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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곡사 김구명상의 길

浮萍草 2013. 7. 27. 07:00
    빼앗긴 나라·민족에 대한 고뇌 
    삭발염의 한 김구 선생 사색의 길
     
    ▲ (左) 흙길의 호젓한 백범명상길 제1코스다. 김구 선생은 언제나 변함없이 상록수를 바라보며 이 길을 수없이 거닐다 원종스님
    으로 거듭났다.▲ (右) 김구 선생의 흔적은 마곡사 곳곳에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형형색색 연등으로 장엄
    한 마곡사
    4월의 화려한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春(춘)마곡, 秋(추)갑사’라 했다. 봄은 마곡사가, 가을은 갑사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다. 충만한 봄볕의 기운을 받으며 마곡사를 가로 지르는 내를 건너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나란히 자리잡은 도량의 중심에 선다. 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는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 출가사찰이기도 하다. 생동하는 만물의 기운에 흥이 절로 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면 심장 한 켠에 간직해야할 날이 있다. 4월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다. 헌법전문은‘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을 계승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상해임정을 각처에 수립한 임시정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며 폄하하거나,대한제국에서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로 이어 지는 법통과 정통성을 무시하는‘건국절’ 만들기 움직임까지,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함으로 인해 남아있는 추악한 그림자가 아직도 이 땅에 꿈틀거리고 있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로 출가해 스님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알려졌지만 1년여에 걸친 수행자로서 모습은 온전히 조명받지 못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해방 직후 미군정 아래에서 이승만이 미국과 기독교 세력의 지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족진영 및 불교계와 가까웠던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소외시키는 과정에서 더욱 묻혀졌다”고 보고 있다. 출가 전 하동 쌍계사,공주 갑사,동학사 등을 거치며 은신했던 김구 선생은 이곳 마곡사에서 삭발염의하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으니,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 <백범일지> 초간본에는 백범의‘득도식(출가의식)’ 상황이 기록돼 있다. 사형사제 사이인 호덕삼 스님을 따라간 냇가에서“머리가 섬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한 일이건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마곡사의 명물인 마곡천과 징검다리를 굽어 볼 수 있으며,백범 명상길이 세가지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제1코스는 백범 선생의 기념관과 삭발터를 지나 군왕대에 오르는 2km가 조금 넘는 거리로 호젓한 산속의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제2코스는 트레킹코스로 적당하며 천연송림욕장과 백련암을 거쳐 활인봉과 생골마을을 돌아보는 5km의 길이며,제3코스는 앞의 두 코스와 등산을 포함한 10km의 풀코스다. 이 가운데 원종스님(백범)의 흔적을 따라 나서는, 소나무 오솔길이 인상적인 제1코스를 추천한다. 경내에 김구 선생을 기리는 백범당이라는 건물에 울림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해방 후 여러 동지들과 마곡사를 방문해 기념식수를 하고 지역사람들과도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백범의 뒤로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인사들이,오른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인사들이 서있다. 김구선생이 갈망했던 온전히 하나 된 조국의 큰 원력은 지금도 마곡사 도량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교신문 Vol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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