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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비문의 가치와 연구실태 (1부)

浮萍草 2013. 5. 17. 21:48
    광개토호태왕 비문은 고구리인이 쓴 유일한 고구리 역사자료
    윤호중 국회의원 주최로 지난 4월 15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렸던'광개토호태왕 학술세미나'발제문을 나누어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1. 서론 리의 역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으므로 어떻게 고쳐져야 한다는 데 이르면 의견들이 다양하다. 특히 고구리의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원인이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귀중한 사료를 제대로 챙기지 않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현재 만주 집안현에 있는 고구리 19대 임금 ‘국강상강개토경평안호태왕의 훈적비’이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사서 중 가장 오래 된 사서인『삼국사기』보다 720년이나 앞에 세워 졌으며‘고구리 사람이 쓴 고구리의 역사’자료로서 거의 유일하며『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이 원본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조될 수 있는 책과는 달리 그때 새겨놓은 내용이 좀 마모되고 파 내어지기는 했으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신빙성이 더 높아 사료로서의 가치는 더욱 중요하다.
    1880년경 재발견된 지 130여년 지난 지금까지 연구실적도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저조하며 그 연구조차중국과 일본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들을 쪼아내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했다는 주장이 있는데도 변조되기 전의 탁본과 그 이후의 여러 탁본을 비교하여 원래 비문의 내용을 찾는 연구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일본인이 전해준 변조된 탁본을 가지고 해석하는 쪽 으로 이루어졌고 해석도 우리식 한문인 사실문(事實文) 내지 조선사문(朝鮮詞文)이 아닌 중국식 한문으로 접근하다 보니 일본이 왜곡해 놓은 해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그들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으며 광개토호태왕이 구토를 회복 하려고 점령한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에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려는 의식적 노력의 일환으로 신라보다는 고구리 정통론을 주장한 학자들도 박은식 신채호 권덕규 이유립등 제법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도 고구리의 위대성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원문을 찾는 노력을 한 분도 있지만 해석상의 오류를 범하거나 무리한 해석이라는 역공격을 받음으로써 정당성이 약화되기도 했다. 이처럼 지금까지 우리 겨레의 주체적 시각으로 제대로 연구되지 못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에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데도 크게 기여하지 못함은 물론 일본이 고대부터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 근거자료로 활동되고 있으며 그것을 즐기고 있는 일본인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 시점에 이런 귀중한 사료인 광개토호태왕비문을 바르게 연구하는 것은 그들의 공작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발표자는 호태왕비문의 가치를 생각해보고 변조 이전의 비문내용에 대한 연구를 비교해봄으로써 바른 내용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 해석의 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바른 해석에 대해서는 김덕중 선생께서 자세하게 발표를 할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의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제1 발제 중인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 편집부
    2. 광개토호태왕 훈적비의 가치 1) 광개토호태왕의 역사적 위상 ⑴ 광개토호태왕 약사 고구리 19세 광개토호태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이 담덕이었다. 13세에 태자가 되었다 18세이던 서기 391년에 왕위를 이어받아 413년까지 재위 22년 동안 동양사상 드물게 보는 주변 토벌활동을 전개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 때 활동무대였던 중원지역을 포함한 겨레의 옛 땅을 크게 되찾음으로써 우리 민족사를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거란 후연 외에 백제와의 싸움 기록만을 간단하게 기술하고 오히려 장수왕에 대해 3배 이상 자세히 기록 하고 있으며 특히 중원과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의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고구리인들이 쓴 이 훈적비문의 가치를 더욱 높게 한다. ⑵ 호칭을 통해 알 수 있는 위상 여기서 필자가 ‘광개토호태왕’이라고 부르는 이 분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다. 『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는‘광개토왕’으로 되어 있고 집안현에 있는 그의 훈적비에는‘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 土境平安好太王)’(1면) 또는‘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4면),‘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경주출토 호우壺杅),‘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집안현의 모두루묘지묵서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광개토경호태황’‘열제(烈帝)’라고 되어 있다. 또 연호가 ‘영락(永樂)이었으므로‘영락태왕’,영락대왕이라고도 불린다. 중국 25사의『수서』에는 고구리왕을 ‘열제(烈帝)’라고 했으며 중원 고구리비문에서는 고구리왕을‘고려대왕’이라 했다. 이런 가운데 현재 교과서와 이형구 등 다수의 학자들은‘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고 재야학자들은‘호태제’,‘성왕’,‘열제’,‘태제’,‘호태왕’ 등으로도 부르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히 ‘호태왕’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이분에 대한 다양한 호칭에서 최소한 두 가지 사항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이분의 공로가 국가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것이다. ‘광개토(廣開土)’‘국강상광개토경(國罡上廣開土境’(또는 土地),그리고 그의 이름인 ‘담덕(談德)’ 등이 모두 나라의 강역을 크게 개척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나라 땅을 넓힌 공적이 있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비문 내용에서 보면 그 땅들이 원래부터 남의 땅이었던 것을 공격하여 정복한 것이 아니라 다물(多勿),즉 옛날 우리의 땅이었던 것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니 더욱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는『삼국사기』등의 기록에 따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오히려 장수왕이 땅을 크게 넓힌 것으로 기술 하고 호태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둘째 제후국을 거느리는 임금을 황제라고 부르는 중국과 달리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왕’이라고 쓰여 있으나 유물들에는 ‘태왕’‘대왕’이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들은 중국과 달리 환웅천왕, 치우천왕과 같은 ‘천왕(天王)’이라는 호칭도 사용했는데『수서』에서 호태왕을 ‘烈帝라’고 했듯이 중국 사람들이 붙이는 제(帝),황제(皇帝)처럼 여러‘왕’을 거느린 ‘임금’라는 호칭으로서,중국과 다른 우리 겨레의 독특한 호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요즈음 드라마에서 부여,고구리,고려,신라의 임금을 공히‘황제’라 부르는 경향이 보이는데,오직『수서』와『환단고기』의 일부 내용 외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제가 왕보다 높다’‘중국의 속국이 아닌 천자의 나라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우리의 고유 명칭인 태왕,대왕 등을 사용하지 않고 중국식 호칭을 가져다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로잡자면서 중국식 사고에 얽매인 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⑶ 점령 지역을 통해 볼 수 있는 위상 점령 지역을 확인하는 데 있어 첫째의 문제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자국을 점령한 부분을 쪼아내어 현재의 비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지명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 1면 후반부터 3면 전반부까지 호태왕의 정벌 기사 중에 집중적으로 글자를 쪼아내었다. 이에 대해 문정창, 이유립은 일본인들이 영희씨의 석문에 나와 있는 58성의 이름을 보고 호태왕이 일본 본토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영락 6년 10년 14년조의 기사에서 일본 본토 점령 지명들을 집중적으로 쪼아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만주지역과 산서성 태원 지역 등 중원지역까지 정벌한 기사가 있으므로 신채호가 현장에 갔을 때 들은‘중국인들이 자기 땅을 정벌했다고 해서 쪼아내었다’는 것도 함께 증명하고 있다. 현재의 결자 250~260여자 중 점령한 성의 이름이 나열된 곳과 왜(倭) 관련 부분에 집중적으로 많은 것을 보면 위의 분석이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Greatcorea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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