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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시-화하족-고대 메소포타미아-유태인

浮萍草 2013. 5. 23. 07:00
     5. 신시(神市)의 발전과 화·하족(華夏族)의 이동
    
    렇게 신시초기의 개척과 새로운 문명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천산(天山)의 동방에서는 하나의 변화가 일어 나고 있었다. 그것은 서쪽 지방에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원시적인 하족(夏族)들의 이동이었다. 지금의 지나지방 서북쪽인 타림분지는 예전에는 사람살기에 적당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따라서 많은 원시적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환국말기의 전 지구적 기상이변에 의해서 일어난 대홍수는 타림지역도 빼놓지 않고 휩쓸었는데 이때의 대홍수는 파미르고원 서쪽에서는 수메르와 유태인의 홍수설화를,동쪽에서는 하족들의 홍수설화를 남겨 놓았다. 장강유역에서 살아 온 요족에게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뇌신(雷神)이 노하여 홍수를 일으켰다. 다른 가족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오직 형 하나와 누이동생 하나가 살아 남았다. 전 인류가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 이들이 오늘날 인류의 공동조상이 되었다." 하족들은 이 때의 대홍수에 의하여 거의 멸종당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도 뻘에 묻혀 버린 타림분지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으므로,어디론가 살 길을 찾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쪽을 막고 있는 거대한 산줄기 너머로는 이동하기 어려웠으므로 자연히 동쪽으로 뚫려 있는 황하와 장강의 협곡을 따라서 정처없이 유랑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대부분의 지나지방을 개척해 놓고 찬란한 문명을 펼쳐가고 있던 신시의 변방으로 이동해 갔다. 신시는 이미 초기에 고시씨·신지씨·치우씨 (高矢氏·神誌氏·蚩尤氏) 등의 훌륭한 지도자들의 맹활약에 힘입어서 훌륭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백두천산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던 신시의 훌륭한 홍익인간문명은 신시의 아홉 갈래 겨레를 통하여 동아시아의 구석구석까지 밝은 사회로 만들어갔다.
    지금의 열대우림같은 밀림지대였던 지나지방의 미개척지에도 치우씨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곳은 없었다. 모험심과 개척정신에 불타는 용맹스러운 치우씨는 지금의 지나지방은 물론 베트남지방에 해당하는 곳까지도 진출하였고 삼묘족(三苗族)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고시씨는 갖가지 농작물들을 심고 거두는 법과 불(부싯돌)을 사용하는 법을 신지씨는 문자의 이용법을 치우씨는 갖가지 광물을 이용한 기구 및 병기 등의 제작방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흉폭한 야만족들의 침략과 사나운 동물들에 의한 피해를 막고 풍요한 농작물을 가꾸면서, 문명한 생활을 발전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신시의 서쪽 변경은 주로 견이( 夷) 겨레와 남이(藍夷) 겨레들이 개척해 갔는데,그들이 황하의 중·상류 지방까지 진출하여 야만의 세계를 문명한 세계로 만들고 있을 무렵에 또 하나의 야만족인 하족들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홍수에 의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원시문명조차 상실한 하족들은,신시의 문명스러운 생활을 한편으로는 시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문명을 자신들이 가지고 싶어하기도 하였다. 짐승이나 다를 것 없는 한심한 원시적 생활을 하던 이들 하족을 대하게 된 신시의 선량하고 신성한 겨레들은 그들을 대하면서'사람들이 저렇게 짐승과 같이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측은감과 함께,어떻게든지 그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신시의 지도자는 환웅이라고 불리웠는데,말하자면 배달환웅은 신시의 제1세 환웅인 셈이다. 배달환웅으로부터 대를 이어서 열여덟분의 훌륭한 환웅들이 신시를 다스려갔다. 그 정치는 옛 한국의 전통을 물려받아서'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理化世界)'라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좋은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예의염치를 알게 하였을 뿐이며 강압적으로 정복하거나 억지로 굴복하게 하는 법은 없었다. 다섯번째 환웅인 태우의(太處儀) 환웅의 열두번째 아들인 복희씨(伏羲氏)는 무지막지한 하족을 가르쳐서 사람답게 살도록 하려는 큰 뜻을 세우고 드디어 하족들을 다스리는 일을 자진해서 맡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신시의 변경지방에 속하던 황하의 중류인 하남지방에 하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작은 지방정부를 세우고,그들에게 온갖 신시의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 하족들의 후예인 지금의 지나지방 한족들은 이러한 복희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복희씨를 그들의 전설적인 제왕들인 삼황오제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문명의 전달자로 숭상해 오고 있다. 6.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전개
    동방에서는 이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지방에 해당되는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원주민인 셈족과 이주민인 몽골계통의 수메르인들 간의 세력경쟁이 일어나서 서로 이기고 지는 살벌한 살륙전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러나 숫적으로 우세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수메르인들의 국가는 마침내 멸망해 가고 바빌로니아 문명이라는 것이 그 뒤를 이었다. 수메르의 존재는 여러가지로 큰 의미가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수메르의 점토판들을 해독할 수 있게 된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전세기(前世紀)까지의 관념들이 대단히 부적절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현대 인류에게 깨우쳐 주었다. 즉,인류가 가장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차로 진화하여 원시공동체-씨족사회-부족사회-고대노예사회-봉건사회-근대 민주주의사회-현대 민주주의사회로 순서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극히 단순한 기본적인 도표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발전된 사회가 이미 수메르에서 이루어졌던 증거들이 나타난 때문이다. 앞에서 잠깐 살펴본 바와 같이 약 6,000여년전(신시 초기에 해당)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수메르인들은 매우발달한 농경기술을 지녔고,식용 으로 쓰고 남은 풍부한 보리를 이용하여 갖가지 종류의 맥주를 생산하기도 했다. 수메르 연구의 대가인 크레머씨에 의하면 수메르 사회에는 매우 발달된 법령 및 사법제도, 발전된 의회제도,고도의 천문학 지식,훌륭한 교육제도, 아름다운 문예 작품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조각작품에 남아 있는 수메르인들의 옷을 장식한 나뭇잎 무늬들은 단군 대황조의 검소한 나뭇잎 옷장식과 묘한 연상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알려져 온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그 이전에 이미 전해져 오던 비라라마 법전,리피트이시타르 법전,그리고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우르남무 법전 등을 참고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서부 등에서 수메르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 오던 악카드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의 문명은 종말을 고하고,소위'동양적 전제군주 사회' 로 악명이 높은 바빌로니아·앗시리아·힛타이트 등의 왕국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수한 수메르의 문명을 이어 받은 그 후의 사회들이,동양적 문화전통을 경멸한 서양인들의 관점으로 보듯이 '동양적 전제군주사회'라는 악명을 연상시켜야 할만큼 야만적인 사회이기만 했던가 하는 점은,그 후 수천년간 '발달'했다는 서양세계에서 벌어졌던 증오에 가득찬 종교재판·종교전쟁 등과 대조되어야만 할 것이다. 수메르 사회가 주위의 타민족들에 의하여 멸망의 길로 접어들던 무렵의 난세에,수메르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부족이 다른 메소포타미아 주민들과의 마찰때문에 정처 없이 서쪽으로 이동해 갔는데,그들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하는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은 오랜 방황끝에 지중해 연안에 다달아서야 비로소 그들이 살만한 땅을 발견하였는데,그들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는 구약이라는 책에 그러한 민족이동의 내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서쪽에는 보다 발달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던 이집트가 강대하게 버티고 있었으므로, 유태인들이 더 이상 갈 곳은 사실상 아무 곳에도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유태인들은 주위의 다른 민족과는 완전히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종교에 의하면 자신들만이 신의 가호를 받는 선택된 민족으로서, 주위의 여러 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나 풍습은 야만적이며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당연히 주위 민족들과의 마찰이나 전쟁이 그치지 않았고 여러번의 흥망성쇠를 자초하는 꼴이 되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유태인의 기원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유태인의 역사는 약 4,000여년 전(서기전 2,000여년)에 선조인 아브라함이 여호와라고 불리운 신을 만나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그 무렵 메소포타미아 남쪽인 우르지방에서 데라와 그의 처 사라,아들인 아브라함,손자인 롯 등이 정처없이 떠나갔는데,그들은그 이전에 아라비아반도 지역으로 부터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왔던 제3차 셈족 이주단의 일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할 당시에 유프라테스강을 건넜기 때문에 아람어의 이브륨(강을 건넌 사람들)이라고 불리운 데서, 나중에는 히브리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데라와 아브라함의 일족은 우르에서 북서쪽으로 960마일(약 1,500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금의 터키 남부에 있던 하란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데라는 죽고,아브라함 은 여호와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하란지역도 비어 있던 땅이 아니었고 이집트 신왕국과 겨루던 힉소스인들의 강력한 사회가 융성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아브라함의 일족도 힉소스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은 생각하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족이라는 의미에서의 유태인이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주로 유태교라는 종교적인 통일성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족집단으로 발전해 나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서도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만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 듯도 하나, 그 확실한 속사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히브리족은 혼란이 거듭되는 메소포타미아 주변지역의 어지러운 정세의 틈바구니에서,그들의 이질적인 종교적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마아의 세력이 맞부딪쳐서 완충지대처럼 되어 있던 지중해 동남연안인 가나안지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평화로울 때는 여러가지로 편리한 교역 통로로서 많은 상업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던 가나안 지역은 그러나 이집트와 오리엔트지역에 큰 정변이나 전쟁이 발생 하면 그 어느 편에 의해서든 이용당하거나 짓밟히기에 알맞은 대격변의 회랑(回廊)지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기묘한 지정학적 위치에 근거지를 정함으로써 그 후로 유태인의 역사가 쉴사이없이 파란만장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알려져 온 바와 같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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