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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단군조선 무렵의 오리엔트 지방과 유태인의 역사는?

浮萍草 2013. 6. 14. 07:00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
    을 떨쳐버리고,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
    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많은 연구와 보충으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정비가 완성되기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강역지도 © 편집부
    다. 기타 지역의 역사전개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유태인 이집트 시에서 황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치우환웅(한웅)에게 평정될 무렵인 서기전 2,700여년에,이집트에서는 이른바'고왕국시대'인 피라밋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조물의 건축은 현대적 기술이나 인력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은 앞서도 언급된 바가 있다. 그로부터 다시 약 500여년이 지난 서기전 2,200년 경에는 혼란상태가 나타나서 이른바 군웅할거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기전 2,050년경) 테베정권의'멘투헤테프 2세'에 의하여 상·하로 나뉘어 졌던 이집트가 통합되고 당분간 평화가 유지되는데,약 300여년 후에 힉소스족이 침입하여 다시 한동안 소란상태에 빠졌다. 힉소스족은 나일강 하류 비옥한 곡창지대를 점령하고 약 180여년간 하(下) 이집트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서기전 1,570년경 이집트 제18왕조의 아아메스 1세가 이들을 격파하여 다시 전성기를 맞는데 그 시기를 신왕조시대라고 한다. 이때의 이집트 영토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일강 상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정복사업에 나선 이집트는 약 100여년 후에는 아프리카의 동북부지역을 거의 다 지배하는 오리엔트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를 노리고 거듭되던 살벌한 전란 속에서 유태인들의 거주지였던 가나안(팔레스타인)지방에 심한 흉작이 발생했다. 식량부족으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유태인들은 지도자인 요셉을 따라 민족대이동을 단행하여 이집트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그러한 정황은 유태인들의 역사책인 구약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대기근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이집트로 이민가서 고용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유태인들은,그 후 서기전 1,250여년 경에는 수십만명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이집트 의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노동인력만 대폭적으로 증가해 갔으므로 그들은 빈민화되었고,그 결과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의 적은 소득밖에 얻을 수 없는 거의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는 저임금 노동자집단이라는 상태로 전락하는 한심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기 조상들의 고향이었던 가나안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유태인들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부를 축적해 가던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허락하지 않자,마침내 민족적 영웅인 모세가 여러가지 파괴적인 기적을 보여 이집트왕을 위협한 끝에 홍해를 건너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모세가 당시 만들어 보였다는 '기적'은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 나일 강물이 피빛으로 변하고 물고기들이 죽고 심한 악취가 남. 2. 개구리떼·파리떼가 창궐함. 3. 풀무의 재를 모세가 날리니 그것이 닿은 사람이나 짐승에게 독한 종기가 생김. 4. 메뚜기가 창궐하여 농산물에 큰 피해를 줌. 5. 3일간 암흑세계가 됨. 6.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살륙함.

    이와 같은 잔인한 수법들이 '기적'이기 때문에 신성시되어도 좋은가 하는 점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재고되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 한 인간집단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른 인간집단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퍼부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인이라고 자칭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서기전 1280년 무렵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은 그들을 여전히 히브리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모세는 순수한 유태인의 혈통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을 다시 통합하기 위하여 힘썼다. 그러나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심각했고 이러한 통합 노력은 그후 유태인의 왕들이나 예언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었으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국가 내부의 분열 요인으로써 불안하게 잠재하게 되었다. 유태인의 소위 출애급 이후 약 600여년간 이집트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지만,서기전 663년경에 이르러서 26왕조의'프사마티크 1세'가 앗시리아군을 격파하면서 그 찬란한 문명의 잔영을 다시 꽃피우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및 유태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들어 주는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에는 일찌기 환국 말기에 추위를 피해 온 환국 유민의 일부인 수메르의 주민들이 문명의 씨앗 을 뿌렸다. 풍부한 산물과 온난한 기후는 찬란한 문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나 바로 풍요로움 때문에 메소포타미아는 그곳을 차지하려는 숱한 주변 종족들에 의하여 수 많은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환국 말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약 4,000여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은 이미 문자까지 가지고 있었고,학교·법원·의회·군대 등이 정연히 구비 되어 있었던 사실이 그들이 남긴 문자와 갖가지 유물들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문자의 존재는 바로 환국의 문자 중 하나였을 수밖에 없으며,수메르의 문자구성과 한국의 문자구성 및 발음·낱말뜻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메르인들과 한민족은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자의 영향을 받아서 약 1,700여년 후에는 이집트 지방에서도 상형 문자라는 형태의 원시적인 문자가 출현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의 약 2,000여년 동안 수메르의 문명생활은 별 어려움이 없이 발전했는데,단군조선이 건국된 서기전 2,333년과 거의 동시대인 서기전 2,334년 경에 사르곤이라 는 실력자에 의하여 악카드 왕조가 주변에 세워졌고,그들은 곧 수메르를 넘보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서 싸워 나아갔으나 야만적인 침입자들에 의하여 정복되기도 하고 다시 나라를 되찾기도 하면서 역사를 이어 가다가 서기전 약 1,894년경에 이르러서 바빌로니아에 통합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의 문명을 비교적 잘 이어서 발전시켜 갔는데 100여년 후인 서기전 1,792년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법전으로 알려진'함무라비 법전'을 만들기도 한다. 함무라비는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여섯번째 왕으로서,그가 제정한 법전에 의하면 당시의 사회는 귀족·평민·노예의 세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노예계급은 훗날의 로마시대처럼 많지도 않았으며 가혹한 착취와 학대만을 받고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는 일종의'기한부 노예'도 있었는데,이 경우에는 빚때문에 노예가 된 자가 3년 기한부로 채권자의 집에 가서 자신이나 가족들이 노역에 종사했다가, 기간이 끝나면 다시 자유민으로 복귀하는 등 융통성이 많았다고 밝혀졌다. 또한 함무라비시대 이전부터 이미 문법에 관한 연구나 사전편찬 사업 등도 시행될 정도로 문물이 발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을 자랑하던 바빌론 제1왕조는 서기전 1,600여년 경에 북쪽 아나톨리아 고원으로부터 침입한 힛타이트족에 의하여 멸망당하고,힛타이트는 그 후 이집트와 자웅을 겨루는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는 바 그 후에는 다시 앗시리아가 등장하여 복잡한 전쟁시대가 그칠 날이 없게 되었다. 그 틈에 바빌로니아도 다시 세력을 부활하여, 결국은 바빌로니아가 서기전 1,141년경에 '네부카드넷사르 1세'를 중심으로 패권을 장악하고 비옥한 메소포타미아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한편,모세에 이끌려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민족 즉 유태인들은,그들이 이집트로 떠난 후 그 지방에 정착하여 살아오고 있던 에브스인들과 가나안 원주민들을 폭력으로 쫓아내거나 병합하여 가나안을 독차지했다. 폭력을 통해 가나안 정착에 일단 성공한 유태인들은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원수가 되어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약 50년이 지난 후 다윗왕이 정권을 잡고 나서부터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비롯한 주변 여러 지방을 병합하여 스스로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지혜가 뛰어난 현명한 군주로 구약책에는 묘사되어 있으나,재판을 한답시고 살아있는 아이의 가랭이를 찢어 반으로 나누려 할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 일면도 있었음을 생각한다면,그 당시의 유태인 사회의 율법이나 생활관습이 얼마나 살벌했던가를 알 수 있다. 하여튼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떠났다가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라면 거기에 누가 살고 있건 다 쫓아내고 자기들이 다시 소유하려는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만행은 현대의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를 유발시키고 있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한 바빌로니아는 그 후에도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서기전 609년에 드디어 앗시리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에게도 압박을 가했다. 서기전 598년에는 이스라엘을 함락시킨 후 유태인 주민 중 일부를 바빌로니아에 인질로 끌고 가서 이스라엘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눌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서기전 586년에는 다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또다시 많은 포로들을 끌고 가서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강압책을 썼다. 유다왕국까지 멸망당한 유태인들은 그 후 60여년에 걸친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자주적인 나라는 건설할 수가 없게 된 채로 주변 여건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갔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강력했던 다윗왕의 시절을 동경하여, 언젠가는 다윗왕의 후손 중에서 유태인들의 왕이 다시 나타나서 유태인들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리라는 열광적인 구세주 출현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누가 무엇을 믿든지 간에 자유이겠지만,자기들만이 이 지구상의 주인이며,'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이 지구상의 인류 중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고 행동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상천국의 필수조건인'홍익인간'에도 맞지 않는 욕심 사나운 자기위주의 고집이기에,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곤란한 문제인 것이다. 유태인의 역사는 특히 서양세계에서 많은 영향을 끼쳐 왔고,근대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미쳐왔으므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서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두가지 큰 조류가 유태인의 혜브라이즘과 그리이스인의 헬레니즘이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고대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이성을 점령한 여호수아. 8장- 21.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들을 쳐죽이고 22.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23.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24.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25.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26.아이 주민
    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27.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 편집부

    모세의 뒤를 이은 유태인의 지도자 여호수와는 가나안 일대에서 몰록신·바알신 등에 대한 고유신앙을 폐지시키고 일신교적 신앙을 퍼뜨리려 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태인들은 '사사제도(士師制度)'라는 독특한 정치적 제도를 발전시켰는데 사사는 각기 소속부족에 의해 선출되었다. 사사는 일종의 최고장로로서, 장로회의 및 민중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부족대표나 마찬가지였으나 강력한 권한은 없었으므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의 구축에는 실패하였고,약 이백여년 후(서기전1,000년경)에는 원시 적인 입헌군주제적 왕국을 건설하여 사울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사울왕 시절에 팔레스타인인들과 전쟁이 터졌을 때,거인 골리앗이 이끄는 팔레스타인 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 으로 추대되었다. 유태교 계통의 여러 종친집단에서 널리 쓰이는 아멘이라는 용어는 다윗왕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윗은 영토확장 정책을 강행하여,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연안부근까지(실제로는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건천(乾川)들이 뻗친 시리아 사막정도로 보인다),서쪽 으로는 아카바만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했으나(지금 이스라엘의 약5배),유태인왕국 자체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이 불완전하게 통합된 형태 였으므로,이들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력은 행사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태인의 왕들 중에 가장 훌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다윗왕은,한편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못 이겨서 한 유능한 부하의 아름다운 처였던 밧세바를 교활한 방법 으로 자신의 정부로 만든 파렴치한이기도 했다. 여러가지 지저분한 집안사정 때문에 다윗의 시절에도 내분으로 뒤숭숭하던 유태인 왕국은, 다윗이 죽자 곧 여러 피정복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들이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 버렸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가망없는 무력전쟁보다는 평화로운 외교적 해결을 택하는 한편 산업을 진흥시켰는 바,그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크게 부강해진 듯 했으나 빈·부의 차가 격심해졌다. 솔로몬 자신도 많은 외국여자들을 첩으로 맞아들이면서 외교정책상의 이유로 그들의 갖가지 종교를 모두 인정하는 방법을 쓴 결과,이미 유태인왕국의 혼란은 예정 된 일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이러한 정책의 발상과 후유증은 후일에 이슬람 창시자인 무하마드(=마호멧)가 세력확장을 위해 열 두 명의 다른 부족 출신 부인들을 맞은것과 비슷함).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의 왕으로만 즉위하고,이스라엘에서는 장로인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유태인 12부족 중 10부족을 통치했다(서기 전 933년). 남·북으로 분열된 유태인들은 약 100여년간 내전상태에 돌입하여 야만적인 동족상잔을 일으켰으며,그 후에도 이백여년 간은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어지러운 시대가 계속되었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21년간 지속되는 동안 9개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그 중에는 불과 7일간 통치했을 뿐인 왕조도 있었고,왕들의 평균 재위기간은 11년에 불과할 정도였고,제 수명을 다하고 죽은 왕은 거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정정(政情) 속에서 지새워 갔다. 그들은 한 때는 힘을 모아 앗시리아 제국에도 대항하였으나,10여년 간의 항쟁 끝에 앗시리아에 정복되었다(서기전 722년).조그만 변경지역을 정복하는 데 10여 년 이나 진절머리가 나야했던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남아있던 이스라엘인들을 모두 추방시켜 버렸다. 남쪽의 유다 왕국도 사정은 비슷해서 어지러운 국내정세가 수백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오리엔트의 패권을 장악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는 서기전 597년경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유다의 왕 여호야김을 사로 잡고, 지도자격 인사 8,000여명을 추방시킨 후,다윗왕가의 후손인 시드키아를 꼭둑각시왕으로 앉혔다. 그 후 느부갓네살이 철군하자 유태인들은 곧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느부갓네살은 다시 침공해 왔다. 유태인들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집트군은 2∼3주일만에 항복한 반면에 유태인들은 1년여간 버틴 끝에 결국은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끈질긴 유태인들의 저항에 대하여 느부갓네살은 참혹한 살륙과 성전파괴로 보복했고,12만여 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에 끌려갔다. 이들은 50여년 후 15만여 명으로 불어났으나 그들 중 약 1/4 정도만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 왔고,왕 대신 제사장들이 지도자가 되어 이끌어 갔다. 나머지 유태인들은 바빌로니아에 남아서 그 사회에서 번영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바빌로니아인들의 상대적인 너그러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태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도 자신들의 회당(시나고그)들을 가지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시나고그에는 그 기능에 따라 세가지의 명칭이 있어 왔다. 즉 기도의 집(베드 테필라),학문의 집(베드 하미드라쉬) 집회의 집(베드 하크네세드) 등으로 불리운 시나고그는 바빌로니아 시대 이후로 언제나 유태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써 어느 곳에서나 그 기능을 다 해 왔다. 서기전 458년경의 제 이차 유태인 귀향을 지휘한 제사장 에즈라는 유태인과 비유태인 사이의 결혼을 금지시켰는데,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유태인의 시나고그는 그들이 귀향할 때 유다왕국의 옛 땅으로 같이 돌아 왔고, 이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민족동질성과 종교를 유치한 채로 알렉산더의 출현 이전까지 제사장들에 의하여 다스려지게 되었다. 11.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명과 그들의 역사적 발전
    아메리카 원주민. 청교도들은 1억명 이상의 원주민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 편집부

    우리가 가장 잊기 쉬운 것은 태평양 건너 큰 대륙에도 일정한 정도로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큰 바다로 둘러 싸여 있는 지리적 관계로 인하여 독자적인 문명의 발달이 가능했던 훗날의 미주대륙에서도 훌륭한 인류의 삶이 이어져 가고 있었다. 대략 1만 5천년전경부터 북극해 주변의 따뜻한 해안으로부터 옮겨와서 살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약 4,000년 전에는 대강 이동을 마쳤고,그 후 급속도로 얼어붙은 북극해 지역에는 소수의 에스키모들만 남아서 조상들의 땅을 지키게 되었다. 에스키모들은 조상들이 남긴 전설에 따라서'언제인가는 북극 너머에 있는 따뜻하고 살기좋은 천국같은 곳에 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 추운 곳이나마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고도 한다. 여러가지 연구결과에 의하면 미주 원주민들은 서기전 5,000년 경에 이미 계통적으로 농경을 발전시키고 있었다고 하고, 서기전 2,300년경에는 토기도 제작해서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으며,서기전 1,200년경에는 멕시코 지방의 베라크루스·타바스코 방면에 흙벽돌을 구워서 쌓은 거대한 피라밋이나 신전들을 건설 하였는데 이것은 올메카문명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 당시 이미 어떠한 강력하고 체계적인 사회조직이 이루어져서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볼수가 있다. 그때부터 종교,천문,역법 등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그 후로도 계속 여러 가지 문명들이 그 세력을 따라서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 것은 다른 지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올메카문명은 서기전 1,200여년경에 출현하여 서기전 8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서 그 전성기를 맞았다. 그후 멕시코 지역에서는 서기전 350여년경에 토토나카문화가 발생하여 색다른 피라밋을 건설하기도 했는데,발달을 거듭한 천문학의 지식은 놀라운 것이어서 마야 인들이 계산해 낸 지구의 공전주기는 16세기 이후 발달했다는 서양의 천문학자들이 현대에 계산하고 있는 수치와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는 현재 여러가지로 의문점을 던져 주고 있는 거대한 나즈카의 그림이나 마추피추의 고산도시,그 외에도 나중에 발달한 잉카문명의 숱한 수수 께끼같은 유적들을 남겨 놓고 있다. 그들 나름대로 인류 문명의 한 부분을 발전시켜 온 이들 원주민들은,서기 1492년 이후에 밀려 들어 온 십자가를 앞세운 백색 침략자들에 의해서 나중에는 거의 멸종될 위기에까지 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문명에 대해서 인류는 겸허하게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며 항해에 지친 침략자들에게 조금도 적의를 보이지 않았던 선량한 문명인들인 미주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유럽인들은 그들의 역사 앞에 깊이 참회하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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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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