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을 변조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한 일제
3. 광개토호태왕비문 탁본 실태
이런 엄청난 가치가 있는 호태왕의 훈적비가 일인들에 의해 변조ㆍ왜곡되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용당하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1) 훈적비 재발견 당시의 증언과 변조 이전의 정탁본
⑴ 탁본의 역사와 종류
훈적비가 414년에 세워진 이래 1,600여년 동안에 고구리인들이 탁본한 것이 있었고 그 내용이 완전하고 깨끗했음은『集古求眞』의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으나 현재 그 탁본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얻은바 탁본은 고구리 종이와 고구리 묵즙으로써 탁한 것이다.
이 또한 고구리의 탁법이다. 오직 글자의 형태와 획이 밝고 똑똑하고 글자와 획이 가리런하고 깨끗하며 가장자리가 깨물어지거나
이지러진 흔적이 없다.
…이 고구리인의 탁본을 榻刻雙鉤本이나 上海縮印本과 대조해보면 10여자가 많다.
그리고 이 두 탁본을 수정해야 할 것이 10여자가 된다.
처음 중국인이 이 비를 발견하기 전에 고구리의 뜻있는 사람이 탁하여 비장해 둔 것이다."
내용상 이 탁본은 훈적비가 재발견되기 이전에 탁본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884년 현재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훈적비문 10자 정도를 쪼아내고 10자 정도를 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79년 일본군은 장교10여명을 한ㆍ중 양국에 파견하였는데, 마침 북경에서는 수년 전 발견된 고구리 광개토대왕의 훈적비에 관해
‘대왕이 신라성을 포위한 외군을 격퇴하고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정복활동을 벌인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정보원 酒勾景信이 봉천으로 가서 1882년 崇實장군의 보좌관인 榮禧를 만나 훈적비를 재발견하여 만든 탁본 한 벌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탁본이 가장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탁본일 것으로 보이며, 그 석문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있다.
| ▲ 영희 석문 - 1 © 편집부 |
| ▲ 영희 석문 - 2 © 편집부 |
그 탁본은 다음과 같다.
鄭文焯 跋文『고려국영락태왕비 釋文 纂改』“수없이 참살하고 사로잡는 등 일본을 위압하여 두려워 복종하게 하니 어찌 그토록
웅장하고 굳세냐”(斬獲亡算 威襲嵎夷 何其雄也).
“나는 光緖 8(1882)년 壬午에 거듭 산동성 평민 方丹山을 일시 고용하여 가서 탁하게 하니 완벽한 것을 얻게 되었다.”는 榮禧의
蘭言과“榮禧의 蘭言에 담긴 말은 정확한 것이다.
酒勾가 갖고 온 탁본은 方丹山이 拓한 것으로 생각된다.”(池內 宏, ‘광개토왕비의 현상, 사학잡지 제49편 제1호).
(전체 문정창, 앞 책 98~99쪽에서 재인용)
비문 전체가 알려진 것은 일본 아세아협회가 1889년 발행한『會餘錄』第五集에 일본 육군참모본부 酒匂景信 중위가 제공한 雙鉤
加墨本이 橫井忠直의 석문과 함께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부록 참조).
1904년(고종 광무8)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있었다.
筱峰은 회인(懷仁)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少佐에게 비문 해독문(역자주 : 본래의 글씨체를 한자로 옮김)을 기증하였다.
大原은 酒勾景信처럼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으로 보냈다.
참고로 쌍구가묵본이란 탁본 후 흰 끝자 부문을 제외하고 먹칠하여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고옥 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글자 모양이
바뀔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1907년 이전에 일본인에 의해 찬집청에 석문이 전해졌지만 일반인들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908(융희 21)년 한국인들이 일본
으로 유람 차 내왕이 시작되었다.
일본 박물관에서 태왕의 비석문을 해독한 귀중본이라 하여 해석문과 함께 다량 인쇄해 배포하므로 여행자들이 구입하여 보여주니
우리나라는 비로소 비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 槍江 선생은 1904년 이미 중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만주를 방문하여 발해사와 호태왕비문을 구해와 연구하고 있었다.)
(2) 일본에 의한 탁본의 변조
1884년에 주구경신이 비문을 갖고 돌아오자 橫政忠直을 중심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3년 만에 겨우 전문을 해독하고,그 내용
중‘광개토대왕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정복활동을 벌였다’는 대목에 크게 놀라 酒勾景信을 다시 집안현으로 보내 비문의 탁본을
빙자하여 비의 내용을 쪼아내기 시작한 것 같다는 게 회여록 제5집의 고구리비 출토기,이진희의 주장을 비교검토한 문정창의 분석
이다.
이게 제1차 변조작업으로 앞 항목에서 보았듯이 10여자를 쪼아내고 10여자를 고친 정도로 볼 수 있다.
1888년 橫井忠直은 연구 중이던 주구의 쌍구본(酒勾 雙鉤本)을 거둬들이고 고구리가 일본 본토를 점령한 내용을 지우고 이를‘고대
일본의 남한지배설’인 임나일본부설 대본을 만든 후 1889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만주에 사람을 보내어 이 대본에 따라 다시 명문을
쪼아내고 석회를 발라 글자를 만들어 넣는 등 2차 변조작업을 수행했다. 이때 변조된 내용이 소위 신묘년 기사 등이다.
1898년 계연수가 갔을 때 판독할 수 없던 글자는 117자였다고 하며 1912년 다시 갔을 때는 추가적으로 138자를 판독할 수 없었다
고 한다.
그리고 1931년에 주운대가 채탁한 탁본에는 오히려 회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밑에 있던 글자가 보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는 회를 발라 변조했다는 변조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⑶ 변조된 탁본의 유포
일본은 이렇게 변조한 탁본과 이를 판독하여 만든 석문을 우리나라『증보문헌비고』에 포함시키도록 찬집청 책임자에게 전달한
것을 비롯하여 외국공관원들에게 많은 량을 살포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시나리오에 맞도록 발표회를 하고,
중국인들을 불려 그렇게 뒷받침을 하도록 유도했다.
나아가 1994년에 발행한 일본 중학 역사부도에는 4~5세기에 일본이 백제,신라,가야를 약 200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을 지도에 그려
놓고 있다고 한다.
| ▲ 쌍구가묵본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위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 편집부 |
3) 현재 알려져 있는 탁본ㆍ석문의 종류
마침 얼마 전에 경희대학에서 1,2면 정탁본을 기증받았다고 뉴스에 나온 바 있지만 현재 서울대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석정
탁본을 비롯하여 북경대학 도서관에는 8벌의 탁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3별이 정탁본이라고 한다.
그 중 한 벌(경희대학 기증본과 같은 탁본)을 오늘 발표를 하는 김덕중 선생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탁본은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그렇게 한다고도 하지만 글자를 잘 보일 수 있도록 쌍구가묵하는 탁본이 많다.
문제는 이런 탁본은 매우 자의적으로 내용을 만든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일본이 회여록에 실은 것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찬집청에 전하여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석문도 바로 한 것도 모두 쌍구가묵본인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보고 인용하거나 책의 부록으로 올려놓은 탁본과 석문만 해도 매우 많다.
원탁본은 사실 글자 모양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글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를 판독하여 풀어놓은 석문(釋文)이 주로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이형구는 중국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부사년도서관 소장의 원석정탁본을 중심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주구경신의 쌍구가묵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탁본(모양은 쌍구가묵본 모양임) 1931에 주운대가 채석한 탁본에는 오히려 회칠했던
것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알아볼 수 있는 글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도 한다.
연구에 가장 요긴하게 사용한 석문은 가장 일찍이 한 것으로 알려진 榮禧의 석문인데 일본 본토 안에 있는 성의 이름이 모두 나오는
등 15자 정도의 결자밖에 없다.
그러나 판독을 잘 하지 못했거나 일본인들에 의해 자기들의 논리대로 석문을 만들도록 압력을 받은 것 같다는 게 문정창 이유립의
분석이다.
따라서 믿기는 어려우므로 여러 탁본과 석문을 비교하여야 제대로 된 판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 ☞ Greatcorea ☜ ■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草浮 印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