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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사의 여명

浮萍草 2013. 5. 9. 15:58
    1. 세계사의 여명
    억년 전에 원생동물의 한 종류가 '진화'를 시작한 결과 마침내 유인원이 되었고 수백만년 전에는 그 유인원의 한 종류가 두 발로 서고 연장을 다루기 시작하고,
    또한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밝히기가 매우 곤란한 그러한'과학적인 가설'이 있다고 해서 현생 인류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출신에 비통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설과 함께 진행된 진실로 동물적인'적자생존의 논리'나'약육강식의 논리'가 근 이백여년간 인류사회에 끼친 해독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바가 있었다. 
    동물적인 논리가 상식화되어 간다는 것은 곧 인류사회가 다름 아닌'옷입은 동물'들의 사회로 퇴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조작하고, 우주선을 발사하며,고층 아파트의 산뜻한 변기에 걸터앉아 있다고 해서 동물로서의 의미가 보다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해마지 않으며 인류의 모체인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황폐화시키면서 스스로는 혼자 깨끗한 척하려 애쓰는 그 전도된 의식구조야말로 이미 
    이성을 잃었거나 이성이 없는 가장 못난 하등 동물의 본성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가 더 이상 동물로 퇴화하는 것을 멈추고 왜곡되었던 문명의 궤도를 바로 찾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편견적인 상식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종교적 광신의 타파이다. 
    세상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져 있다거나 유산자와 무산자로 나뉘어져 있다거나 하는 등의 독선적인 종교적 과대망상은 숱한 인간을 파멸시키고도 행복한 사회를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황금의 신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그 결과는 항상 반인간적인 타락과 파멸이었을 뿐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이 모든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면, 과연 그러한 발전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고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다른 대다수의 인류가 희생이 되어야만 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도 인류문명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는가?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의 모든 문명들을 다시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구적인 파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류문명을 진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그 문명이 빗나가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민족의 유익한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인류문명의 가치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잣대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한민족의 이야기를 몹시 왜소하게 취급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시대를 통털어서 보더라도 하나의 겨레가,거의 비슷한 지역에서(영역의 확대와 축소 정도의 변화는 겨레의 강하고 약함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지라도), 무려 수천년간 계속적으로 역사활동을 하고 발전해 온 사례가 한민족을 빼놓고서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족과 국가들이 동·서를 막론하고 흥망성쇠를 거듭해오면서 숱한 멸망과 이합집산을 거듭해 왔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류사회는 이러한 세계사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혼합되어 버리고 종족적·민족적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져 온 것도 사실
    이다. 
    그와 같이 뒤죽박죽으로 얽히고 설킨채 단지 지역적인 정복과 피정복의 되풀이에 불과했던 지나·인도·유럽·미주 등  각 지방의 정신없는 변천에 비하여 한민족은 유사
    이전과 이후를 통털어서 일정한 영역에서 종족적 특질과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발전시켜 오면서 세계사의 변천을 주시해 온 것이며,인류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원으로서 존재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한민족의 기록과 역사를 무시하고서 세계사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모래로 밥짓기'밖에는 될 게 없으므로,그 결과 지구
    상에는 서로 자신들의 주장(역사관)만 옳다고 우기는 몽매한 무리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  따라서 그처럼 부당하게 세계사에서 거의 잊혀져 왔던 한민족의 유구하고도 장엄한 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바로 잡는 대반정(大反正)이 이루어져야만 하며 
    여기에 한민족주체적 세계사의 방향을 제시해 봅니다. 뜻있는 연구자들의 질정과 더욱 폭넓은 연구를 기대합니다 *
    
    Ⅰ. 문명인류의 기원과 한민족
    
     1. 한민족의 역사와 세계사의 시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은 전해 오는 기록에 의하면 약 1만여년 전부터 이미 매우 발달된 문명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 난다. 그 기록은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록으로서 바로 그러한 점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려 주는 동시에 다른 나라 사람들 이나 다른 민족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고 경시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서양사관을 과신하는 자들 중에는 전래되어 오는 한민족의 오랜 역사나 전통을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한민족의 위대한 조상들을 일종의 마귀인 듯이 비방 하기도 한다. 합리성이 부족한 신화를 놓고 역사적 관점에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만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지은 구약의 창세기를 인용하여 어떤 신이 6,000여년 전에 자신의 모양대로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믿는 것과,4,300여년 전에 우주 대신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한 곰과 정식 혼인을 하여 신인(神人) 단군을 낳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 것과는 어떤 쪽이 더 합리적인가? 또 어떤 사람들은 한민족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많은 기록들을 믿지 못하겠다고도 한다. 그 이유라는 것이,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들에는 한민족의 옛 기록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웃(특히 지나지방) 나라들의 기록에 한민족의 역사활동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 없다고 우기는 것은 무식의 소치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근대나 현대처럼 국제적 교류가 빈번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수천년 전의 옛날에, 무엇때문에 어떤 겨레의 역사적 활동이 이웃나라의 기록에 꼭 나타나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더구나 선주민(先住民)의 활동이 이주민(移住民)의 활동보다 수천년이나 앞서 있었다고 할 때, 이주민이 오기 전의 수천년에 걸친 선주민의 활동상황이 어떻게 이주민의 뒤늦은 기록에 나타날 수가 있겠는가? 꼭 알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로마인이 이태리반도에 출현하기 수백년 전인 서기 전 1,000여년 경 이태리반도 지배자였던 에트루리아인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뒤늦게 출현한 로마에 그대로 전해질 수가 있었는가? 미합중국의 역사책에는 인디언의 연대기라도 기록되어 있단 말인가? 앵글로 색슨족의 역사책에는 켈트족의 활동이 얼마나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가? 로마나 미합중국이나 앵글로 색슨족이 훗날 선주민들과 접촉하여 보고 들었던 사실들만이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질 뿐이 아닌가? 한민족의 활동도 바로 그와 같은 정도로는 얼마든지 '이웃 나라'의 기록에 남아 있다. 더구나 그 이웃 나라의 기록자들이 우러러 볼 정도의 높은 문화수준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들은 전해주고 있다. 한민족의 활동은 지나 지방이나 만주·한반도에 정착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천년간 저 북방의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서(최소한으로 잡아도 바이칼호를 위시한 중앙 시베리아에 널리 퍼져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한민족 자신이외에는 근처에 어떤'이웃'도 없던 그 당시의 활동상황을 그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이웃'의 기록에서 찾으려는 일이가능한가? 한민족 자신의 오래된 기록 속에 그러한 한민족 선대의 활동을 알아볼 수 있는'족보격 문서'들이 전해져 온 것은 세계사와 인류와 한민족을 위하여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원시시대의 인류생활
    원시시대라는 이름은 다소 애매한 것 같지만 한민족으로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현생 문명인류시대 이전을 일단 원시시대라고 불러 보기로 하자. 한민족에 의한 문명시대 이전의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가고 있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견된 태고적의 유물·유적들에 의하면 옛날이라고 해서 나무에 열리는 과일이나 따 먹고 들짐승들만을 잡아 먹고 살면서, 옷이라고는 짐승가죽이나 풀잎 같은 것만 두르고 살고 있었던 젓 같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발달된 문명생활을 누리고 살고 있었던 유적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도 아프리카의 오지나 남양군도,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오지에서는 얼마든지 석기시대의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그렇다고 지금의 지구를 일컬어서 석기시대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어느 곳에서는 지금의 서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지금의 아프리카 오지와 같은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집트의 피라밋같은 대건축물은 지금의 건축기술로도 도저히 다시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견해가 유력한데 그렇다면 그것을 만들었던 옛 사람들은 분명히 지금보다 발달된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한 분명한 눈앞의 증거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다시 살아 나와서 그들이 피라밋을 다시 만들어 내어야만 믿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왜 일어나느냐 하면 지금의 사람들이 겸허하게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보다 먼저 이룩된 문명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만이 아메바나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온 결과 비로소 인류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이루고 있다는 헛된 자존심 내지는 자만·무지 때문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과학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수천년 전부터 한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온 삼일신고(三一神謠)에서는'사람과 사물은 함께 세가지 참된 것(성:性, 명:命, 정:精)을 받았으나 셋을 온전히 갖춘 것이 사람이 되고, 세가지가 어느 쪽으로 치우친 것은 사물이 되었다 .(人物同受三眞 日性命精 人全之物偏之)'고 가르치고 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알려져 왔으나,사람들에게 알려져 온 기록 중에 한민족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우선 우리의 이야기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소리는 있어본 적이 없다(어떤 종족들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 볼 수 있겠지만). 더구나 아메바나 원시적 단세포로부터 진화되어 왔다는 그야말로 단세포적인 설명은 한민족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우주의 법칙은 모든 생물에게 성(性)·명(命)·정(精)이라는 세가지 요소를 갖추어 줬으며 그것이 적당히 또한 골고루 갖추어진 것이 사람이며, 어느 한 쪽의 성분으로 치우친 것이 만물이 되고 있음을 가르친다. 말하자면 아메바는 처음부터 아메바이고 원숭이는 그 처음 조상부터 성·명·정의 부적합한 배합 비율에 의해서 원숭이었던 것이며 영원토록 원숭이일 뿐이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 중에도 각각의 배합비율에 따라서 벌레같은 인간·원숭이 같은 인간·늑대같은 인간·여우같은 인간 등의 구별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훌륭한 배합비율이나 소질을 타고나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구실을 못하고 짐승이나 그 보다도 못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빠져있거나 부족한 사람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천명에 달하는 동족을 살상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귀같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횡행하는 지금같은 세상에는 보다 많은 이러한 성분불량의'불합격품'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고 자기 조상을 마귀나 우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얼굴색도 변치 않고 하고 다니는 자들도 뭔가 이런 세가지 성분의 부조화가 그 바탕이 되고 있으리라고 못 볼 것도 없다. 자고 이래로 한민족의 가장 큰 이상은 그 세가지가 잘 조화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그 가르침을 지켜온 이래 한민족의 유구한 이상은 혼자 잘 살려는 것도 아니고,혼자 잘 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서로서로 도와서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홍익인간'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가르침을 처음으로 펴신 분은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으로 알려져 왔지만 보다 가까운 한민족의 역사적 시조는 천산(天山)에서 득도한 '안파견 환 인'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간단하게 '환인'(또는 '한인')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안파견 환인이 나타나 가르침을 펴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환인은 약 9,200여년 전에 활동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져 오는 기록들에 의하면 환인이 나타나시기 이전의 세상에는 하늘을 덮을 만한 큰 홍수가 있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휩쓸려 사라져 갈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옛 서사시'베다'에는 그 시기에 현대의 핵전쟁을 방불케하는 무시무시한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자연환경 파괴에 따른 여러가지 악조건에 의해서 기상이변이 매우 자주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에다가 만일 핵전쟁이라고 하는 인류 종말적 괴변이 겹쳐서 일어나기라도 한다면,그 결과는 비단 대홍수에 의한 파멸정도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어쨌든 옛날의 대홍수 이후에 지구상에서 가장 높고도 장엄한 산줄기들이 연이어 있는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천산 일대에서 환인이 가르침을 폈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합리적인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사람들은 분명히 높은 산에 올라가서 대피하였거나,또는 처음부터 그처럼 높은 산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뿐이겠기 때문이다. 대홍수가 물러간 뒤에 산꼭대기까지 찼던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사람들은 서서히 산에서 들로 내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한때 태고적 문명을 자랑했던 인류는 모든 것을 홍수에 휩쓸려 보냈으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환인은 새 출발을 하는 인류에게 다시는 무시무시한 파멸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욕심을 버리고 서로 돕고 사는 길을 가르쳤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지나친 경쟁이나 욕심이 결국은 인류의 멸망에 이르는 타락의 원인이 되리라고 깨달아서,환인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평화 로운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홍수물이 다 빠진 들에는 다시 씨가 뿌려지고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야생동물도 점점 번식하기 시작하였고,사람들도 다시 사방팔방에 흩어져서 번성하여 갔다. 그리하여 그 옛날에는 코끼리·들소·영양·코뿔소들이 얼마든지 살고 있던 따뜻하고 풍요로웠던 지금의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인류사회가 다시금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사회인 옛 환국이 7대에 걸쳐서 약 3,301년이나 지속되어 가는 동안에 사람들은 대부분 대단히 긴 수명들을 누렸으나 그들에게는 다시 한 차례의 시련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지구의 생존조건 자체에 큰 변동이 발생하여 기후조건이 갑자기 뒤바뀌는 위기가 닥쳐왔던 것이다(북극지방의 얼음밑에서 발견되고 있는 열대 내지 아열대성의 동·식물들이 이러한 상황의 가능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농사와 사냥에 적합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사방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즉 시베리아의 기름진 옥토에 모여 살던 여러 종족들은 일시에 닥쳐 온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각자 적합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환국(옛한국) 말기에는 사회적으로 다소 혼란한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옛 기록에 전해지는데,이 때 그 혼란을 잘 평정하고 다시 안정된 인간세상을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운 지도자가 '환웅'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환웅(또는 '한웅')은 환국의 마지막 지도자인 지위리 환인의 정통을 이어 받아서, 3,000여에 달하는 대 부족집단을 이끌고 그들을 널리 이롭게 할 수있는 기름진 땅을 찾아 바이칼호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대이동을 단행했다. 환웅은 대흥안령을 넘고 흑룡강을 건너서 열대림과 광막한 초원으로 덮여 있던 지금의 만주·하북지역 으로 문명인류를 이끌었다. 이리하여 해뜨는 아시아의 동방에서 가장 높고, 넓고,웅장한 신령스러운 백두천산을 중심으로 미개척지를 개간하고, 수많은 환국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