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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비는 고구리인이 쓴 유일한 역사 (2부)

浮萍草 2013. 5. 17. 22:24
    자기네 역사에 유리하도록 비문을 조작한 중국과 일제
    2) 광개토호태왕 훈적비 약술 ⑴ 훈적비의 건축과 재발견 개토호태왕 사후 장수왕 2년(414년)에 그 훈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수도인 국내성에 세웠는데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점차 퇴락하여 알려지지 않고 몇몇 문인들의 작품에 등장할 정도에 불과 했으며 청나라가 이 지구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금(封禁)한 200여 년 간 이 비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가 1875년 회인현(會仁縣)이 설치된 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875년 발견되었다고 하나 현재 일반적으로 1882년 장백인 榮禧가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의 상황은 영희(榮禧)의 난언(蘭言)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호태왕비의 제원
    ⑵ 훈적비 현황 높이 약 21척(6.34m), 가로 세로 너비 1.3~2m 무게 37톤에 달하는 구형의 기둥모양 화강암으로 4면에 변이 4치인 정사각형 크기인 1,802자의 글씨가 44행으로 새겨져 있다[方柱形四面環刻].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제1면의 문장 6행으로 고구리 개국으로부터 호태왕이 승하하실 때까지의 약사를 서술하고 있다. 고구리 시조를 추모왕,2대를 유류왕,3대를 대주류왕이라고 하여 삼국사기 등의 주몽,유리왕,대무신왕이라는 기록과 틀리는데,이는 당연히 가장 앞서고 고구리인이 쓴 것이므로 이를 따르는 당연하다. 호태왕의 즉위 연대도 신묘년(391)이라고 하여 삼국유사의 임진년(392)년과 다른데 이도 당연히 비문 내용을 따르는 게 옳다.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에서 제3면 8행 15자까지로 광개토대왕의 공덕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 지역을 보면 북으로 송화강,서로 섬서성,동으로 연해주,남으로 일본 열도에 이르고 있어 당시 각 나라의 위상과 영역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중국인들은 중국을 점령했다는 내용,일본인들은 일본지역을 점령했다는 글자를 쪼아냄으로써 가장 많은 글자가 없어진 부분이다. 따라서 결자를 보충하여 제대로 해석하면 우리 고대사는 물론 아시아 고대사를 보충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부분이다. 셋째 부분은 제3면 8행 16자부터 끝까지 인데,호태왕의 유훈으로 묘지기(守墓人)와 입비 등 제도상의 문제를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 으로 고구리가 점령한 지역을 확인할 수 있어 우리 역사를 보충하는 매우 귀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비의 위치는 통구 동북 15리에 있는 만주(吉林城 輯安縣 大碑街)에 있으며 고구리의 왕릉급 무덤들이 집중적으로 존재하는 우산 (禹山)을 뒤로 하고 압록강을 앞에 둔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45〫°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 방향으로 서 있다. 비가 세워진 곳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2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으며 동북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장군총이 있다. 비의 4면에는 총 180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1540여자밖에 되지 않는다. 새긴 글줄은 각 면 모두 44행이고 매행 글자 수는 41자(제1면 6행만 39자)인데 모서리 부분에는 글자가 없었을 수 있으므로 총 글자 수가 좀 적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태왕비는 중국 길림성 집안 입록강 북쪽에 있다.
    ⑶ 훈적비의 변조 훈적비문의 내용 중 1면 후반부터 3면까지 신채호가 비문을 확인하기 위해 집안현에 가서 확인한 아래와 같은 내용을 통해 중국과 일본이 훈적비의 내용을 변조했다는 말을 듣고 아래와 같이 기술한 데서 활인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집안현에 이르러 여점(旅店)에서 만인(滿人) 영자평(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난 바,필담의 하에 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래와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초래(草萊) 중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 또한 滿人)가 이를 발견할 새 그 비문 중에 고구리가 중국의 토지를 침탈하였다 한 자구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로 쪼아내어 인식할 만한 자구가 없어진 것이 많고 그 뒤 일인(日人)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 팔매 왕왕 자구가 완결(刓缺)한 곳을 석회를 발라 인식할 수 없는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진적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조(添造)된 듯한 감도 없지 아니하다.”하더라. 그러면 이 비분에 정작 태왕의 선비 정복의 대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까닭일 것이다. 그 후 문정창 이유립 이진희씨 등이 변조사실을 널리 공개했으며 특히 재일 연구가 이진희는 일본의 체계적 훈적비 변조와 왜곡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 일본인들에게 알림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웠다.
    쪼아내고 새겨넣은 조작한 비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

    2) 광개토호태왕 훈적비의 가치 ⑴ 현존하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오래된 사료 현존하는 우리 겨레 역사서 중 가장 오랜 것은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다. 그런데 호태왕훈적비는 이보다 720년 앞에 건립되었으니 당연히 가장 오래된 사료다. 『환단고기』에 고기들의 이름과 내용이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책 내용이 원형대로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보다 더 오래된 비석은 없으며 일본에 비석이나『일본서기』가 나타난 것은 이보다 300여년 후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내용이 있을 경우 바른 내용을 찾는 데 있어서 가장 오래된 이 비석의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전용운은 대왕의 비문과 상충되는 한일 양국의 모든 사서들의 기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⑵ 고구리인이 쓴 유일한 고구리 역사 고구리인이 썼다는『神誌秘史』『古朝鮮秘記』『留紀百卷』등의 책 이름은 있으나 책들은 불태워져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중국의 二十五史 등 여러 책들은 고구리에 대한 역사를 인접국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고구리인 들이 인식했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서들 중에서 고구리인들이 쓴 고구리 역사 기록은 이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고구리 앞 부여와 고조선사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大震(발해),遼金元淸史 등 우리 민족 북방사와 관련 그들의 인식을 통해 바른 역사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⑶ 문화사적 가치 漢字는 우리 겨레가 만들었다는 게 정설에 가깝지만 이후에 역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역사적으로 한자를 사용한 문장은 중국(漢族) 과 우리가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 한문식’으로 우리 사료들을 해석하면 잘못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글자도 사용되었고 문체도 독특한 게 있으며 특히 문장에서 단어의 순서가 중국과는 다르다 는 점 등은 우리의 고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중국인 구양수는 “이 비의 偉莊하고 화려함은 중국에 있어서도 이에 대비할 만한 것이 없다. 吳나라 福國山에 서 있는 비도 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 唐明黃의 泰ㆍ華 양비가 비록 굉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낭떠러지의 바위 위에 새겨진 것이요,立石은 아니다.”며 이 비가 금석사 (金石史)상 제일 크고 아름답다고 했다. 만주 사람으로 처음이 비문을 제대로 해석했던 榮禧와 중국인 王志修ㆍ張鳳臺 등은 한결같이“이 비문의 문장이 간략하고 수발하며 글씨가 뛰어나 훌륭하다.”고 극찬했다. 중국 비명의 경우와 달리 필획을 생략한 간자체가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중국에서는 없고 고구리,신라,고대일본의 비명에만 나타나는 서체 내지 이체자(異體字)가 보인다는 것은 고구리 문화의 남쪽 전파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Greatcorea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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