦은 추숭.수호사찰 지정이 무슨 소용이랴 현세자가 8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오자 인조는 아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소현세자 부부는 수백여 대의 수레에 비단과 금은보화,진귀한 물품들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하지만 인조와 조정의 신료들은“세자가 포로기간 동안 학문은 작폐하고 돈벌이에만 몰두했다”고 비난했고 결국 소현세자는 자신이 싣고 온 400여 필의 비단과 황금 19냥을 호조로 귀속시켰다. 그런데 청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인조실록>에는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기록돼 있다. 인조는 원손인 소현세자의 큰아들 대신 자신의 둘째아들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청에서 불러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넉달 뒤 인조는 강빈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궁중에서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강빈의 짓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초과정에서 강빈이 독약을 넣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인조는 강빈에게 또 다른 죄를 갖다 붙였다. 세자 부부가 귀국하기 전 청나라 조정을 움직여 왕위에 오르고자 했는데, 그 배후가 세자빈이었다는 것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강빈은 보개산의 어느 사찰에 금 200냥과 엄청난 양의 비단을 보시했는데,이 불사 또한 국문과정에서 ‘인조를 저주하기 위한 기도’로 둔갑되었다. 강씨가 재물을 희사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DMZ 안에 위치해있던 심원사가 강 씨의 원당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저주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강 씨의 나인들과 강씨가 불공을 드리던 보개산의 비구니 7명이 잡혀왔다. 이들의 문초 내용에 따르면 강빈이 혜영이라는 비구니에게 갓난아이의 시체를 주었는데 시체의 가슴 근처에 ‘용왕 수신은 애련히 여기시어 제도해 주소서(伏願龍王水神 哀憐濟度)’라고 쓰여 있었고 붉은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에 나비 모양을 새긴 패옥 (佩玉)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의 시체를 이용해 인조를 저주하기 위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 문초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하지만 문초 과정에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고 이들의 실토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공초 기록만 의금부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사건으로 강빈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들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강빈과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항상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강빈처럼 수완 좋은 며느리가 살아있는 이상 인조는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까지 죽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73년이 지난 1718년(숙종 44)에 이르러 조정 신료들의 요청에 따라 폐서인이 되었던 강빈은 다시 복권되었다. 숙종은 “내가 강빈의 옥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슬퍼해 온 지가 오래 되었다. 아! 원통함을 알고서도 그 억울함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옳은 일이겠는가?”라며 강씨에게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민회빈이라는 시호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강빈의 묘는 민회원(고종대 영회원으로 개칭)으로 추숭되었고, 이곳을 수호하는 사찰로 삼성산 삼막사가 지정되었다. 조선이라는 병 속에 갇힌 강빈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부서지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를 병 밖으로 꺼내기에 그를 둘러싼 남자 들은 너무 무능했고 조선이라는 이름의 병은 너무 비좁았다.
    불교신문 Vol 2911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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