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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과 불교

浮萍草 2013. 3. 24. 07:00
    보이는 세계 너머의 세계를
    찾아간 모더니즘 작가들 
    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바히야야, 너는 훈련해야 한다. 본 것에는 본 것만 있고, 들은 것에는 들은 것만 있으며 감각한 것에는 감각한 것만 있으며 인식한 것에는 인식한 것만 있다. 이것은 네가 반드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바히야야 네가 ‘그것에 대해서’를 가지지 않는다면 ‘거기’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바히야야, 너에게 ‘거기’가 없듯이 ‘여기’나 ‘그것을 넘어’나 ‘그 사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질병의 치유이다.” 모더니즘 이전까지 서양회화는 눈이 본 것을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본 것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생각한 것을 재현했다. 따라서 순수하게 눈이 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은 아직 제기되지 않고 있었다. 19세기 사진술의 등장은 이처럼 자명하다고 여겨진 ‘보이는 것’에 대한 회의를 낳았다. 대상을 그림보다 더 정확하게 재현한 사진은 지금까지 ‘재현’에 대한 회화의 독보적 지위를 위협했으므로 화가들은 무엇이 회화의 본질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발견인 선원근법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화면에 재현하는 기법이지만 실제 눈이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각되었다. 선원근법은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실점을 갖는 고정된 시점을 통해 대상들에게 질서와 통일성을 주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 눈의 지각 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눈이 본 것에 대한 진실한 재현이 아니라 수적 비례에 따라 눈이 본 것을 왜곡하는 주관적이며 관념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화가들은 눈이 지각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회화의 관심은 ‘재현된 대상의 의미’에서‘지각 의 문제’로 이동했다. 그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끈기 있게 이 문제에 도전한 화가는 모네와 세잔이다. 그들은 어떤 선입견도 없는 순수시각으로부터 자연의 본질을 발견하려 했다. 한 사람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에 반사된 이미지들에서 시각적 진실을,다른 한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있는 생 빅토와르 산과 사과와 같은 정물에서 자연의 변치 않는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메를로퐁티가 지적하듯 세잔은 순수지각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근원적인 ‘존재’를 보여주고자 했다. 모네가‘보이는 것’즉 주관의 현상에 집중했다면 세잔은‘보이는 것’에서‘보이지 않는 것’즉 자연에 감추어진 존재를 보여주고자 했다. 세잔은 이 ‘순수지각’으로부터 자연의 본질이 확고하게 드러나는‘순수형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이었다. 세기말의 혼란과 불안,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 다음 세대 화가들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일시적이고 오염된 ‘보이는 세계’ 너머 근본적이고 순수하며 영속적인 무엇을 찾으려 했다. 세기말의 도덕의 타락과 세계대전의 참혹한 인간 파괴는 신의 창조와 권능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고, 칼 융이 지적하듯 기독교는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이 시대의 정신성에 대한 요구에 응답한 것은 신비주의였다. 신지학은 1875년 러시아 태생 미국인인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헨리 올컷이 창립한 신지학회를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것은 서양 여러 신비주의 전통에 인도의 베다와 힌두교 불교 등이 혼합된 새로운 형태의 것이었는데 인격신을 거부하고 인간이 정신적 진화과정을 통해 물질적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주적 의식에 도달하며 인간의 영적 진화에 맞추어 사회도 고차원적인 형태로 진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 역사의 주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동양사상은 신지학을 통해 우회적으로 서양문화에 침투했는데,불교 ‘열반’은 물질이 사라진 순수한 깨달음의 경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너머‘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실재와의 조우로 이해되었다. 불교의 공과 연기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불교가 서양문화에 파급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신비주의가 추상회화에 준 영향은 그 동안 형식주의 비평가에 의해 간과되었지만 모더니즘은 신비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추상회화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모색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보이는 세계’ 너머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다시 말해 근원적이며 순수한 실재를 발견하려는 정신적인 추구로부터 발생했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신비주의와 관계를 가졌는데,말라르메,아폴리네르,엘리엇,예이츠 등의 시인과 칸딘스키, 몽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화가가 그러하다. 그 싹은 세잔의 회화세계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곧 순수지각이란 현실과의 관계를 단절한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행위이며 그 자체로 순수하게 정신적이며 비의적인 것이다. 기존의 정신성은 종교적 교의나 형이상학적 의미에 연관되어 있었지만,모더니즘의 정신성은 그런 의미를 배제한 순수한 내적 체험 과 연관되기 때문에‘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의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은 궁극적으로 예술의 초월성과 정신성에 대한 요구와 연관되어 있다. 아래 그림들에서 우리는 서양회화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세잔의 순수지각으로부터 보이는 세계 너머로 주관화되는 과정이다. 이 주관화는 외적 대상의 재현을 거부하는 추상화로 나아갔다. Hock-Jiuan Heng가 지적하듯 서양의 공간인식은 현상의 배후에 본질의 존재를 가정하는 형이상학에 의해 결정되며 이 때 본질은 플라톤이 규정했던 것처럼 형식,다시 말해 기하학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사물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구상화의 공간구성의 틀이 기하학인 것과 마찬가지로‘보이는 것’의 구체적 내용을 제거한 추상화 또한 기하학적 형식으로 구성된다. 화면이 ‘보이는 것’에서‘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변화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뿐 아니라 세잔느가 자연을 원통형,구,원추형 으로 보라고 했을 때에도 그 기초는 기하학이었다. 마치 서양철학에서 진리는 내용이 없는 논리학인 것처럼 재현적 내용을 거부한 추상화에 남겨진 것은 순수형식이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서양화를 구상에서 추상으로 추동시킨 힘이 볼링거가 말한 추상충동이 아니라‘보이는 세계’너머‘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탐구라는 사실이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우리는 불교적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개념적 구성에서 벗어난 순수지각을 찾으려는 시도는 비록 불교에 의해 촉발된 것은 아니지만,서양문명의 토대인 이성 중심주의 에서 벗어나 주관의 인식 자체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그로부터 회화의 관심이 객관세계의 재현으로부터 주관의 정신 성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그것은 장차 불교가 서양문화에 이식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은 서양 형이상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아직 ‘여기here’와 ‘저기there’ 그리고‘그 너머beyond’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명법 스님(미국 스미스칼리지 박사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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