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서양문화 속 불교코드 읽기

뉴욕의 별이 빛나는 밤이 나를, 꿈꾸게 만들었다

浮萍草 2013. 3. 10. 07:00
    욕에 도착했을 때, 미학과 후배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주었다. 자동차를 타고 뉴저지로 가는 동안,후배는 여기가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이고 여기가 할렘이고 저기 보이는 불빛이 뉴욕의 마천루 라고 열심히 설명해주었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에 익숙한 나에게 뉴욕은 그저 그런 대도시에 불과했다. 후배의 집이 위치한 뉴저지의 중산층 주택가에 도착했을 때,집집마다 문 앞에 세워진 오색등으로 깜박이는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 를 보면서 비로소 미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후배 말처럼 미국 중산층의 공허한 키치적 취미를 목격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뉴욕이 그 진가를 보여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음날 후배가 쥐어준 지하철 티켓과 휴대전화기를 들고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았다. 하루 종일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녔지만 겨우 이집트관 하나만 관람할 수 있었다. 유물이 넘쳐나도록 많아 나중에는 지쳐서 건성으로 지나쳤을 뿐인데도 말이다. 어찌 보면 한 미술관이 그렇게 많은 유물을,그것도 다른 나라 유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잘 보여 주는 예도 없겠지만,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쏟아지는 그림과 조각,유물들 앞에서 나는 책에서만 보던 것을 원작으로 보는 즐거움과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한다는 욕심에 그런 비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미술관 기행은 뉴욕현대미술관(MoMA),휘트니미술관,구겐하임미술관,브루클린미술관, 프릭콜렉션 등등으로 이어졌고,그림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즐거워 때로는 배고픔도 잊고 때로는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마감시간에 쫓겨 나오기도 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런 것처럼 뉴욕이 아름다운 건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의 위용과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화려한 여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어딘가 숨어있는 미술관 때문이리라.

    미술관을 갈 때마다 나는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복제기술이 정교해도 원작의 색감과 형태,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원작이 주는 감동은 딱히 그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원작에만 있는 뭔가 특별한 것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지만 나는 화가의 혼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린왕자에게 건넨 여우의 말처럼 비밀은 “아주 간단한지도” 모른다. 겉만 보는 사람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그림과 모자 그림을 구분할 수 없듯이 원작과 복제품의 차이를 알 수 없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단다. 근본적인 것은 눈에 안 보인단다.” 나를 비우면 그림은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면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선입견을 다 던져버리고 그저 그것이 주는 느낌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 중에도 가장 빛나는 별이 있듯이,뉴욕의 숱한 미술관에 걸려있는 수많은 명작들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빛 나는 별은 고호의‘별이 빛나는 밤’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 가난하고 불행했던 화가는 그가 만난 시골 사람들,그가 머물렀던 카페, 나지막한 들녘과 심지어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도 가장 깊이 공감하고 일체가 될 때까지 자신을 소진시켰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끔찍한 가난과 고독뿐이었지만 그의 그림에는 치열하고 진지한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묻어나온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다. 그러나 ‘별이 빛나는 밤’의 특별함은 그 모든 것을 능가한다. 고호의 그림은 책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었지만 그날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본 것은 내가 알고 있던 그 그림이 아니었다. 현대미술관 5층 전시실은 후기 인상파와 입체파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다가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림 주변에는 미술관 교실 강사인지 젊은 동양계 여성이 유창한 영어로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청강생들은 그 앞에 둘러 앉아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아, 이 그림!”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도 젊은 강사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알고 있던 그림이지만 처음 보는 것 아니 그림이 거기 있을 뿐, 그림을 보는 나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생각도 멈추고 시간도 멈추었다. 그저 커다란 검은 밤하늘에 쏟아질듯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선정에 든 듯, 사위는 고요했고 우주는 침묵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고호가 기대어 있었던 그 창가에 서 있었다. 화가는 깊은 밤 우연히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었을 것이다. 불현듯 시간이 멎고 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인다. 하늘과 땅은 거대한 보금자리가 되어 작은 마을을 품고 있고, 우주의 조화인양 별 빛 아래 마을은 포근히 잠들어 있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고통스러웠던 그의 영혼이 찢겨져 나가기 전 화가에게 섬광과 같은 짧은 휴식이 찾아왔다. 일생동안 찾아 헤매었던 고요와 휴식이 거기에 있었다. 화가는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그 침묵과 적정은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어 지금 내 앞에 반짝이고 있다. 선정과 같은 상태에서 억지로 깨어나 다른 그림을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나는 아무 그림도 볼 수 없었다. 눈 뜬 장님처럼 내 앞의 그림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롯한 하나의 마음만 거기 있었다. 자석이 이끌리듯 다시 ‘별이 빛나는 밤’ 앞으로 돌아왔다.

    단 하나의 예외는 모네의 ‘수련’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닌 나의 눈에 들어온 유일한 그림이었다. 여름에 다시 모마를 찾았을 때 나는 일부러 ‘수련’ 쪽으로 먼저 다가갔다. 필시 ‘별이 빛나는 밤’은 다시 나를 몰입시킬 테니 나머지 것을 제대로 보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모네의 수련 앞에서 나는 또다시 깊은 선정에 빠져들었다. 호수에 비친 하늘과 구름처럼 나는 모네의 그림에 비춰지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루 종일 미술관을 다니느라 지친 나의 심신이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한참을 앉아있었을까, 문득 ‘별이 빛나는 밤’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몸을 움직여 찾아갔다. 분명 그림이 있었던 장소에 왔는데, ‘별이 빛나는 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런 일이!” 경호원에게 물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어디로 가버렸나요?” 그는 다른 그림을 가리키며 저것도 고호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오! 그 어느 것도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것은 없어요.”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그림을 보여주면서 9월이면 돌아올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작품 중,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만고궁미술관에서 본 송대 산수화와 붓글씨뿐이다. 아마도 그 작품들이 삶과 우주의 본질에 가장 깊이 다가갔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 서양화 중에서 선적 경지를 묘사한 그림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과 모네의 ‘수련’을 들겠다. 비록 그들이 불교를 몰랐을지라도. 오늘 밤도 기숙사 나의 방 창가에 별이 빛난다. 기다리던 9월이 다가왔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만든다.” 어디선가 고호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명법 스님(미국 스미스칼리지 박사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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