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2) 신시시대의 역사 전개와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명은?

浮萍草 2013. 5. 16. 07:00
    신시시대의 역사 전개와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명은?
    3. 신시의 역사와 세계사 민족이 스스로를 일컫는 '배달의 자손'이라는 말은 바로 옛 한국의 주민들을 낙토로 이끈 첫번째 환웅인 '배달 환웅'의 존호에서 나온 명칭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민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깜깜한 채로,'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따라서 꾸며낸 이야기이며 거짓말이다'라고 이유없는 거부를 하기 일쑤이다. 앞서 말했지만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역사나 이야기·전설 중에서 왜 우리나라의 옛 역사적 사실이 나와야 한단 말인가? 만일 자기의 족보가 다른 나라의 족보나 다른 가족의 족보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얼빠진 자들의 이야기는 일단 제쳐놓고,우리는 우리 '족보'에 있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옛 일들을 계속 밝혀 보기로 하자. 옛 한국에 몰아 닥친 추위는 상상을 못할 정도의 엄청난 것이어서,몸집이 무거운 동물이나 행동이 느려서 이동에 실패한 동물들은 그대로 선 채로 얼어 죽어가는 정도였다. 북극해에 면한 지구의 북쪽 땅끝에서 발견되는 수천년 전 내지는 만여년 전의 거대 동물들의 산더미같은 잔해(뼈)들은 대한파가 닥치기 전에 수천년간 지속된 온난한 기후에 의한 생물들의 번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쳤던 추위를 말해주듯이, 아열대성 식물을 먹고 있다가 실족사한 상태에서 통째로 얼어붙은 코끼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3,301년 동안 새로운 문명생활을 익혀 온 사람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추위와 굶주림은 마찬가지로 닥쳐왔다. 그래서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었던 지위리 환인은 영특한 인물들에게 명을 내려,사람들이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특출한 인재가 환웅(배달환웅)과 반고라는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 반고는 서남쪽으로 배달환웅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각각 맡은 개척단을 이끌고 새 터전을 찾아 떠났는데 배달환웅과 함께 떠난 사람들은 3,000여에 달하는 부락들의 대표격인 사람들이었다. 아직 길도 나지 않은 울창한 열대지방이었던 지금의 흑룡강일대와 만주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인간생활에 가장 적합한 곳을 찾던 배달환웅의 일행은 가는 곳 마다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그 당시의 야만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뉴우기니아의 원시종족들이 사는 거주지로 탐사를 떠난 셈이었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하는 점도 상상하기에 어렵지는 않다.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낯설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겠지만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있는 문명인들을 처음 보게 된 원시족 즉, 호족(虎族,즉 호랑이를 부족신으로 삼는 야만족)들은 환웅의 무리에 존경하는 마음과 부러워하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환웅은 이들을 잘 달래어 가면서 여행했으므로 별다른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환웅은 마침내 산중의 산인 넓은 백두산(일설에는 황하 중·하류에 위치한 태백산이었다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가고자 마음먹고 정착하기로 했다. 환웅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수많은 환국의 백성들은 물밀듯이 넓은 만주 및 하북의 벌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넓은 땅이라고는 하지만 한정된 개척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원주민들과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에서 사소한 다툼들이 생기게 되었다. 두 다른 주민들 사이에 반목이 생기게 되었는데 환웅은 부족간의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하여 두 집단을 잘 타일렀으나 그래도 다툼은 그치질 않았다. 환웅은 이러한 불화를 없애려고 마침내 한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이 땅에서 어울려 살아가야 할텐데 부족 사람들 사이에 자주 다툼이 일어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요. 아무래도 두 부족 중에서 한 부족이 양보하여 질서를 정하지 않으면 서로 간에 다툼이 그칠 것 같지가 않으니,두 부족의 대표자들을뽑아서 누가 더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인내력을 시험해서 가려내기로 하는 게 어떨까 하오. 그래서 보다 더 인내력이 강한 지도자에게 모두가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제안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한민족의 역사서인'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는 저 유명한 동굴의 고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결국 참을성이 보다 강했던 환국의 이주민(검족) 대표자가 승리했으며 그에 따라서 검족과 원주민들은 환웅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의 민족으로 동화 되었다. 실로 이로부터 한민족의 역사는 그 찬란한 빛을 인류사회에 남기게 되었다. (그 이전의 훌륭했던 옛 환국의 문명은 대부분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 밑으로 사라져 갔으므로) 4. 신시시대의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명
    서력기원전 약 4,000여년을 전후하여 세계 각지에서는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이라는 황하·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 문명이 일어났다. 한민족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때가 다름 아닌 신시의 초기로서 말하자면 옛 환국의 문명이 추위 속에 얼어 붙어가자 환국의 너른 영토 내에 있던 각 무리들이 제각기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흩어져 가면서 가는 곳마다 다시 환국의 문명을 곳곳의 풍토에 맞추어 발전시켜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네 곳에는 불가사의한 유적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지구랏트나 대피라밋 지나지방의 큰 주거지역 및 제단(祭壇) 그리고 인더스강의 유역에 있는 모헨조다로의 수수께끼 같은 현대적 도시유적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마치 베다에 은유적으로 기술되어 있는'핵전쟁'을 묘사한 전설내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인류 앞에 던져진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모헨조다로의 유적은,인류가 지금의 미친 짓같은 핵무기 경쟁을 중지하지 않으면 어떠한 결말을 보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여튼 이 때의 문명이 대다수 현대인들이 생각하듯이 '매우 원시적인 문명'만은 아닌 것이 확실한데 그러한 사실은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메르점토판의 문자해독에성공함으로써 점점 더 명확해 지고 있는 중이다. 점토판들에 의하면 수메르에서는 현재와 비교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사회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학자들이 세계문명의 시초라고 보고 있는 수메르문명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로 보인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크레머가 밝힌 바에 의하면 수메르 사회에는 현대와 견주어 봐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교육제도·의회제도·재판·법률·의료제도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수메르인들은 특히 보리의 경작과 이용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수백년 내지 수천년 전 부터 어디에선가 농경 문화를 발전시켜 왔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서기전 2,350년경(단국조선 개국과 비슷한 무렵)의 도시국가였던 라가시에서 나온 점토판의 기록에 의하면,수메르 에서의 보리수확은 파종한 양의 80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농경기술의 발달은,유럽 지방의 중세기 초기에 파종량의 겨우 5, 6배를 넘지 못하던 수확량과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수메르인들은 보리를 한껏 이용하여 식품은 물론 가축사료,맥주제조 등에도 이용했는데,맥주의 종류만 16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유럽 지방에서 보리가 가축사료로도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무려 4,000년 후인 서기 18세기에 이르러서였던 것도 좋은 비교가 될 수 있다. 심지어는 보리를 파종하는 기계가 유럽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서기 18세기에 이르러서인데 비하여,이미 그보다 4,000여년전에 수메르인들은 파종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류문명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해 간다는 좋은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미 서기전 4,000년 후반기부터 도시를 건설했던 수메르인들은, 그들의 도시성립기에 민회·장로회(民會·長老會)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정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수메르인이 남긴 수십만장의 점토판 중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당시의 실제적 행정경제문서를 판독한 결과 증명된 것이다. 이 행정경제문서에는 16개에 달하는 맥주의 상표가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천여년의 번영을 누리던 수메르인의 찬란한 인류문명은 그후 주변 여러 족속들의 북새통에 꺼져 갔으며 따라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인류문명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고 그 뒤를 이은 그리이스·로마는 더욱 타락해 갔고,그 뒤를 이어 오늘날에 이르는 유럽세계는 한층 더 암흑 속을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수메르문명과 함께 나중에 유럽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이집트 문명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점이 많다. 기껏해야 나일강 유역의 폭 좁은 평야지대에 길게 뻗은 형태로 취락을 형성하여 생활하고 있었다는 불과 수백만명의 이집트인들이,어떻게 그렇게 터무니없이 거대한 피라밋이나 대 신전들을 건설할 수가 있었는가 하는 점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기제의 대 피라밋은 그 당시의 인적 자원과 원시적 기술 수준으로 볼 때(만일 그 당시의 기술 수준을 '원시적'이라고 한다면) 수백년 이상 걸려야 건설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20∼3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피라밋 건설에 쓰인 거대한 석재들이 주로 아라비아 반도의 바위산에서 절단된 후 뗏목으로 홍해를 건너고, 다시 사막을 가로질러 수십만 명의 힘을 모아 운반되고 쌓였다는 가정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수십만 명이 수백년(또는 2, 30년이라고 하더라도)간 계속 비생산적인 노역에 종사해야 한다면 그들과 그 가족들은 누가 먹여 살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수백년동안 한 개의 피라밋만 건설하고 있던 것도 아니며,숱한 전쟁·왕궁의 건축·다른 피라밋들 및 신전들의 건조가 부단히 계속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피라밋 건설이 지닌 수수께끼는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피라밋은 10만 명의 일꾼이 매년 3개월씩 동원되어 약 이십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하며 노동자들은 노예적으로 혹사를 당했다기보다는 종교적 열정으로 기꺼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기간도 농한기를 택해서만 일시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한다. 파라오 자신도 절대권력은 부여받고 있었으되 결코 전제군주는 아니었고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느슨한 통제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 안에 피라밋 건설이 가능했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 소위'초고대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훗날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이집트에서는 지금의 토목기술로도 만들어 내기 어려운 거대한 건축물들과 피라밋 등이 이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만주에 가까운 요령·열하 등지의 유적지에서도 사방 수백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신전들이 발견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산동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약 6,000여년 전에 발달했던 문명의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최근에 발견된 열하지역의'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은 건설 년대가 약 5,000년 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그 시기에 그 지역에서 그러한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킬 정도의 건축공학과 고등수학 등에 조예깊은 주인공들이 누구였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족(漢族) 또는 하족(夏族)으로 지칭되는 지금의 일부 지나지방 사람들의 선조들은 그 당시 홍산문화 유적으로부터 서쪽으로 무려 수만리나 떨어진 황하의 상류 부근으로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보이고 있던 중이었고 그 이외의 여러 야만 부족들은 지나지방의 여기저기서 소위 '중국의 원시시대'라고 일컫는 신석기시대를 영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있어서의 역사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인류문명의 주인공은 그 당시 너른 만주벌과 화북지역으로 진출해 나아갔던 배달민족을 빼고서는 생각할 도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수수께끼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열쇠인 옛 기록도 바로 한민족만이 쥐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그리고 시베리아 북동쪽의 아열대지역에서 코끼리떼·물소떼 등과 함께 살고 있던 옛 한국 주민 중 일부는 얼어붙기 시작한 땅을 떠나 서둘러서 동쪽으로 멀리 이동해 갔다. 그들은 그 후 수천년동안 평화로운 옛 한국(환국) 시절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갔는데 근세에 이르러 서양의 무지막지한 침략자들에 의하여 인디언이나 인디오 등으로 불리워지면서 학살과 수탈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멀리 태평양 건너 미주대륙의 원주민들은 한민족과 같이 아름다운 옛 풍속들을 지니고 수천년간 발전해 왔는데 그들의 유물이나 민속은 바로 옛 한국의 모습을 그대로 고이 간직해 왔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