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26. 수행자의 표상 같은 물고기

浮萍草 2013. 10. 22. 07:00
    ‘청빈한’ 마음 ‘청아한’ 음성으로 佛法을 전하다
    목탁 추녀끝 불단밑 등 사찰 곳곳에 자리매김 오장육부 비운 木魚 소리, 무소유의 삶 일깨워
    파주 보광사 목어
    일되는 찜통더위는 한줄기 시원한 빗줄기를 갈망하지만 그것도 사람의 마음대로는 되지 않으니 자연 앞에 인간의 나약함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 같으나 인간 스스로 만물을 부리고 살려는 오만함 때문에 자연 환경은 더욱 황폐해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만연된 서양사조의 자연경시 사상은 결국 인간이 푸른 지구를 떠나야만 지구가 그나마 숨 쉬고 생명을 유지할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자신을 낮추며 겸허하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못쓸 짓을 한 경우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가 제일 심한 경멸의 말로 인식되었던 지난날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저 나만 잘 먹고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인식은 급기야 풀을 먹어야 할 소에게 소를 먹이는 죄악을 당연시하는 물질만능,편리 제일 주의가 결국은 인간을 회복할 수 없는 병자로 만들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인간 욕망의 불을 꺼주는 사찰 곳곳의 욕심 없는 조형들을 통하여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창방 뺄목.
    사찰의 곳곳을 살펴보면 흡사 물속을 여행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산중 사찰이 온통 물속임을 느끼게 하는 여러 가지 물고기 조형을 볼 수 있다. 천정 위,포 벽화,전각 문,추녀 끝,불단 밑,기둥 사이 등에 나타나는 수많은 물고기 형상을 여러 가지 조각과 공예품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장식은 물고기가 지니는 특성 때문이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고 늘 깨어있기 때문에 수행의 본보기로, 걸림 없이 헤엄치는 모습에서 번뇌를 끊은 자의 자유로운 생활로 보여 지기도 한다. 또 물속을 상상하게 하여 불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 화재를 미리 방지코자 바라는 염원도 담겨 있다. 사찰에서 제일 큰 물고기는 단연 목어(木魚)이다. 머리는 용의 형태에 몸뚱이는 물고기로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나 속은 비어서 오장육부를 버려 탐욕을 없앤 수행자의 청빈한 삶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새벽,저녁 예불시 그의 몸속을 두드려 비어 있음으로서 울리는 영혼의 맑음을 인간들에게 들려주어 비어 있는 삶의 즐거움을 소리로 나타내기도 하고 물속에 사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고통을 여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기원하기도 한다. 또 물고기는 풍경에 나타나 전각의 네 귀퉁이에 매달려 허공을 물속 삼아 하늘하늘 춤을 추니 그 소리는 번뇌를 벗어버린 듯 맑고 청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거운 일상의 짐을 벗어버리고 호젓함을 느끼게 하여 헐떡거렸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법당 안에 사는 물고기는 목탁이다. 목탁은 눈을 감지 않고 게으르지 않은 수행자의 모습을 나타내어 불교의식에 제일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불단에는 여러 가지의 물고기들이 있어 물속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에서 걸림 없는 삶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쌍을 이룬 물고기는 부부의 화합과 다산(多産)을 나타내어 가정의 행복을 부처님 전에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음악을 나타내는 범패를 어산범패(魚山梵唄)라 하는데,그 노랫가락이 물고기가 산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자연 스럽고 유연하여 물고기의 자유로움을 노래로 표현하여 수행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유연하게 내면을 관하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된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천정
    이렇듯 사찰에는 물고기의 상징적 의미를 더욱 해학적으로 표현한 곳이 많다. 먼저 예천 용문사 대장전 창방 뺄목 기둥에 조각된 물고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기둥을 뚫고 나와 머리만 빼곡 내민 물고기는 세상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린다. 정면 귀면과 측면의 청룡은 부처님의 법의 전각을 지키는 위엄이 서려 있지만 연꽃 밑에서 살짝 고개만 내민 물고기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동자 처럼 귀엽기만 하다. 손으로 잡으려면 기둥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부처님의 나라 연화장세계는 힘센 자나 약한 자나 함께 어울려 차별 없이 살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참배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전각 천정 반자에는 참으로 해학적이고 재미난 물고기 한 쌍을 만날 수 있다. 다산을 기원하는 조상들의 염원을 담아 조각한 한 쌍의 물고기는 교차한 푸른 연꽃과 붉은 연꽃에 기대어 선채로 부부애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한 쌍의 물고기는 서로 껴안는 듯, 입맞춤 하는 듯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해학성을 지니고 있다. 아예 머리 부분은 오히려 인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된 이 물고기는 부부의 정으로 물고기 알처럼 많은 자손을 가지게 부처님 전에 빌었던 간절한 염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계획적으로 관련성을 만들어 해학을 창조하는 조상들이 부럽기도 하다. ‘이리치나 저리치나 매한가지’라는 옛말이 빗댄 사물의 여유와 해학 속에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지혜를 가진 것 같다.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내부 포벽에 ‘이백기경상천(李白騎鯨上天)’이라는 글이 써 있는 그림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태백은 술과 달을 너무 좋아하여 강에 뜬 달을 잡으려하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상주 남장사 이백기경상천.
    그런데 왜 이 그림이 극락보전 내부 포벽에 그려져 있을까? 이백의 왕생극락을 바라며 고통의 험한 바다를 물고기 중 제일 큰 고래를 타고 건너면 피안의 극락에 도착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백의 뒤쪽에는 험한 이세상의 산수가 보이고 고래가 안간힘을 다 써가며 험난한 물살을 가르는데 정작 이백은 여름날 해변에서 파도타기를 하듯 구부린 자세로 신나한다. 머리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고래 지느러미 사이에는 이백이 좋아하는 술병을 끼고 열심히 극락으로 간다. 아마 이백은 극락에서도 곡차가 필요한가보다. 이것이 있어야 시가 술술 나오니 정말 주태백(酒太白)이라는 별칭이 어울린 듯하다. 사찰에서도 중생이 좋아하는 것은 방편으로 마련해두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푸근한가. 이것이 바로 불교미술에서 바라는 해학적 요소가 아닌가?
    파주 보광사 목어는 오장육부는 남김없이 버렸지만 그러나 그 수행의 기백은 하늘을 찌를 듯 위풍당당하다. 부릅뜬 눈, 고른 이빨의 용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는 듯 꼬리도 힘차다. 새벽녘에 온 산천을 울리는 목어의 용트림은 비움의 미학을 알려주려는 듯 쩌렁쩌렁하여 무소유를 일깨우는 부처님 음성이 탐욕에 찌든 인간의 영혼을 맑히는 청량제가 될 것이다. 여름 산사에서 새벽별을 바라보며 듣는 목어 소리에 수행자의 모습을 그리며 아직 우리민족 북녘 동포가 보릿고개도 넘기지 못하는 절박함을 생각하자. 목어를 통해 덜먹고 나누어 먹는 마음을 내보자. 동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반성해 보자. 목어의 소리를 들으면서.
    불교신문 Vol 2443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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