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서양문화 속 불교코드 읽기

근대에 대한 서양의 좌절과 절망 그 상실의 자리에 들어선 불교

浮萍草 2013. 3. 3. 11:02
    양이 동양의 존재를 알았던 것은 그리스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동양을 타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말하자면 계몽의 시대에 인간이 비로소 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주체,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한 이후이다. 이 자각은 객체로서의 타자를 지배하고 계몽해야 할 소명을 그들 자신에게 부여했으며,그 결과 지리상의 발견으로부터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그리고 포스트콜로니얼 시대까지 이어지는 서양 근대사는 지구 곳곳에 자기 세계를 확충하려는 광폭한 의지로 관통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의지의 실현을 위해 타자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양이 서양을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서세동점(西世東占)’의 현실적인 위협이었다면 서양이 동양을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무(無)의 심연이었다. 만남은 오해와 충격,공포와 갈등,그리고 충돌과 침략으로 이어졌고 현실은 서양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주체로서 자아,지배자로서의 서양은 객체로서의 타자,피지배자로서의 동양을 필요로 하였고,자기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타자의 존재 역시 더 강하게 의식되었다. 일찍이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이 관계를 꿰뚫어보았지만,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계몽과 진보를 믿었던 근대의 기획이 좌절되고 인간 이성의 허실함과 기만이 드러난 후,그 비극을 경험한 전후 세대인 사르트르에게 그것은 “타자는 지옥이다”는 절망 으로 바뀐다. 그들이 동양에 투사시킨 비이성과 열등함,두려움과 당혹함은 사실 그들 자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그 상실의 자리에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무신론의 종교이며‘무의 숭배’이자 소멸을 갈망하는 허무주의 종교로 오해되었던 이 종교는 이제 그 자비 와 관용,그리고 비폭력성으로 서양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극적 변화가 이루어졌는가? 사실 오래전부터 동양은 서양에게 공포와 위험,그리고 알 수 없는 매력과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서양 근대의 찬란한 역사 뒤편에서 서양이 짝사랑한 동양을 만날 수 있는데,계몽사상가 볼테르는 공자에 의해 계몽되었고, 쇼펜하우어와 헤겔에게 그 당시 소개되었던 불교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19세기 유럽 귀족의 거실 한 구석은 늘 중국 도자기가 차지하고 있었고 수많은 서양화가들이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 짝사랑 역시 주인집 도령이 하녀를 짝사랑하듯 자기 우위를 기반으로 한 왜곡된 사랑이었음이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해 밝혀진지 벌써 오래다. 그렇다면 지금 서양에서 불고 있는 불교 열풍 역시 또 하나의 이국취미,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 아직도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그들에게 불교가 정녕 구원의 메시지일까? 모던의 시대가 ‘자아’를 찾았다면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타자’를 찾았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 정신적 징후의 표현이 아닐까? 그러나 과연 이 시대가 타자가 나의 존재의 기반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인종적 차별과 종교적 갈등,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지금,과연 우리는 존재의 연기적 실상,자아와 타자 가 공존하면서 소외되지 않고 서로 건강하게 소통하는 세상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어떠한가? 서양을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우리는,어느 날 하늘처럼 높으신 주인집 도령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하녀처럼 과분한 사랑에 감격하며 그들이 본 내 모습이 바로 진짜 내 모습이었노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는 않은가? ‘서세동점’의 시대가 지난 지금도 타자인 서양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구애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언제까지 주체로 나서지 못하고 변방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동양과 서양’, ‘불교와 서양 현대미술’이라는 과제는 시대의 문제를 조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했던 한국사회에서 자란 나에게 서양은 동양보다 익숙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왜곡된 재현보다 더 위험하다고 사이드가 경고했던 것처럼,우리는 그들의 왜곡을 오래 전부터 내재화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낯선 동양을 만난 것은 절집에 들어온 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한국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에게 동양과 서양은 내 정체성의 분열된 양극이므로 나를 찾아 나선 구도의 여행이 다시 타자를 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다. 얼마 전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에서 인간의 관계를 천착했던 프랑스 여성작가 루이즈 부르조아(Louise Bourgeos)가 자신의 설치 물에 ‘타자는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며 ‘타자의 부재는 지옥이다’라고 일갈했던 것처럼,타자의 존재가 곧 내 존재의 기반이니까.

    그러나 내가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박사논문 심사가 끝날 즈음, 이것저것 세세하게 논문 수정을 당부한 후,지도교수님은 외국에 나가 좀 더 공부해보라고 권하셨다. 한참이나 뒤늦은 나의 만학을 잘 아시는 그 분의 권유였기에 쉽게 떨칠 수 없었다.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 한창 유학 준비를 해도 나는 왠지 한국에 남아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막연했지만 내가 찾는 것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 그 예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출가를 했고 대학이 아니라 절집에서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미국행을 결심했다. 대학시절 혹 유학을 갔더라도 미국은 결코 내가 유학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인문학도였던 나에게,더구나 386세대인 우리들에게 미국은‘양키들의 천박한 대륙’이었으며 누군가가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학도거나 경제학도거니 생각하거나,만약 그렇지 않다면 미국병이 든 환자쯤으로 여겼다. 산문(山門)에 들어가 있었던 세월 동안,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가 도래했고 철학과 예술의 전당이었던 유럽은 그야말로 구대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는 미친 듯이 영어몰입교육에 몰입하였고 대학에서도 독문과와 불문과는 파리를 날리는 형편이 되었다. 세월 탓인지, 수행 덕분인지 나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담대해져 있었다. 젊은 날의 동경이 사라졌으니 낡은 유럽을 위해 엘레지를 부를 필요는 없으리라. 미국이면 어떠랴,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면 세계의 중심에서 나를 바라보자. 그들에게 타자인 내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그것은 또한 다시 나를 비추는 거울일 테니 말이다. 학술진흥재단에 박사후국외연수를 신청했고 운 좋게도 나의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축복과 은총의 날,나에겐 연말연시 성수기에 유일하게 비행기표 값이 쌌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은혜로웠던 그날,나는 타자들을 향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명법 스님
    1986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후 1993년 해인사로 출가,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수학했다. 2007년 서울대 미학과에서<송대 예술관에 끼친 선종의 영향-의경과 시서화일률론을 중심으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은 (사)불교학연구지원사업회로부터 불교학우수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님은 현재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으로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후해외연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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