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12 大知와 小知

浮萍草 2016. 5. 5. 12:00
    큰 지혜는 너그러워 화합하고, 작은 지혜는 촘촘해 편 가른다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지혜가 너그럽고 여유롭다면 작은 지혜는 촘촘하다. 큰 지혜가 널널하다면 작은 지혜는 따지면서 분별한다. 큰 말이 힘차며 아름답다면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큰 말이 담백하다면 작은 말은 시비를 일으킨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전을 찬성했던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했던 애국자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무명의 후보 시절 이라크전 찬반 여부로 갈라졌던 민주당원들을 상대로 했던 연설이다. 이 연설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애국의 방법론상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위 차원인 애국의 입장을 강조해서다. 장자가 말하는 큰 지혜(大知)와 큰 말(大言)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위 차원의 방법론을 두고 끝없이 논쟁을 벌이는데 이것은 작은 지혜(小知)와 작은 말(小言) 때문이다. 장자서 첫 편 소요유(逍遙遊)에서도 큰 지혜와 작은 지혜를 큰 새 붕(鵬)과 작은 새 어린 비둘기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작은 새는 힘껏 날아봐야 느릅나무 높이에 이르러 멈추거나 아니면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반면 큰 새는 구만리나 높이 날아오른다. 여기서 높이 날아오르는 붕은 큰 지혜의 소유자고, 느릅나무밖에 날아오르지 못하는 어린 비둘기는 작은 지혜의 소유자다. 장자는 새가 날아오른 높이를 지혜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기준으로 파악했다. 장자는 날아오른 높이를 왜 큰 지혜와 작은 지혜를 나누는 기준으로 보았을까?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과 구릉, 강과 천, 숲과 늪의 구분이 없어져 모두 비슷하게 보여서다. 마치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하나같이 푸른 것처럼. 그래서 장자는 하늘이 푸른 것은 원래 푸른 게 아니라 멀어서 푸른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처럼 멀리서 보면 가까이서 볼 때와 달리 크고 작고, 많고 적고 등의 구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이서 보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애국의 방법론도 멀리서 보면 애국이란 한 개념에서 나왔기에 서로 통함이 가능하다. 이것이 장자적 소통 방식의 핵심인데 장자사상의 뿌리는 여기서 비롯된다. 장자사상을 소통의 사상이라고 말한다면 이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번(2015년 9월 2일자) 글에서 멀리서 보는 것을 가물가물한 ‘현(玄)’으로, 가까이서 보는 것을 드러나는 ‘황(黃)’으로 명명한 바 있다. 따라서 소통이 이뤄지려면 황의 입장에서 현의 입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소요유에 이어 제물론(齊物論)에서도 장자는 큰 지혜(大知)와 작은 지혜(小知)의 대비를 또다시 시도한다. 제물론에 따르면 큰 지혜는 한한(閑閑)하고, 작은 지혜도 한한(閒閒)하다. ‘한한’의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큰 지혜의 한한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반면 작은 지혜의 한한은 칸이 있어 촘촘하다. 그러니 큰 지혜는 대상에 대해 널널하게 생각하는 반면 작은 지혜는 대상에 대해 따지며 분별한다. 이렇게 보면 서양의 근대과학, 또 사물의 격을 따져 앎에 이르는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도 장자가 볼 때 작은 지혜에 속한다. 지혜는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각이 널널하면 사용하는 언어도 널널해지고, 따지고 분별하면 언어도 이를 따라간다. 그래서 장자는 큰 말(大言)은 활활 타오르며(炎炎), 작은 말(小言)은 수다스럽다고(詹詹) 말한다. 염(炎)은 불 화(火)자가 위아래로 겹쳐 있어 큰 말은 큰불처럼 아름다우면서 힘차다는 의미다. 이것은 시비에 구애되지 않는 담백한 말이다. 앞서 인용한 오바마 연설이 큰 말에 해당한다. 반면 작은 말이 수다스럽다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이란 의미다. 그러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을뿐더러 시비마저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장자는 왜 소요유에 이어 제물론에서도 큰 지혜로 살아가도록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걸까? 소요유에선 큰 지혜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대신 큰 지혜로 살아가는 방법론으로 쓸모없음의 쓸모,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를 터득해서 소요유 내지 방황유(彷徨遊)에 이르는 길만을 안내했다. 소요유와 방황유가 장자서의 서론을 마감하는 개념인데 왜 그런지의 이유가 당연히 뒤따라와야 한다. 장자는 이 근거를 제물론에서 제시한다. 그래서 제물론을 가리켜 장자서의 이론적인 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큰 지혜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로 무엇을 들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뿜는 온갖 감정, 생각,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큰 지혜로 판단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걱정·한탄·변덕·고집이라는 여탄변집(慮嘆變)의 생각, 아첨·방자·솔직·꾸밈이라는 요일계태 (姚佚啓態)의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큰 지혜로 살아가면 이런 감정, 생각, 행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작은 지혜로 살아가면 여기서 헤어나질 못한다.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걸까? 불가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틀로 이를 설명한다. 색은 외부 대상, 수는 감각이 받아들인 모습, 상은 마음 안에 생겨난 이미지, 행은 이에 따라 행동하려는 의지, 식은 의식 안에 굳게 자리한 관념이다.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은 색·수·상·행·식의 과정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이에 불가는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마찬가지다(色則是空 空則是色 受想行識 亦不如是)’라고 말하면서 색·수·상·행·식을 공의 상태로 놓도록 요구한다. 매우 논리정연해 학문적으론 뛰어난 분석 틀이지만 실천을 위해선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다. 장자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 사상가다. 그래서 수준 있는 메타포를 동원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려고 했다. 우리는 살면서 발끈하다가 후회하고, 변덕을 부리다가 싹 잊고선 고집을 피우고, 알랑거리다가 상대방 힘이 빠지면 방자해진다.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매일 번갈아가며 나타나지만 어떻게 생겨나는지 모른다. 그 원인을 찾아가면 매우 하찮기에 이내 후회하고 만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퉁소소리가 퉁소 빈 공간에서 나오고, 그 퉁소를 만드는 대나무 죽순(菌)도 수증기 김(蒸)에서 돋아난다.” 그러고 보면 희로애락, 여탄변집, 요일계태의 퉁소소리도 결국 퉁소의 열린 공간과 수증기의 김처럼 ‘빈(虛)’ 데서 생겨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자는 “아서라! 아서라!” 하며 우리에게 오히려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생겨나는 바대로 살아가도록 주문한다. 일반적인 도덕관과 다른 주문을 왜 하는 걸까? 이런 주문은 색·수·상·행·식을 공의 상태로 놓아서 해탈에 이르라는 불가의 주문과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장자에 따르면 이런 감정,생각,행동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감정,생각,행동이 나타날 까닭이 없어서다. 사실 이런 감정, 생각,행동이 있기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불가식 공의 실천을 통해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을 말끔히 제거한다면 더 이상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장자가 선택한 것은 희로애락의 감정, 여탄변집의 생각, 요일계태의 행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줄이는’ 길이다. 이것이 훨씬 더 실천 가능한 길이자 또 인간적인 접근이다. 이를 위해선 우리 마음의 천뢰(天뢰) 즉 참주재자란 의미를 지닌 진재(眞宰)의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 장자에 따르면 참주재자는 있는 것 같지만 그 모습을 특별히 볼 수 없고,그것이 작용하는 징후도 확실하고 그 의지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참주재자는 큰 지혜와 큰 말을 사용함으로써 희로애락의 감정 여탄변집의 생각, 요일계태의 행동의 폭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작은 지혜의 소유자는 가까이서 들여다보기에 100개의 뼈 9개의 구멍, 6개의 내장 중에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든다. 뼈 중에선 갈비뼈, 구멍 중에선 입, 내장 중에선 심장이란 식으로 친하려고 한다. 이것들이 모여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면 도대체 말이 안 되는데도. 그럼에도 작은 지혜의 소유자는 갈비뼈와 심장을 군주의 아끼는 신하와 사랑스러운 부인쯤으로 여긴다. 그런데 신하와 부인은 서로 관리될 수 없기에 비교가 곤란하다. 그러면 작은 지혜의 소유자는 관리를 위해 신하와 부인이 차례로 돌아가며 군주가 됐다 신하가 됐다 하는 걸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참군주(眞君)는 따로 있다. 참군주가 바로 참주재자와 같은 존재다. 작은 지혜와 작은 말의 소유자는 잠이 들면 꿈을 꾸어 쉴 새 없고, 또 깨어나면 활동을 시작해서 쉴 새 없다. 이들은 남들과 만나면 가끔씩 다투지만 마음속으로는 날마다 싸움질을 한다. 능구렁이 같은 만자(만者), 음흉한 교자(교者), 치밀한 밀자(密者)가 특히 그러하다. 이들은 조금 놀라면 안절부절못하지만 크게 놀라면 기절이라도 한다. 이들이 내뱉는 말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활과 같은데 이는 상대방 허점을 틈타 시비를 가리겠다는 것이다. 또 이들이 집착하는 건 맹세하듯 하는데 이는 필사적으로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비를 따지고 누군가를 이기려 하는 데 자꾸 빠져들면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런데 만자, 교자, 밀자는 평생을 발버둥 치더라도 결국 이룬 공은 별로 없다. 또 일에 몰두해 파김치가 되더라도 마음을 둘 데가 없다. 게다가 마음의 문을 꽁꽁 묶어 봉해서 늙어서도 욕심에 억눌려진다. 이런 경직되고 폐쇄적인 마음이 바로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近死之心)’이다. 이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마음의 젊음을 회복할 수 없다. 이들은 몸이 늙어가는 데 따라 마음도 함께 시들어 가니 슬픈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작은 지혜와 작은 말에 의지해서 산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草 浮
    印 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