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육조의 생애와 사상

2 행자 혜능이 육조가 된 사연

浮萍草 2013. 4. 7. 07:00
    나뭇꾼 혜능, 8개월 만에 대자유인이 되다
    혜능이 오조 대사를 찾아간 오조사.
    혜능 행자가 일하던 오조사 방앗간.
    자도 모르던 나뭇꾼 혜능은<금강경>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출가의 결단을 내리고 오조 대사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당시 오조는 양자강 위 호북성 황매현 오조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혜능의 고향 광동성에서 양자강 위 황매현까지는 매우 먼 거리다. 한 달을 걸어갔다고 한다. 혜능은 장강을 건너 황매 오조사에 당도하자, 바로 홍인 대사를 만났다. 당시 만남이 <육조단경>에 기록되어 있다. 오조 홍인 : 너는 어디 사는 누구인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혜능 : 저는 영남 사람으로 혜능이라 합니다. 큰스님을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조 홍인 : 너는 영남 사람이면 오랑캐()인데 어떻게 오랑캐가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혜능 : 사람에 남쪽 사람,북쪽 사람이 있으나,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오조는 남방에서 온 혜능의 비범함을 직감하며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주변에 제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 이렇게 하여 나뭇꾼 혜능은 행자가 되어 오조사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일을 하게 되었다. ㆍ오조가 전법할 제자를 찾다
    그러던 어느 날, 오조대사는 제자들을 다 모아 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매일 공양하며 복(福)을 구할 뿐 생사고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구나. 너희 자성이 미혹하면 복이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느냐? 스스로 갖춘 자성의 지혜를 밝혀 게송을 하나씩 지어 오너라. 게송을 보고 깨달은 자가 있으면 육대 조사로 부촉하겠다.”
    오조의 이 말씀을 보면, 당시에도 대중들은 공부보다는 복 짓는데 관심이 더 많았던 듯하다.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대중들은 깨달음보다는 복 구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ㆍ교수사 신수스님의 고뇌와 게송
    당시 오조사 대중은 1000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대중은 아무도 게송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대중은 교수사인 신수스님이 오조대사의 법을 이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수스님(606~ 706)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배웠다. 불법을 만나 출가하여 경전에 밝아 오조 문하에 와서는 대중을 가르치는 교수사가 되어 있었다. 인물도 좋고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인기가 높았던 스님이 당연히 육조가 되리라 대중은 믿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신수스님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중은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데, 정작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신수스님은 고심을 거듭하다 마침내 아무도 보지 않는 야밤삼경에 몰래 회랑 벽에 이런 게송을 써 놓고 오조의 판정을 기다렸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오조대사는 이 게송을 보고 누가 지은 것인지를 직감했다. 대사는 신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신수와 혜능이 게송 대결을 펼쳤던 오조사 회랑.
    오조사에 모셔진 오조 홍인조사상
    “이 게송은 문 앞에 이르렀으나 문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해 공부하면 삼악도(三惡道,지옥,아귀,축생)는 면 하겠지만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가서 좀 더 생각하여 다시 게송을 지어 오느라.” 그러나, 신수스님은 끝내 게송을 짓지 못했다. ㆍ혜능행자가 게송을 짓다
    오조사에서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열심히 일하던 혜능행자도 이 소식을 들었다. 혜능은 글자를 몰랐지만 신수스님의 게송을 듣고는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게송에는 몸과 마음,그리고 깨달음과 먼지를 나눠놓아 분별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혜능은 용기를 내어 글자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 게송 옆에다 자신의 게송을 적게 하였다. 행자 혜능의 게송은 이렇다.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대중들은 이 게송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오조는 혜능이 지은 것임을 직감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사는 이를 바로 인정하면 행자가 깨달아 육조가 될 수 있느냐는 시비가 일어나 혜능이 위험하게 될 것을 염려 이 게송도 아니라고 부정한다. ㆍ<금강경>을 듣고 깨닫다
    그러나 다음날 오조는 방앗간으로 가서 허리에 돌을 메고 방아를 찧는 행자 혜능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을 위해 몸을 버림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수고하는구나! 쌀은 다 찧었느냐?” “쌀 찧은 지는 오래이나 아직 낟알 고를 키질을 못했습니다.” 오조가 주장자로 방아를 세 번 치고는 조사당으로 돌아갔다. 혜능은 야밤삼경에 몰래 조사당으로 가서 오조를 만났다. 오조대사는 행여 누가 볼까 가사로 혜능을 가려주고는 <금강경>을 읽어 주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대목에 이르러 말끝에 단박에 깨달았다(言下便悟). 이렇게 하여 일자무식한 나뭇꾼 혜능은 행자생활 중에 <금강경>을 듣고 활연대오하여 영원한 대자유인 부처가 되었다. 그 밤에 오조는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가져와 2조에게 전하여 3조와 4조를 거쳐 받아가지고 있던 가사를 혜능(惠能)에게 전하고 이름을 ‘혜능(慧能)’으로 바꾸어 주고 6조로 인가하였다(<조당집>). 오조는 육조가 된 혜능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가사는 앞으로 다툼의 원인이 될 테니 더 이상 후대에 전하지 말라. 달마대사께서 이 가사를 전하신 뜻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해서 표식으로 삼은 것이니,법을 듣는 일이 어찌 옷에 달렸겠는가? 만일 이 옷을 계속 전하면 생명을 해치게 될까 걱정이다. 너는 이제 남쪽으로 가서 3년 동안 숨어 지내라.” 오조는 이렇게 말하고 바로 육조 혜능을 안내하여 구강 나루터까지 가서 작은 나룻배에 올라 손수 노를 잡았다. 이에 육조가 “제가 노를 잡겠습니다. 깨닫기 이전에는 대사께서 저를 건너게 해주었지만, 깨치고 난 지금은 스스로 노를 저어 건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오조는 “소란 피우지 말라. 내가 만일 지치거든 그대가 나를 도와주고 그대가 만일 지치거든 내가 그대를 도와주면 된다.” 양자강을 다 건너고서 오조가 육조에게 말하였다. “잘 가거라.” 이것이 밤사이에 일어난 일로 행자 혜능이 깨치고 육조가 되어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오조사 대중은 아무도 이 일을 몰랐다. ㆍ지금의 오조사
    혜능이 오조 홍인대사를 만나 금강경을 듣고 돈오(頓悟)하여 육조가 된 호북성 황매현 오조사는 옛 그 자리에 그대로 도량이 남아 있다. 2005년 선원수좌회 선원장 스님들과 처음 오조사를 참배했을 때는 다소 쇠락한 모습이었다. 2007년 중앙신도회 불교인재원과 일간지 종교 기자단이 갔을 때는 게송 대결을 한 절 회랑 벽과 혜능이 일하던 방앗간도 복원해 놓았다. 1300여 년 전 조사들의 자취를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무식한 나뭇꾼 혜능은 오조사에서 8개월 만에 돈오하여 대자유인이 되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때 혜능의 나이 24세였다.
    불교신문 Vol 2900         박희승 조계종총무원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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