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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주 관음사

浮萍草 2013. 12. 7. 07:00
    탐라시대 전래된 불교 
    민간신앙 손잡고 마을의 안녕 발원…
      
    ▲ (左)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제주 관음사만의 독특한 길. 돌하르방을 닮은 수많은 부처님이 길 양옆에서 맞이해 준다.
    ▲ (中) 미륵대불과 만불단의 모습. 제주가 걸어온 슬픈 역사 속에 미륵부처님의 의미는 각별했을 것이다.▲ (右) 수많은 화마에도
    지역사찰 30여 곳을 관장하는 본사로 관음사는 제주불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 사찰에 토속신앙과 만남에 산신각이
    있다면,한라산 관음사에는 산신각뿐 아니라 제주
    만의 문화 속에서 방사탑이 있다.
    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조용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제주 관음사 (주지 성효스님) 일주문 앞에 섰다. 일주문 옆으로 ‘관음사와 4.3유적’ 관련 안내문이 있다. 읽고 있자니 절로 숙연해진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3일 일어났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 500명의 무장봉기가 발단이었다. 미군정은 이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간 첨예하게 대치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 관음사 도량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크고 작은 경계참호와 부대 숙영시설을 설치하였는바, 그 유적들이 보존되어 제주의 참극이자 민족의 비극을 증언 하고 있다. 관음사의 역사에는 이전에도 공백기가 있다. 조선 숙종때…200년간 폐사지 4ㆍ3사건으로 인해 ‘전소’ 제주만의 문화가 도량에 오롯
    일찍이‘절 오백 당 오백’이라 불릴 만큼 사찰이 많았으나 조선 숙종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부조리가 많고 잡신이 많다는 이유로 사찰 500곳과 사당 500곳을 폐사 시켰으며 관음사 역시 이때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사찰이 없었던 제주도에 안봉려관스님이 1912년에 관음사를 다시 창건한다. 관음사가 지금의 사격을 갖춘 것은 100여 년 안팎의 일이다.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영산전,해월각,사천왕문,일주문,종각 등이 차근차근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하르방을 연상케 하는 현무암 재질의 부처님이 양옆 으로 도열해 있어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근래에 재건된 사찰이지만 도량의 짜임새 있는 모습에서 조화와 상생을 느낄 수 있다.
    그 힘의 근원은 제주의 불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한반도에 귀속되기 전인 탐라국 시대이고 불교유입경로는 본토의 북방불교와 달리 해로를 통해 남방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음사는 불교전래 초기에 창건되어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바 제주의 여러 신화,전설,민담에 관음사를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개남절,동괴남절,은중절이라고 민간에 유포되어 전해온다. 구전에는 관음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는 관음사가 조천포구 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불교를 대변하는 관음사의 역사는 긴 여정을 거쳐 큰 강을 이루는 물줄기와 흡사하다. 흐르던 샘물이 자취를 감추는 듯하나 땅 밑으로 스며 흐르다 때를 만나면 다시 그 모습을 드려낸다. 오래전 제주에 뿌리내린 불교는 이 지역의 독특한 민간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면서 발전하였다. 사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법당 근처와 도량 곳곳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방사탑이 그것이다. 제주에는 예로부터 자기 가문이나 씨족 또는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크고 작은 돌탑을 쌓아왔고 탑 꼭대기에는 새의 모양이나 사람의 모양과 비슷한 돌을 세우는 풍속이 내려왔다. 관음사의 방사탑은 탑 꼭대기에 부처님법의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탑 위에 세워 제주의 민속신앙과 불교신앙을 융화하여 액난을 소멸하고 행운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해 세워졌다.
    불교신문 Vol 2779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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