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25. 부처님의 중생사랑

浮萍草 2013. 10. 22. 07:00
    부처님은 중생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을까? 타 종교처럼 절대적인 믿음만 중요하게 여기셨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불교는 참으로 편안한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믿음만 옳다고 타인의 믿음을 사탄이나 이단시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존중하는 사상을 지니고 있어 좋다.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자애…“아름다워라”
    사찰 곳곳에 ‘토끼와 자라’ 등장한 전생담 그려 잘못 뉘우치는 대중, 피안의 길 이르도록 발원 거북보다 토끼 크게 장식, 사람의 존귀함 강조
    밀양 표충사 수미단
    <법화경>에 상불경(常不輕)보살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전생에 상불경보살로 모든 사람을 예배하고 찬탄하며 말하기를‘나는 그대 들을 공경하고 경만(輕慢)하게 생각하지 않나니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반드시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니라’하셨다. 비웃음과 욕을 들을 지라도 성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막대기나 돌로 때리면 피해 달아나면서도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길‘나는 그대들은 경만하게 생각하지 않나니 그대들은 모두 다 성불 하리라’하였다. 지금은 자신이 부처인줄 몰라 헤매지만 결국은 부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려준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절대자와 종속자. 조물주와 피조물 등등 상대를 하찮은 존재로 부정하는 형이하학적인 사상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부처와 중생이 오직 같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자타카>에 수없이 등장한다. 이러한 전생 이야기가 사찰 벽화나 건축 구조물,수미단에 등장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님은 중생을 이렇게도 사랑하시나’ 하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별주부전에서 토끼와 거북이 또는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윤색하여 엮은 것으로 부처 님께서 중생을 얼마나 사랑하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잡보장경> 큰 거북의 인연 편을 보면 데바닷다는 항상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다. 활을 잘 쏘는 바라문을 사서 활을 당겨 부처님을 쏘게 하였으나 그 쏜 화살은 모두 쿠뭇다꽃,푼다리이카꽃,파두마꽃,우트팔라꽃 등 연꽃으로 변하였다. 500명의 바라문은 이 신변(神變)을 보고 모두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그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우기를 청하자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여 그들은 모두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들은 부처님께 “부처님의 신력은 참으로 보기 드문 일입니다. 데바닷다는 언제나 부처님을 해치려 하지마는 부처님은 항상 큰 인자한 마음을 내셨나이다”고 사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만이 아니다. 옛날 바라나시 나라에 한 우두머리 상인이 있어 이름이 불식은(不識恩)이라 하였다. 그는 500명의 상인들과 함께 바다에 들어가 보물을 캐어 보물을 가지고 나오다가 물에 사는 나찰을 만나 그들의 배를 붙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여러 상인들은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외쳤다. ‘천신,지신과 일월의 여러 신들이여 누구나 우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이 액난을 구제하여 주소서’ 그때에 등 너비가 1리 나 되는 어떤 큰 거북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모든 사람들을 등에 업고 큰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거북이 땅에 다다르자 우두머리 상인 불식은은 큰 돌로 거북의 머리를 때려죽이려 하였다. 여러 상인들은 ‘우리는 거북의 은혜를 입고 어려움에서 나와 목숨이 살게 되었는데 그를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고 은혜를 모르는 일’ 이라 말하였으나 불식은은 ‘우리는 지금 굶주림이 급하다. 누가 그의 은혜를 묻겠는가?’하고 곧 거북이를 죽여 그 고기를 먹었다. 그날 밤중에 큰 코끼리 떼가 나타나 그를 밟아 죽였다. 비구들이여 그때의 그 큰 거북은 바로 지금의 이내 몸이며 그 불식은은 지금의 데바닷다이며,그 500명의 상인들은 바로 집을 나와 도를 얻은 그대 아라한이다. 나는 과거에도 그의 액난을 구해 주었지마는 지금도 그의 생사의 근심을 빼어 주느니라.” 전생에 부처님은 죽음과 고통의 차안(此岸)을 건너게 하는 거북으로 등장하여 자기 꾀에 빠진 토끼 같은 중생들을 안락의 피안 (彼岸)에 이르게 하는 중생 사랑 내용들이 벽화와 포벽,수미단,건축 가구에 남아 있어 업 많은 중생들을 보살펴 주신다.
    양산 통도사 명부전 벽화
    먼저 통도사 명부전 벽화를 보자. 부처님의 전생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벽화 이다. 위쪽 하늘의 누각을 나타내어 천신(天神)을, 아래쪽 뾰족한 땅을 지신(地神)으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을 그려 일월(日月)의 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사이에 등이 큰 거북이로 표현된 석가모니 부처님이 토끼로 표현된 500명의 상인을 고통과 죽음 에서 구하여 거북의 넓은 등 위에 태우고 안락의 세계인 피안으로 옮겨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피안으로 인도하는 거북의 4다리는 힘차게 고해의 물살을 가르고 넓적한 등위의 토끼는 정면을 향하고 두 귀를 쫑긋 세워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듯하다. 광경의 거룩함을 용왕이 증명이라도 하듯 피안의 길을 안내하며 입에서는 상서 로운 기운을 뿜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반야용선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의 현생 죄업을 참회하는 명부전의 내부 벽에 그려진 이 벽화야 말로 잘못을 뉘우치는 모든 중생들이 끝없는 즐거움이 펼쳐지는 극락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발원하는 의미가 담긴 특별한 불화이다. 또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 외벽 기둥위의 거북이와 토끼는 이곳이 극락인양 연꽃으로 가득한 공포 밑 안초공에 용머리 장식 대신에 거북의 등을 탄 토끼의 모습을 새겨서 이채롭다. 거북보다 토끼를 크게 장식하여 중생이 부처보다 존귀한 존재임을 실감케 하는 해학성을 나타내어 보였다.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거북의 4다리를 공중에 뜨게 부각시켜 연꽃이 만발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었고 사찰 즉 피안에 이르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한 몸인 것을 토끼와 거북이의 조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렇게 건축물 부재에 까지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나타냄으로써 부처님의 중생 사랑을 극대화 시켰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 공포 밑 안초공에 용머리 대신 거북이의 등을 탄 토끼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밀양 표충사 대광전 수미단을 보면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이상향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조각을 볼 수 있다. 몰아치는 고해의 파도가 너무 심하여 짐짓 거북이도 놀란다.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성난 파도에 놀란 토끼는 간이 오그라지는 듯 놀란 눈,쫑긋 세운 두 귀에 앞발로 거북등을 꼭 잡는다.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가? 그러나 거북은‘토끼야 나만 믿어라 힘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이 있으면 유토피아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듯 해학적인 표현이 재미 있다. 거북은 느리지만 유순하고 한가한 장수의 동물로 부처님을 상징하고 토끼는 급하고 인과(因果)를 살필 여유가 없는 나약한 인간을 나타내고 있지만 결국 부처님을 통하여 피안에 이른다는 교훈을 주는 사찰의 벽화와 수미단,건축물 부재의 안초공의 거북과 토기는 인간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밝히는 반면에 따듯한 자비로 이를 감싸 주는 자연스러운 한국적 해학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재미 있다. 부처님의 중생 사랑이 이다지도 커 자신을 해치려는 모든 무리들까지 자비로 감싸 안으며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거북 으로 표현되는 것 또한 이례적이고 해학적이다. 이러한 것처럼 불교의 부처님은 이런 분이시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든가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든 믿지 아니하든 차별 없이 오직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고 자비로 행복을 주신다. 신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중생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무명(無明)이라 경계하셨다.
    불교신문 Vol 2441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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