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6. 조각상에 담긴 존중사상

浮萍草 2013. 6. 4. 07:00
    잘 만들어진 조각은 그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느낌을 가져야한다. 때에 따라 숨 쉬는 숨소리도 들리는 듯 해야하고 불끈 쥔 주먹은 내리칠 듯 그 자리를 서둘러 피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조각은 사실적 생동감뿐만 아니라 해학성도 함께 지니고 있어 더욱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무엇 하나 만들어도 완성 후 그 대상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살아있는 조형물을 만들고자 노력 하였다. 조각가는 살아있는 조형물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관람자와 조형물간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심적 교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자-약자의 익살스런 모습서 ‘평등’을 보다
    표범과 동녀.학과 동자…‘음양의 조화’표현
    수원 용주사 효행박물관 소장 학과 동자
    ‘살아있는 조각품’이 화성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것도 재미난 해학적 요소를 듬뿍 지닌 채 우리들을 반겨준다. 용주사는 조선조 22대 정조 대왕이 비명에 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하여 세운 사찰로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 한을 풀어드리고자 사찰의 모든 건물을 작은 왕궁을 연상케 하는 구조로 지은 독특한 절이다. 효행박물관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느껴볼 수 있는 정조대왕의 친필, 부모은중경 목판 등 그 당시의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전시되어 효를 생각하게 한다.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00년 남짓 된 학을 안은 동자상,표범을 안은 동녀상이 바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조형물로 일반 관람객들은 이러한 의미를 생각지 않고 관림하게 되니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흥미 진지한,살아 숨쉬는, 서로의 신경전으로 긴장감이 감도는 예측불허의 상황이 전개될 듯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입가의 미소를 머물게 한다. 먼저 학을 안은 동자상부터 살펴보자. 사찰에서 동자(童子), 동녀(童女)란 절에 들어와서 불교를 배우지만 아직 출가하지 않은 어린아이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천진난만하여 이미 성불을 한 상태로 보아 천진불(天眞佛)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동자는 부모 떠난 그리움에 품에 안긴 학을 오랫동안 안고 싶어 하지만 학은 갇히는 것이 싫어 동자의 품을 벗어나려고 날개를 활짝 펴서 날고자하는 의사 표현을 한다. 그러나 동자는 떠나보내기 싫어 학을 안은 두 손에 꼬옥 힘을 준다. 그렇다고 학이 물러설 리 없다. 아무리 자연과 벗하는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구속당하는 것은 정말 싫다. 이젠 놓아주기를 원하는 학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학이 목을 돌려 동자의 오른쪽 귀를 긴 부리로 물어버린다. 이정도 되면 동자가 놓아 줄 법도한데 동자 고집 또한 대단하다.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아랫입술을 윗니 2개로 물며 아픔을 참으려고 하니 그 볼에 예쁜 보조개가 들어간다.
    수원 용주사 효행박물관소장 표범과 동녀.
    튀어나온 2개의 흰 이빨이 앙증맞도록 귀엽다. 그리고 다시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시 학은 날개를 퍼덕이며 동자의 품안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길 200년이 넘었다. 앞으로도 이 힘겨루기는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 다툼은 부처님도 웃으시지 말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동자와 학의 다툼에서 보는바와 같이 누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 각각 불성을 지닌 평등한 자아를 느끼고 살아있음을 증명케 한다. 이 동자상에서 베어나는 조상들의 지혜가 참으로 재미나고 기발하다. 어디 곳에서 이렇게 살아있는 동자와 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용주사가 아니면. 이뿐만 아니라 그 옆의 조각을 보면 살상투를 튼 동녀가 표범의 앞 양발을 가볍게 들고 있다. 깜찍한 표범은 재미난 듯 신난 듯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해죽 웃는다. 달랑 매달려서 뒷다리 오른발을 동녀의 옷자락에 걸치려고 바둥거린다. 너무나 귀여운 표정이다. 푸른 두 눈과 눈동자, 뭉뚱하고 붉은 코, 희고 고른 이빨에서 흘러 나오는 미소 어느 것 하나 해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맹수의 무서움과 두려움의 위엄은 사라지고 애완동물 강아지 인양 들려있으면서도 좋아라하는 모습은 차라리 표범이길 포기한 모습이다. 우리 조상들은 두려운 것에 대하여는 더욱 친근하게 가깝게 두어 두려움을 잊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학성을 강조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차별 없이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 조형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였다. 표범이 무섭다고 느껴서 경계의 대상으로 느끼면 이 표범 또한 인간에게 적대감을 일으켜 서로 불안해하였을 것이다.
    해남 미황사 명부전 오도전률대왕
    그러나 이 조각에서 보는바와 같이 표범과 인간은 서로 친구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연과 하나 되는 불교의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천진불의 세계를 이 조형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만약 동자가 표범을 들고 동녀가 학을 안고 있었다면 어떨까?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다. 동자인 남성과 힘센 표범과의 관계는 힘의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면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힘의 우위를 겨누기 위해서 한바탕 날 리가 벌어질 것은 것이고 또한 동녀가 학을 안으면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 힘센 것과 약한 것이 함께하는 조화는 보는 이가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이러하듯 음양의 조화까지 생각하여 조각한 우리조상들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해학은 대상 간 서로 평등함을 느껴야 한다. 누구는 우위에 있고 누구는 밑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존재가치로서의 평등함을 말한다. 또한 남도의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 명부전에는 또 하나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옥대왕 발밑의 현무, 깨물며 분풀이‘통쾌’
    사찰에서 명부전은 지장보살님의 힘으로 지옥에 빠진 중생들을 천도하여 극락으로 인도하기위해 세워진 전각으로 미황사 명부전은 선비이자 화가인 윤두서가 아들을 얻기 위해 직접 조성하여 모셨다는 목조 지장보살님과 그 권속인 시왕(열 분의 지옥 대왕)이 계신다.
    그런데 시왕 중 한분인 제10 오도전륜대왕이 지옥죄인의 마지막 재판을 관장하려는 듯 근엄하게 용좌에 앉으셨다. 화려한 곤룡포 속에 가만히 보니 오른발이 약간 들려 있다. 무릎위에 젊잖게 오른손을 얹어두셨다. 그런데 오른발을 누르려는 듯 손으로 무릎을 누른다.
    오도전륜대왕 발밑 현무
    양발에 차이가 날까? 자세히 살펴보니 글쎄 대왕의 발밑에 거북이인지 현무(玄武)인지 정체를 알기 어려운 한 마리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있지 않은가? 대왕이 현무의 등을 지그시 밟는다. “지금 마지막 재판 중이니 가만히 있으라.” 고 그러나 지옥대왕의 발밑에 눌려 있을 현무가 아니다. “아무리 지옥대왕이라도 그냥 있을 수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명색이 현무인 나를 밟아? 내게 꼭 시비를 걸어서 야단이야!” 목을 길게 빼서 흰 송곳니로 대왕의 발을 야무지게 물어버리며 분풀이를 한다. 통쾌하다. 박수라도 치고 싶다. 약자라 하더라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는 해학적 특성을 알고 있는 것 같다.
    1:1 무승부다. 아무리 위엄을 갖춘 대왕이라도 통쾌하고 쌤통이다. 대왕 체면에 소리도 못 지르고 얼굴엔 그저 미소만 흘린다. 지옥대왕의 발을 물어버리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였을까 우리 조상들은? 이러하듯 사찰의 조형물들은 하나하나 잘 살펴서 보면 참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모든 것 하나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가치를 느끼게끔 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조형물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인식하여 조상의 삶과 함께한 조상들의 생명 존중사상에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불교신문 Vol 2402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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