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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도지방과 동아시아의 고대사

浮萍草 2013. 6. 6. 07:00
    10. 인도지방의 발전과 인더스문명
    리가 알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명 가운데에서도 매우 신비롭고도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여 온 것이 인도지방의 문명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인도지방의 원주민은 드라비다족이라고 하는데,서기전 약 1,600여년 경에 이란지방으로부터 인도 반도의 서북부지방을 거쳐서 쳐들어 온 호전적인 
    아리안족에 의해서 밀려나서,지금은 인도 중부인 데칸고원지방 이남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드라비다인들도 사실은 환국 말기의 세계적 대이동때 북쪽의 근거지를 떠나서 남쪽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여진다.
    인도지방에서 보존되어 오고 있는 귀중한 옛 문헌 중에는 주로 종교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살벌한 전쟁의 이야기 또한 심심치 않게 전해 오고 있다. 
    마하바라타·리그베다·바가바드·기타 등등 이야기는 주로 전쟁서사시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그들이 발전시킨 브라아만 종교 교리는 그 후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어서 
    우파니샤드·요가·불경 등으로 발전 내지는 보전되어 왔다.  
    그와 같은 '인류와 우주의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의 기록'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크나큰 인류적인 보배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류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
    에서 높이 평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나 문헌이나 여러가지 실천방식(수행) 등에 의하면 상당히 차원이 높은 인류의 이상향적 생활을 마련해 주었을 것 같은 이러한 좋은 전통도 실제에 
    있어서는 브라아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라는 사회적 계급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사회형태를 합리화하는 데 귀착함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세상 모든 현상을 운명론적으로 파악하거나 이론에만 치우치는 공허한 논쟁들이 인간의 생활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명발달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좋은 본보기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역시 많은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는 데 비교적 성공했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별 같잖은 욕심에 가득 찬 지저분한 야만적 생활의 기록같은 걸 가지고'위대한 00문명'이라고 떠들어대는 족속들도 수두룩하니까, 
    그에 비해서는 그래도 한결 낫다고 볼 수 있다. 
    인도에서 발전한 많은 사상적 업적 가운데에서도 한민족의 삼국시대 이후 한민족에게 여러가지로 비교적 좋은 유산을 많이 남겨오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이미 신시시대 아니 환국시대로부터 불교를 포함한 유교,선교 등의 좋은 전통이 연면히 흘러 내려 오고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에 있는 다음 귀절이 그 전통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國有玄妙之道 日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우리 나라에는 신묘한 도(道)가 있는데,이것을 배달길이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이미 선사(仙史)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진실로 세 종교들을 포함한 것으로서 뭇 삶을 접촉하여 감화시킨다. 
    그리고 또한 집에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취지요 하염없이(자연스럽게) 일들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행하니 
    이는 노자의 종지요 모든 악함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함을 받들어 행하니 이는 석가의 교화다."
    말하자면 전혀 한민족이 알지 못하고 있던 종교가 뒤늦게 갑자기 도입되어 온 게 아니라 이미 생활화되어서 별로 특별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던 때에,
    뒤늦게 인도반도 북부지방에서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 재발견된 불교가 전란으로 지새우던 지나지방을 거처서 역수입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상의 원류는 사실상 그 모체인 옛 한국에서 태동되어서 각 지역과 종족의 특성에 맞게 변형되고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의 사상적 발전은 그 후 지중해 동부 연안의 성자인 예수 크리스트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되므로 인도의 존재는 이 면에 있어서도 인류정신사의 발전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더스문명을 전·후한 고대 인도지방의 모습을 살펴 보자. 
    우선 모헨조다로의 잘 정비되어 있는 도시유적으로 유명한 인더스문명은 호전적인 아리안족이 인도 서북부로 쳐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코 
    아리안족의 작품은 아니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수메르 문명과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는 드라비다인과 수메르인이 인종적
    으로도 아리아인보다 더욱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도 하다. 
    인더스문명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모헨조다로의 유적을 살펴 보면,우선 그 도시가 매우 정연한 도시계획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점을 주시하여야 할 것이다. 
    주택들은 대부분 벽돌로 지어졌고, 급수 및 배수시설·목욕탕 등이 완비되었고,물레·추·금속제 낚시바늘 등 각종 금속을 사용했다. 
    이중에는 매우 먼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종류도 있고 금도 인도반도의 남부 마드래스 지역에서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우상·제단·신전·궁전 등의 종교적 성격을 띈 건조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서,다른 지역의 고대 유적들과의 차이점을 엿보이게 한다.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주로 목축 생활을 하던 아리아인들은 인도·이란·아프가니스탄·유럽 등지로 퍼져 나갔다. 
    인도지방에 침략해 온 아리아인들은 인도반도의 중·북부지역을 점령하고 그대로 눌러 앉은 채, 많은 국가들과 집단으로 나뉘어져 서로 경쟁하면서 독특한 문명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정복과정에서 성립된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대단히 복잡한 위계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바루나 제도가 생겨났는데,바루나 제도는 수천년 후인 먼 훗날에 
    인도반도를 침략해 온 포르투갈 해적에 의하여'카스테(종족의 순결을 의미함)제도'로 불리우다가, 지금은 서양인들에 의하여 카스트제도로 알려져 오게 되었다. 
    베다경전을 사상적인 중심으로 하여 비교적 동질성을 유지해 가던 인도사회는 약 천년 후에 마케도니아의 침략자 알렉산더의 공격을 받아 다소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도 한다. 
    
    11. 고대인류사회의 전개
    
     가. 동아시아
    4,300여년전(서기전 약 2,333)의 세계사의 주류는 역시 동방의 신시와,메소포타미아·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때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그 주요한 원인은 하족의 욕심 사나운 팽창욕과 정복주의였다. 하족의 조상으로 떠받들려지게 된 황제가 감숙(甘肅) 지방에 자신의 나라를 얻어 가진 이래 하족들은 끊임없이 신시를 넘보고 있었다. 그러한 하족들의 호전적인 성향에 다소 영향을 받게 된 신시의 대 제후들도 또한 호전적이고 탐욕스런 천박한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1,500여년간 올바른 가르침을 지켜 오며 평화롭기만 하던 신시는 황제의 황당무계한 침략전쟁 이후로 계속된 사회불안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하족들은 이를 틈타서 여기저기서 분쟁을 일으켜 나중에는 천하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 문명정도는 형편없이 낮았으므로 여전히 신시의 야심가들이 하족의 지도자 노릇을 번갈아 하면서,탐욕스러운 하족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고 설쳐대는 형편이었다. 치우 환웅이 황제의 난을 평정한 후 당분간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시였으나,점점 혼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동아시아 사회는 올바른 길을 잃고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누르고 천하의 패권을 탐하는 짐승들의 세계로 전락해 가고 말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 문제는 덮어두고, 무력으로 문명인류 세계를 장악하려는 간악한 야수같은 무리들의 세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마지막 환웅인 거불단(居弗檀) 환웅에게서 태어난 환검(桓儉 또는 왕검,또는 한검)께서는 웅씨국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웅씨국왕마저 흉폭한 제후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마침내 약 300여년에 걸친 그같은 전란시대를 끝내고자 손수 천하평정에 나서게 되었다. 수많은 적수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지나지방의 성군으로 불리우게 되는 요(堯)라는 인걸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영민하고 또한 올바른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환검에게 모든 적들이 무릎을 꿇게 되어 천하는 환검의 뜻대로 평정되어 갔고,사람들은 환검에게 무한한 존경과 기대를 보내면서 즐거이 환검의 가르침에 따랐다. 이로써 짐승들의 세계로 전락할 뻔했던 신시의 배달민족은 환검의 영도로 조선(朝鮮)을 건설하고, 다시 밝은 인류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수백년째 계속되어 온 약육강식의 동물같은 생활에 익숙해져서 신시의 훌륭했던 가르침을 잊고 지내던 배달민족을 위하여, 환검은 다시금 '홍익인간의 대법'을 널리 가르치고 관직을 정비했으며,모두가 자기직분에 맞추어 생업에 종사하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신시말기 이후 여러 제후들에게 어지럽게 점거되어 온 토지도 민중에게 적절히 나누어주고,친히 고시씨의 유범에 따라서 농사를 지으며,황후인 하백녀(河伯女)도 친히 누에를 치며 검소하게 생활하는 모범을 보이니 모든 민중은,"이제 우리는 환국과 신시의 아름답던 옛 풍속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 다시 지상천국이 찾아 왔다."고 기뻐하며 즐거이 환검의 가르침을 따랐다. 민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환검은 버드나무 밑을 궁궐로 삼고 정사를 보며 쑥대가 우거진 뜰에서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짚신과 나무의자를 벗삼아 천하를 다스리시는 모범을 보였다. 사람들은 그처럼 거룩한 본보기를 보이는 환검을 찬양하며 홍익인간의 지상천국을 굳게 지켜 나아갈 것을 맹세했다. 각 지방의 제후들도 환검의 지시와 뜻에 따라 백성들에게 올바른 정사를 베풀게 되었다. 그 중에는 환검의 뜻을 즐겨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안심할 수 없는 하족들은 그래도 자기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겉으로만 복종하는 체하는 것이었다. 이 때 하족의 왕노릇을 하던 서쪽 변방의 요(堯)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족을 잘 통제하여 환검의 단군조선과 큰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없이 지방정부를 운영하며 하족들을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서쪽 변방은 완악한 하족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어서 그러한 요에게마저 반발하여 단군조선에 누를 끼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요는 흉적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함으로써 환검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대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요를 이은 순(舜)과 우(虞) 두 왕 또한 당시 동아시아를 무서운 기세로 휩쓸었던 대홍수로 인한 민생파탄을 단군조선의 지도에 힘입어 극복하면서 단군조선을 높이 받들고 단군들의 명에 비교적 잘 따랐다. 지나지방의 중요한 고대 기록인 사서오경 중에 보이기 시작하는 단군조선과 지나지방과의 역사적 관계는 이후로 비록 가끔씩이나마 지나지방의 역사서에 등장하게 된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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