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스승과 제자

7. 시탄 스님의 제자 사랑

浮萍草 2013. 4. 16. 07:00
    6개월 정성으로 살린 청년 조선후기 최고 강백 만들어 
    재능이라곤 없던 시탄 스님 생명 꺼져가는 청년 살려내 제자 지책은 그 스승 입적 후 3년상 치르며 ‘관음보살’추앙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선 영조 때 일이다.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자락 남장사(南長寺)에 시탄(時坦)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다 평범한 외모, 기예와 재능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분이었다. 늙수그레한 나이에도 마당 쓸고 걸레질하는 게 그의 일과였고, 낡은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그에게는 나무하고 등짐 지는 궂은일도 “이것 좀 하시오” 한 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숱한 이들의 ‘이래라저래라’에도 도통 말이 없고 그저 순한 웃음만 달고 살았기에 같은 절 스님들도 “스님”이라 부를 뿐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어느 늦은 가을날,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며 약관을 넘긴 선비 하나가 남장사를 찾았다. 단출한 행장에 걸음이 조용조용한 선비는 하룻밤 묵어가길 청하였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서울로 가는 길입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 붓으로 그린 듯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맑았지만 흐리는 말꼬리에 남모를 수심이 가득했다. 주지스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객실을 열어주었다. 그 밤 내내 찬비가 그치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알리는 목탁을 치고 방 앞에서 헛기침을 해도 객실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독이 깊은가 보다 싶어 넘겼지만 정오가 되도록 방문은 열리질 않았다. 주지스님은 작은 소반에 따로 상을 차리라 하고 시탄 스님에게 들려 객실을 찾았다. “계십니까?” “……” 세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벌컥 방문을 열어도 드러누운 청년은 미동도 없었다. 급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 이마를 짚어본 주지스님은 깜짝 놀랐다. 밤새 쏟아낸 듯한 설사가 방바닥까지 흥건하고 온 몸이 불덩이였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흔들어보아도 청년은 가는 신음소리만 낼뿐 의식이 없었다. 주지스님은 다급히 시탄 스님에게 명하였다. “자네, 얼른 가서 따뜻한 물 좀 가져오게.” “네, 스님” 시탄 스님은 따뜻한 물을 가져다 수건에 적셔 청년의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고, 혹 한기가 들까 싶어 든든히 군불을 지폈다. 그리고 자신의 마른 옷을 가져다 갈아입히고 새로 이부자리를 깔아 청년을 눕혔다. 곁에서 청년의 행장을 뒤져보던 주지스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봇짐엔 버선 두 짝에다 책 서너 권뿐이었다. “노자 한 푼 없이 길을 나섰구먼. 어디 사는 누군지 알 길이 없으니.” 허리춤을 풀러 돈을 꺼낸 주지스님이 시탄 스님에게 일렀다. “허약한 몸으로 그 비를 다 맞았으니, 아무래도 추독리(秋毒痢)지 싶네. 자네가 가서 약을 지어오게나.” “네, 스님.” 의원까지는 십오 리 길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시탄 스님은 곧바로 삼십 리길을 달렸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약을 달였다. 하지만 약 한 재를 다 복용하도록 고열과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주지스님은 시름이 늘어졌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집을 찾아 연락을 하지.” 빠듯한 절 살림에 약을 더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혀만 차던 주지스님은 결국 시탄 스님에게 부탁하였다. “어찌되었건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정성껏 보살펴주게.” “네, 스님” 시탄 스님은 청년을 자기 방으로 옮기고 애기 돌보듯 보살폈다. 겨우 입만 벌리는 청년을 끌어안고 세끼 미음을 먹이고, 시도 때도 없는 똥오줌을 다 받아내고, 한밤이 되어서야 곁에서 새우잠이 들었다. 그 잠도 청년의 신음소리에 놀라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용케 청년은 죽지 않고 차츰 기력을 회복하였다. 6개월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청년의 몰골은 참혹했다. 고열과 오한에 시달려 온 몸의 뼈마디가 불거지고 머리카락은 돌돌 말려 더 이상 빗질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바로 뜨고 앉을 수 있게 되자 청년은 옷깃을 가다듬고 시탄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님, 저는 응문(應文)이라 합니다. 고향은 상주(尙州)에 아버지는 흥양(興陽) 이공(李公), 어머니는 의령(宜寧) 남씨(南氏)이십니다.” “명문가 자제셨군요. 그래, 어디로 가던 길이었습니까?”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서당을 다니고 열심히 독서하여 견문을 넓히려 나름 애는 썼지만 늘 미진해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단 몇 개월만이라도 서울의 이름난 선비 문하에서 수학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정을 일구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뜻을 꺾을 수 없어 미처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이제 기력을 회복했으니 서둘러 길을 나서십시오. 부디 큰 뜻 이루시길 바랍니다.” “스님, 이젠 저의 소원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출가하고자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만 승려의 길이 그리 만만하질 않답니다.” “자질과 재능이 본래 덧없는 것임을 깨달아 헛된 욕망과 분노에 시달리지 않는 게 자질을 가다듬어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시탄 스님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출가하십시오. 제가 훌륭한 스승을 소개해 드리리다.” “저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시탄 스님이 손사래를 쳤다. “저는 일자무식꾼에 가난뱅이랍니다. 당신을 직접 가르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학비를 대줄 능력도 없답니다.” 청년은 재차 절을 올리며 간청하였다. “이미 끊어진 저의 생명을 다시 이어주셨으니, 스님께서는 저의 어버이십니다.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청년은 출가해 시탄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후기 영남의 강단을 이끌었던 충허당(虛堂) 지책(旨冊)대사이시다. 훗날 시탄 스님이 열반하시자 지책 스님은 삼년상을 모시며 이렇게 회고하였다. “은사스님은 가련한 나를 구제하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찾아오신 관세음보살이셨다.”
    Beopbo Vol 1184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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