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13 동학사

浮萍草 2013. 4. 24. 07:00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을이 되면 항상 그리워지는 사찰,계룡산 동학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절(忠節)의 표상이었다.
    동학사 초입에 위치한 숙모전은 김시습이 사육신과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사육신이 죽은 그날 밤,김시습은 그들의 
    시신을 노량진에 암매장한 뒤 그 길로 동학사로 내려가 초혼제를 지냈다. 
    몇 년 뒤 단종이 죽자, 사육신의 제단 위에 단종의 위패를 모셨다. 
    김시습이 한양에서 동학사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것은,동학사에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종의 죽음은 조선왕조에 너무도 많은 불행을 가져왔다. 
    어린 아들 단종은 숙부에게 살해당했고,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끝내 죽임을 당했다. 
    청상과부가 된 단종비 정순왕후와 경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희대의 패륜아로 낙인찍혔고,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조선의 충신들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결과적으로,그 시대를 살아간 자,그 시대에 죽어간 자,그 시대에 살아남은 자들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 중에는 패륜아의 휘하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세상을 버리겠노라 선언한 이들도 있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살아남은 여섯 충신’이라 하여 생육신이라 불렀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매월당 김시습이다.
    
    ㆍ신라 충신 박제상 아래로
    고려와 조선의 충신들이
    시대의 한을 내려놓다
    다섯 살 때부터 천재라는 명성이 자자해,세종이 친히 불러 비단 한 필을 상으로 내리고 혼자 힘으로 들고 가라 하자 그 비단을 허리 춤에 묶고 끌고 나갔다던,그 영특함에 놀란 세종이 부디 잘 커서 조정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했던 천재소년. 그러나 소년이 과거를 치를 만큼 장성했을 무렵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했다. ‘ 충신은 두 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그는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이름의 스님이 되어 전국을 방랑했으며, 수많은 설화와 전설,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성삼문유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1456년 박팽년,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일이 발각되어 죽자,김시습이 밤중에 사육신의 유체를 노량진에 암매장하고, 계룡산 동학사로 와서 삼은각 옆에다 단을 마련하고 사육신의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세조가 속리산에서 온양온천에 행차하던 길에 이 절에 들러 삼은각을 둘러보다 초혼각을 발견하고는 계유정난 때 희생된 원혼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성삼문유집>에 남아있는 이 기록들을 모두 믿기는 힘들다. 적어도 단종이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세조가 사육신을 추모했다거나 사육신의 충절을 인정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설화가 생겨난 것은 후일 사육신과 김시습에 대한 일화들이 각색되고,세조의 참회 부분이 첨가되면서 생겨난 결과라 생각 된다. 동학사는 원래 이름은 청량사였다. 신라가 망한 뒤 고려의 개국공신 유차달이 박혁거세와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東鷄祠)를 이 절에 지어졌는데, 이후 절 이름 또한 동학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눌지왕의 두 아들을 적국에서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땅에서 죽어간 신라의 충신 박제상. 길재가 정몽주의 위패를 모시고 이 절에 온 것 또한 박제상의 사당이 이곳 동학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의 위패 옆에 이색과 길재가 나란히 안치되면서 삼은각이라는 사당이 마련되었고,그 옆에 사육신과 단종을 기리는 초혼각이 설치되면서 동학사는 충성과 절개를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다. 후일 초혼각은 숙모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이 많은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들은 동학사에서 단종의 핏빛 슬픔을 보고,어떤 이들은 김시습의 통곡을 듣고, 어떤 이들은 누더기가 된 세조의 마음을 읽는다.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욕망과 비애를 느낀다. 그 중 일부는 역사로 남고, 일부는 전설로 떠돌며, 또 아주 많은 부분은 세월 속에 묻혀 잊혀 간다. 동학사에 뒹구는 낙엽들이 계룡산의 일부가 되어 가듯이.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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