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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비문에 대한 연구 실적 (4부)

浮萍草 2013. 5. 17. 23:26
    처음 새길 때의 글 원문을 찾는 게 가장 중요
    4.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대한 연구 실적 1) 100여 년 간의 연구 실적 1 984년 이형구는 ‘광개토호태왕비문에 대한 연구 실태를 보면 1880년경에 광개토호태왕비가 재발견되고 나서 100년이 지난 1984년경까지 이 비에 대한 연구가 무려 2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나 그 중 우리나라 학자의 논문은 50여 편에 불과한 데 비해 일본인 논문이나 논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형구의 위 책 부록에 실린 연구 실태를 보면 총 335개 연구 중 우리 학자들의 연구 제목과 숫자는 매우 빈약하다. 대부분 연구의 내용이 주로 일본인이 이 비를 변조했다는 것을 지적하거나 현 탁본을 가지고 해석하는 데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2) 일본에 의한 내용 해석의 왜곡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을 공격한 지명은 쪼아내고 신묘년 기사 중에‘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XXX羅 以爲臣民’의 기사 중 뒷 부분을 ‘倭가 辛卯年에 海를 건너와서 百殘XXX羅를 격파하여 그들의 臣民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해석이 엉터리라는 데 대해서 이미 복초 최인 선생께서‘百殘이 백제가 아닌 가라와 인근한 소국명이며 XXX羅가 신라가 아니라 임나가라’라고 명확하게 지적을 해놓으셨다. 오늘 발표한 김덕중 선생께서는 최근 우리 민족의 한문형식인 조선사문이라는 사실문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해석을 했으므로 오늘의 발표를 기대한다. 그리고 김덕중의 발표를 통해 어떻게 왜곡해석하고 있는지도 함께 알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나라 학자들의 연구 실태 ⑴ 처음 새길 때의 글 원문을 찾는 게 가장 중요 사실 우리로서는 변조 전의 원본, 즉 현재는 쪼아내어 없는 결자를 찾아내는 연구가 최우선이 되어야 했는데 1905년 일본의 외교권 탈취 늑약 이후에는 통제를 받았고 광복 후에는 중국지역 통행이 막힘으로써 현지에 가지 못한 원인도 있겠으나 다양한 탁본을 찾아서 결자를 보전하려는 연구는 공식 사학계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찬집청 사관을 하다가 1904년 중국으로 이주하여 다양한 연구를 통해 원문을 처음 복원한 사람은 창강 김택영과 이를 더 다듬은 소앙 조용은 선생의 연구가 돋보이는데 이는 김덕중 선생이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그리고 재야학자인 이유립이 1898년 운초 계연수와 이관집이 현지를 방문하여 채집했다는 필사본과 영희본 등 50여종의 탁본을 서로 비교하여 모든 결자를 찾아내고 구체적인 주석을 달아 1973년경『광개토성능비문역주』를 발행하였다. 매우 중요한 연구실적인데, 재야학자라는 점 때문에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⑵ 잘못된 석문에 대한 연구 일본에 의해 가장 많은 석문이 만들어졌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석문(탁본의 판독)을 세밀히 검토해야 하는데 관학계에서는 일단 일본 사람들의 석문을 인정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목적을 위한 공작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실정이다. 역사학에서 식민사관을 이야기하지만 비문의 연구에서는 그보다 강한 공작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 석문으로 연구를 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컬 하다. ⑶ 잘못된 해석에 대한 연구 그 다음에는 한문의 해석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최인은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과 신공황후 삼한정복설 근거로 이 비를 변조ㆍ왜곡했다면서 소위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백잔은 백제가 아니라 다른 소국이며 □□□羅도 신라가 아니라 임나가라로 이 두 나라가 모두 신라의 변두리에 있던 부족국가라고 주장 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최인은 任那官家說)은 일본서기의 숭신천황 65년 추7월조에 임나가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 하였다는 기록을 들어서 주장[任那朝貢說]했는데, 임나에 대해『일본서기』崇神紀 65년 秋七月 조에 ‘임나는 계림의 서남에 있는데 북은 해가 가로막았다’ 하였고 또 계체기 6년 12월 조에 ‘임나는 백제와 연결되어 두 나라가 조석으로 교통하고 鷄犬의 소리에 대하여 임나인지 백제인지 구분하지 못한다’하였으며 欽明紀 2년 여름 4월조에 ‘임나는 신라와 境을 접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일본이 임나관가를 중심으로 삼한을 통치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내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태왕비문에 임나에 대한 기록이 나오자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변조와 해석을 만들어낸 것으로 오히려 임나관가가 한민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주체적인 사관을 가진 신채호,문정창,이유립,김택영 등도 해석에서 일본인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는데 이는 고구려중심사관 때문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냉정하게 우리식 한문으로 전체 비문을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 오늘 발표한 김덕중 선생이다. 좋은 발표를 기대한다.
    광개토호태왕 학술대회에서 발제 중인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 편집부
    4. 결론
    대략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사료 중에서 가장 이르면서 신뢰성이 높은 사료인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은 고구리는 물론이고 우리 나라와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재정립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일본이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준 자료를 믿고 연구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역사연구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우리 스스로 크게 반성해야 한다. 결자가 가장 적은 영희의 석문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일본의 입김을 덜어내고 창강 김택영과 조소앙 선생 그리고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 어렵게 찾아놓은 원문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역사자료로 위상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그 후에 나온책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해야 한다. 특히 조선사문이라는 우리 민족의 한자 글 습관은 우리 문화와 연결되어 매우 귀중한 역사찾기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분야에 더 많은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면으로 깨부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제는 고구리의 역사를 그 앞과 그때 그리고 그 후예들인 발해와 요금원청과 고려 등의 역사를 하나로 꿰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큰 힘은 바로 호태왕 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화가 아닌 사화나 설화를 단군신화라고 일본 학자들이 자꾸 쓰니까 우리도 별 거부감 없이 단군신화라고 하며 중국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자꾸 이야기를 하니 작년에 고교생 설문조사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학생이 80%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내부 갈등 차원인 6.25 동란도 미국이 자꾸 ‘Korean War’라고 하니까 국방부에서도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내고 있을 정도로 우리는 스스로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무쪽록 오늘의 광개토호태왕 훈적비 학술대회를 통해 계기로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자료인 호태왕비에 대한 주체적이고 논리적 인 연구가 이어져 하루빨리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앞줄 가운데 자주색 한복이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 편집부

    Greatcorea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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