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7 큰 앎과 작은 앎

浮萍草 2015. 12. 1. 12:16
    멀리서 보는 道學은 大知…가까이서 보는 科學은 小知
    일러스트=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의 방식에도 자료(materials)-정보(information)-지식(knowledge)-지혜(wisdom)의 순으로 서열체계가 있다. 자료를 이해하는 게 가장 낮은 단계의 앎이라면 그 위로는 정보가,또 정보 위에는 지식이,지식 위에는 지혜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물론 처음부터 지혜의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순 없다. 자료에서 정보를 추출하고, 정보에서 지식을 추출하고,지식에서 지혜를 추출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지혜롭게 되는 게(to be wise)’ 빠를수록 의미 있는 교육이 쉽게 자리 잡는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적은 양의 자료에서 정보를,또 적은 양의 정보에서 지식을, 또 적은 양의 지식에서 지혜를 만들 때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가 수직적일수록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는 옆으로 너무 퍼져 수평적이 되고 만다. 즉 많은 양의 자료에서 적은 양의 정보만을, 또 많은 양의 정보에서 적은 양의 지식만을 찾다가 결국 지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채 앎의 피라미드를 헝클어 버린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라는 경제 원칙이 교육의 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사실 한국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교육은 지혜로움에 이르지 못한 채 ‘지적으로 되는 데(to be knowledgeable)’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료와 정보만으로 자신이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학생조차 있다. 그 결과 대학교육이 보통교육화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창조경제’를 구현하려면 무엇보다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가 효과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지혜로움에 도달하는 확률이 높아야 한다. 장자는 앎을 큰 앎(大知)과 작은 앎(小知)으로 구분한다.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위에 위치한 지혜가 큰 앎이라면 밑으로 내려갈수록 작은 앎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큰 앎과 작은 앎은 어떤 것일까? 장자에 따르면 큰 앎은 세상을 멀리서 볼 때 즉 도학(道學)을 할 때 얻어지는 반면 세상을 가까이서 보면, 즉 기학(器學) 내지 과학(科學)을 하면 작은 앎에 그치고 만다. 멀리서 보면 세상만물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구분이 뚜렷하게 드러나서이다. 이것이 구별되어 드러나는 황(黃)과 구별되지 않고 가물가물한 현(玄)의 차이이다. 장자서가 대붕의 비상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대붕이 9만 리나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 위의 모든 게 구별되지 않고 모두가 푸르지 않았던가? (문화일보 9월 2일자 24면 장자이야기 4회 참조) 그런데 높이 날지 못하는 작은 동물, 예를 들어 매미나 어린 비둘기는 기껏 날아봐야 느릅나무 높이에 이르러서 멈추고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런 존재들은 대붕이 느끼는 현(玄)의 관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로선 이마저도 대단히 높이 날아오른 셈인데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게 뚜렷하게 구분되어질 뿐이다. 그러니 이들은 오로지 황(黃)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물론 대붕이라도 항상 높이 나는 건 아니다. 바람(風)이 날개 밑에 두껍게 쌓여야만 9만 리씩이나 높이 날 수 있다. 만약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대붕은 큰 날개(大翼)를 띄울 여력이 없다. 이는 충분한 물(水)이 고이지 않으면 큰 배(大舟)를 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예를 들어 마루 팬 곳에 물 한 잔을 부으면 작은 풀잎은 떠서 배가 되지만 작은 풀잎보다 훨씬 무겁고 큰 잔을 거기에 놓으면 뜨기는커녕 밑에 달라붙고 만다. 이는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붕의 큰 날개를 띄우려면 거기에 합당한 바람이 날개 밑에 반드시 쌓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대붕처럼 하늘을 높이 날 수 없지 않은가? 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건가? 멀리서 바라보아야 큰 앎을 얻을 수 있는데 대붕처럼 날 수 없다면 인간은 그저 작은 앎을 얻는 데 그치는 걸까? 이런 의문은 분명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예상했는지 장자는 멀리서 보는 것을 ‘높음’이라는 공간에 제한하지 않고 ‘길다’는 시간으로 확장했다. 그래서 수명을 짧은 수명(小年)과 긴 수명(大年)으로 구분한 뒤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생겨났다 해가 지면 사라지는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르지 않는가. 또 여름철에만 활동하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이는 오로지 짧은 수명 탓이다. 이에 반해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란 나무는 500살을 봄으로 삼고, 500살을 가을로 삼았다고 하니 나무의 수명이 1000년이다. 게다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대춘(大椿)이란 나무는 8000살을 봄으로 삼고 8000살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의 수명이 무려 1만6000년인 셈이다. 장자가 볼 때 이쯤 되어야 긴 수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800년을 산 팽조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수명을 이와 비교하려고 드니 장자가 볼 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장자에게 작은 앎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지식(知), 언행일치의 행동(行),덕(德)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유가(儒家)가 유난히 강조하는 가치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장자는 지식, 행동, 덕에 대해 작은 앎이라고 낮게 평가한다. 그래서 지식이란 ‘한 개 정도의 벼슬(一官)’을 수행하는 데 적당하고,행동은 ‘한 개 고을(一鄕)’을 다스리는 데 적당하고, 덕은 군주와 뜻이 맞아 ‘한 나라(一國)’의 신임을 받는 데 적당할 뿐이라면서 이것들을 평가절하한다. 물론 지식보다 행동이, 또 행동보다 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장자에게는 지식·행동·덕에 입각해 있는 사람들은 매미나 어린 비둘기처럼 높이 날지 못해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보는 황(黃)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장자는 왜 이리도 지식·행동·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이것들이 유위(有爲), 즉 하고자 함에 입각해 있다고 본 탓이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가“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하는 건 우연은 아니다. 유가에서 배움(學)을 특별히 강조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어서이다. 그렇지만 장자가 볼 때 배움은 너무나 유위적이다. 우주자연의 원리(天道),인간의 도리(人道), 그리고 인간세상의 이치(治道)는 배움만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배우기에는 우주자연이 너무나 넓고,인간세상 또한 복잡해서이다. 그래서 무위(無爲), 즉 하고자 함이 없는 바로 임할 때 비로소 그 원리와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무위의 터득, 이를 위해 장자는 가장 무위자연의 존재인 바람과 물을 큰 새(大鵬)의 비상과 큰 배(大舟)의 띄움을 위해 동원했다. 그렇다면 무위자연의 상태에서 큰 앎을 얻은 사람 중에는 과연 어떤 사람이 있을까? 장자는 송영자(宋榮子)와 열자(列子)를 그 예로서 든다. 송영자는 송견(宋)으로 알려진 인물로 흔히 송자(宋子)라고 높여 부른다. 송영자는 만물을 대할 때 편견을 갖지 않고 이들을 가능한 한 화합시킴으로써 세상만물 모두를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또 모욕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를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 간의 싸움을 막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처럼 남을 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자신을 돌볼 틈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를 칭찬해도 더 이상 애쓰려 하지 않고,또 헐뜯어도 더 이상 꺾이지 않았다. 송영자는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의 표본인 것이다. 그럼에도 장자가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것은 송영자가 화산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 쓰는 데서도 드러나는데 모자 착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바깥의 외물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또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확실히 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여전히 현(玄)의 이치가 아니라 황(黃)의 이치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장자는 송영자에 비해 현(玄)의 이치에 보다 다가간 열자를 큰 앎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금 제시한다. 열자는 노자 및 장자와 더불어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기한 기술을 지닌 인물인데 한 번 바람을 타고 날면 보름쯤 지나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맑고 가뿐하다. 이처럼 열자는 땅을 걸어 다니는 수고는 면했지만 바람을 타는 법에 여전히 의존하는 바가 있다. 그러니 바람을 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소요(逍遙)는 바람을 타는 법 즉 앎에 의존하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얻어야 기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어야 기뻐한다. 그것은 이들의 소요가 부귀, 명예 등에 의존하고 있어서이다. 의존하는 대상이 있으면 그것을 얻어야만 비로소 소요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열자는 앎에 의존해서 소요하는 꼴이다. 장자는 천지본연의 모습(天地之正)을 따르고 또 자연의 변화(六氣之辯),즉 음(陰)·양(陽)·바람(風)·비(雨)·어둠(晦)·밝음(明)에 순응하여 무궁한 세계에서 노닐면 더 이상 의존할 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만 무위자연의 참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연의 결에 따라 판단하면서 궁극에는 우주와 합일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큰 앎이다. 그렇다면 누가 큰 앎에 진정으로 이른 사람일까? 지인(至人)·신인(神人)·성인(聖人)이 그들이다. 지인은 나라는 의식이 없고(無己), 신인은 공을 이루려는 바가 없고(無功),성인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 없는(無名)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지인·신인·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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