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세종’이 절을 살리다
잘되면 내 탓,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다.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 속에는 조상님이 내 DNA를 시원찮게 물려주셨다는 푸념도 섞여있지만,그보다는 죽은 조상이 복을 제대로
안내려줘 내 팔자가 안 풀렸다는 원망이 더 크게 깔려 있다.
조상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선대의 영험을 제대로 받기 위해 묘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믿음 때문에 이장(移葬)이 빈번히 이루어지는 형편인데,풍수지리설이 종교 그 이상의 종교로 군림하던 조선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종의 영릉(英陵) 이장이다.
세종이 죽고 난 직후부터 조선 왕실에는 흉흉한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연달아 터진 흉사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왕의 큰아들이란 큰아들은 모두 요절했다는 것이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큰아들 단종은 삼촌에게 살해당하고,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는 자다가 갑자기
급살을 맞아서 죽었다.
또한 예종 또한 재위 1년만에 죽고, 예종의 큰아들 인성대군도 태어난 지 3년만에 요절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야,태종이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세조가 조카를 죽인 업보를 후손들이 고스란히 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ㆍ세종 사후 장자들의 잇단 요절
세조가 아버지 능 여주로 이장
명당 덕분에 능침사도 보전돼
게다가 세종의 능지(陵地)는 이미 세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말이 나온 터였다.
소헌왕후가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자신이 묻힐 자리로 태종의 능(헌릉) 바로 옆자리를 택했다.
신하들이 수맥이 흐르는 흉지라고 만류하자,세종은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부모 곁에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며,왕비의 능 바로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마련했다.
이후 장자들의 죽음행렬이 계속되자,세조는 왕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세종의 능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주 봉미산 자락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을 찾아냈다.
영릉은 ‘명당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명당으로 꼽힌다.
어떤 풍수가들은 이곳을 일컬어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능을 감싸고 있는 형상[飛鳳抱卵形]이라 하고, 어떤 풍수가는 모란 꽃
봉오리로 둘러싸인 형상[牡丹半開形]이라 일컬으며,어떤 이는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보는 형상[回龍顧祖形]이라고 말한다.
수식어야 어찌 되었든,영릉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왕릉을 폭 끌어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풍수지리의 문외한조차도 명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묘 자리를 잘 쓴 덕분인지,어쨌든 조선왕조는 세조 이후에도 40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정희왕후는 영릉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신륵사를 영릉의 능침사로 삼고 절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라고 고쳐지었다.
남한강이 굽이굽이 돌아흐르는 길목,하얀 백사장과 푸른 물결, 드넓은 평야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에 신륵사가 위치해
있다.
이런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절이 조선시대에 폐사되지 않고 잔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명산대찰이 깊은 산골짜기에 남아있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산에만 절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평지에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절들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생들에 의해 폐사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료에는 유생들이 능침사에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거나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이때마다 왕실에서는 그 유생을 잡아다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죄명은 바로 ‘왕실모독죄’였다.
만일 신륵사가 세종의 능침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폐사되어 양반가의 별장이 되었거나 향교나 서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명운을 연장해준 영릉의 능침사로 지정된 덕분에 신륵사의 명운 또한 함께 연장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세종대왕 묘 자리를 잘 쓴 덕택이었으니 영릉의 음덕을 가장 크게 입은 이는 바로 신륵사 부처님이 아닐까 싶다.
■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불교신문 Vol 2871 ☜
草浮 印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