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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식민사관 극복의 원점

浮萍草 2013. 6. 12. 07:00
    * 일제 식민사관과 그에 부화뇌동해 온 자생적 식민사관 추종자들에 의하여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어 버린 단군조선 초기역사와 주변부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문헌적 근거들에 의거한 주체적 관점 확립은 민족정기 확립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강역도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나. 단군조선과 동아시아 단군 환검이 천하를 평정하고 홍익인간의 대법을 세상에 다시 널리 펴시며 지상천국을 이루어 나아가면서부터 비로소 문명인류는 꺼질 뻔했던 문명의 불씨를 다시 환하게 비출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단군들이 천하를 다스려 가면서 오직 홍익인간의 기본이념을 지키니 비록 약간의 반란무리들이 암흑속을 헤매이고 있었다고는 하나 약 천년 간의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단군조선의 사회는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민중경제력의 안정과,순후한 풍속에 의한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사회적 조화를 이루었다. 조선의 건국시기로부터 약 천여년 후에 기자(箕子)가 주나라 초기의 왜곡된 봉건제적 유산을 타파하고 진정 민중을 위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제도를 펼치려다가, 주무왕에게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를 등지고 홍범구주의 고향인 단군조선으로 귀화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역설적으로 단군조선의 아름다왔던 제도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먼 훗날 지나지방의 대성인이라고 불리운 공자조차도, "지나지방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통하지가 않으니 차라리 군자의 나라인 동쪽나라(구이;九夷)에 뗏목이라도 타고 옮겨가서 살고 싶다."라는 유명한 넋두리를 남겼다. 지나지방의 동쪽인 구이(九夷)의 나라라는 것은 다름 아닌 단군조선의 많은 지방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이며,실제로 동쪽에서 역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단군조선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3세 가륵(嘉勒) 단군 무렵에는 그 이전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전해져 오고 있어서 서로간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주고 있던 문자제도를 한가지로 정비하는 대 문화 사업을 수행하였다. 제4세 단군 무렵에는 몽골지방을 포함하는 더욱 넓은 지역이 단군조선의 문물에 동화되기를 원하여,동생인 오사달을 몽골지방에 보내어서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여하튼 천산 동쪽의 동아시아는 완전히 단군조선의 영향을 받아 제각기 찬란한 발전을 하고 있었는데,지나지방의 야심가들 중에는 유독 한껏 욕심을 부려서 스스로 천하의 지배자가 되려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야심가들이 설치던 하족들의 여러 나라들(제후국)은,그나마도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한 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터무니없는 야욕을 품고 지나 지방 내의 여러 단군조선 계열 나라들에게 틈만 있으면 시비를 걸고 전쟁을 도발해 왔다. 더구나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즉 하족들이 세운 나라이외에는 모두 짐승같은 나라라고 그들의 역사책에 기록해 왔는데(서융·남만·북적·동이:西戎·南蠻·北狄· 東夷),그래도 동쪽의 문화선진국만은 기본 양심상 짐승이름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는지 동이라는 좋은 명칭으로 불러 왔다. 지나지방에서 당우(唐虞, 또는 禹)가 세운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산천에 대한 관리방법을 배움으로써,9년 홍수에서 벗어나 간신히 나라의 모양을 갖추게 된 하나의 제후국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군조선을 하늘나라로 알고 자신의 도리를 잘 지키고 있었으나,약 사·오백년이 지나가는 동안 단군조선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썽을 피우기 시작 했다. 그러다 마침내 걸(桀)왕의 통치시기에 이르러서는 단군조선을 정벌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야욕을 품고서 단군조선의 변경을 침략해 왔으나,지상천국을 지키려는 단군조선의 맹장들과 주민들에 의하여 대파되었다. 그 당시 단군이었던 제13세 흘달(屹達)단군은 목숨을 구걸하는 걸을 처단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라에 대해 경계와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자포자기에 빠진 폭군 걸왕은 민중을 수탈해서 얻은 재물로 호화스런 궁궐을 짓고 연못을 깊게 파서 그 속에 술을 가득 담으며,연못 속에는 인공적인 섬을 만들어 나무가지마다 고기를 안주로 매달고(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고 불리움),전국의 미녀들을 잡아 와서 시중들게 하는 등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큰 미움을 받는 악정을 일삼았다. 그는 또한 그러한 폭정을 비난하는 올바른 사람들을 잡아다가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포락지형이라는 악형을 가하여 파리죽이듯 했으므로,드디어 민중의 원성을 배경으로 혁명을 일으킨 탕(湯)에게 멸망당했고, 하나라는 오백여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탕이 세력을 강화하는 데는 단군조선의 도움이 컸으므로 탕이 세운 은나라(殷=商)는 단군조선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평화롭게 지내어 갔다. 그러나 그 은나라도 수백년이 지나가는 동안에 단군조선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걸왕처럼 단군조선에 대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은나라 말엽에 무정(武丁)왕이 은나라의 군사를 몰아서 지상천국인 단군조선을 다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무정의 침략군을 격파한 단군조선의 강력한 대군은 내친 김에 은나라의 모든 영토를 점령하여 위성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래 은나라의 제왕(諸王)들은 단군조선의 신하이자 같은 민족이었으나 자만심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반란을 일으켜서,문명세계 전부를 정복하려는 엉뚱한 야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즉, 배달민족이 나라를 다스리는 계층이었고, 주민의 대부분도 배달민족과 하족이 혼합되어 있었음). 단군조선으로서는 이처럼 저돌적인 은나라에 대한 경계심과 단속이 강화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은나라의 야심가들은 자업자득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제제 조치를 권리침해라고 주장하였고,드디어는 단군조선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려고 다시 전란을 자초하였다. 그리하여 은나라는 마지막 왕인 주(紂)왕에 이르러 은나라 신하였던 무(武)왕의 반란에 의하여 육백여년 만에 멸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지방의 사회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고,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대혼란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러한 시기를 그들 스스로 '춘추전국시대'라고 하여 난세중의 난세로 손꼽는다. 홍익인간의 정도를 무시하고서는 올바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없음은 당연한 한 귀결인 것이다.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단군조선에서도, 이른바 '전(前) 단군조선'으로 불리우는 제 21세 소태(蘇台) 단군까지의 일천여년 역사가,은나라에서 무정왕(武丁王)이 집권한 시기와 때를 같이 하여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혁명으로 소태단군을 몰아 내고 등장한 색부루(索不婁) 단군은, 단군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세나라로 나누고,각각의 제왕(帝王)을 중심으로 상호간에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전환했다. 그리하여 가장 서쪽 지나지방에 인접한 불조선은 서우여(徐于餘)에게 백두천산 이남인 말조선은 여원흥(黎元興)에게,중심지인 신조선은 단군직할령으로 삼아서 색부루 단군이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바다건너 동쪽의 열도지방에서는 아직도 문명의 빛을 받지 못한 캄캄한 야만족들이 짐승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는데,일찌기 제3세 가륵 (嘉勒)단군 시절에 지금의 송화강(우수하,또는 춘천지방이라는 말도 있음)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간 소시머리(素尸毛)의 일당들이 원주민인 아이누족과 다투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도에서는 단군조선의 문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결과,천여년이 지나도록 원시적인 문명생활조차 재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조선은 대마도를 건너 북큐우슈우 지방과 열도 서부지방에 걸쳐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문명으로 다스렸으니, 배달민족은 명실공히 동아시아의 주인 으로서 열도지방에 문명을 전파하기 시작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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