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11 하늘의 퉁소소리

浮萍草 2016. 4. 1. 10:14
    말라죽은 나무처럼… 불 꺼진 재처럼… 나를 버려 ‘하늘소리’를 듣다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상아(吾喪我) 상태에 이르면 하늘의 퉁소소리(天뢰)를 만나고,오상아 상태에 이르지 못하면 희로애락(喜怒哀樂)·여탄변집(慮嘆變)·요일계태(姚佚啓態)의 퉁소 소리를 만난다. 기쁨(喜)·분노(怒)·슬픔(哀)·즐거움(樂)의 퉁소소리, 걱정(慮)·한탄(嘆)·변덕(變)·고집()의 퉁소소리 아첨(姚)·방자(佚)·드러냄(啓)·꾸밈(態)의 퉁소소리를 만들어 내는 게 우리 삶의 모습이다! 철학이나 사상처럼 어려운 내용을 논리가 아닌 메타포로 풀어내는 게 이상적인 글쓰기다. 이런 글쓰기 중 으뜸인 텍스트는 단연 ‘장자’이다. ‘장자’에는 가슴에 쉽게 와 닿는 감동의 메타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대붕의 꿈’ ‘조삼모사’ ‘포정의 소 해체’ ‘마음의 재계’ ‘쓸모없음의 쓸모’‘우물 안 개구리’ 등이 모두 ‘장자’에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논어’ ‘도덕경’ ‘맹자’ 등은 ‘장자’를 따라올 수 없다. 장자가 그의 생각을 이처럼 메타포로 포장한 것은 아마도 이론을 넘어 실천으로, 이해를 넘어 소통으로 그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경에 많은 은유와 비유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장자’에 등장하는 메타포는 주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치言)의 형식을 지닌다. 우언이 재미있는 우화 형식의 표현이라면 중언은 사람들이 권위를 부여한 사람,즉 성인과 같은 사람의 말을 빌리는 표현이며,치언은 상대방 의식이나 삶의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우언은 적용 범위가 넓은 말이고,중언은 사람들이 참된 것이라 믿는 말이며,치언은 저절로 자신의 흐름을 찾아가는 말이다. 그래서 치언으로 늘어놓고 중언으로 믿게 하고, 우언으로 의미를 넓히는 방식이 ‘장자’에 많이 등장한다. ‘장자’의 내용이 다소 터무니없는 언설이나 황당한 발언,심지어 방자한 말처럼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장자의 메타포가 가장 두드러진 곳은 제물론(齊物論)이다. 제물론은 하늘의 퉁소소리인 천뢰(天뢰),대지의 퉁소소리인 지뢰(地뢰),사람의 퉁소소리인 인뢰(人뢰)라는 개념으로 시작해 호랑나비 꿈(胡蝶夢)이라는 내용으로 끝난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작품 중에 ‘나비의 꿈’이 있는데 제물론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천뢰·지뢰·인뢰로 시작하는 제물론 도입부는 중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다는 평가를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 왔다. 중국 송대의 대표적 시인 왕안석(王安石)도 제물론 도입부에 대해 “책을 덮고 있노라면 여러 종류의 바람소리가 귀에서 윙윙 들려오는 듯하다”고 평한 바 있다. 이처럼 바람은 제물론에서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그런데 바람(風)이란 자연이 내뿜는 기(氣)다. 자연이 기를 내뿜지 않으면 바람이 일지 않아 사방은 조용하다. 그렇지만 바람이 일단 불면 대지의 온갖 구멍에 부딪혀서 수많은 소리를 만든다. 어떤 구멍은 코 같고, 어떤 구멍은 입 같고, 어떤 구멍은 귀 같고, 어떤 구멍은 술병 같고,어떤 구멍은 술잔 같고,어떤 구멍은 절구 같고, 어떤 구멍은 깊은 웅덩이 같은데 그 구멍들에 바람이 부딪히면 물 흐르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화를 내며 꾸짖는 소리,숨을 들이마시는 소리,크게 외치는 소리, 울며 통곡하는 소리,신음 하며 원망하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지뢰, 즉 대지의 퉁소소리다. 인뢰, 즉 사람의 퉁소소리는 어떤 걸까. 그것은 우리 몸 안에서 내뿜는 바람으로 만들어지는 실제 퉁소소리다. 그 소리는 악기 퉁소의 구멍을 열고 닫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많이 막으면 높은 소리가 나고 구멍을 적게 막으면 낮은 소리가 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퉁소소리와 대지의 퉁소소리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있어선 매한가지다. 인뢰에선 호흡을 통해 기가 내뿜어짐으로써 바람이 만들어진다면 지뢰에선 자연이 내뿜는 기에 의해 바람이 만들어진다. 또 인뢰에서의 구멍이 악기 구멍이라면 지뢰에서의 구멍은 나무 등걸에 있는 구멍이다. 인뢰와 지뢰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구멍들에서 나오는 소리의 종류와 크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천뢰, 즉 하늘의 퉁소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악기의 구멍이든 나무 등걸의 구멍이든 그 구멍들에 불어넣는 바람 그 자체다. 이 바람은 구멍들과 만나지 않으면 따로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하늘의 퉁소소리에 소리가 있다면 대지에서 워∼ 하고 부는 바람소리, 몸 안에서 후∼ 하고 나오는 바람소리일 뿐이다. 그렇지만 구멍에 일단 부딪히기만 하면 외치는 소리, 울며 통곡하는 소리, 신음하며 원망하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더 이상 하늘의 퉁소소리가 아니라 대지의 퉁소소리로 바뀌고 만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하늘의 퉁소소리는 ‘만들어진’ 대지의 퉁소소리에 의해 이내 묻혀 버린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국 ‘만들어진’ 퉁소소리에서 좀처럼 헤어나질 못한다. 조그마한 일에도 기뻐하고(喜), 노여워하고(怒), 슬퍼하고(哀), 즐거워한다(樂). 이것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다. 또 걱정(慮), 한탄(嘆), 변덕(變), 고집()을 쳇바퀴 돌 듯 번갈아 한다. 이것이 여탄변집(慮嘆變)의 생각이다. 또 아첨(姚), 방자(佚), 드러냄(啓), 꾸밈(態)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이것이 요일계태(姚佚啓態)의 행동이다. 희로애락의 감정, 여탄변집의 생각, 요일계태의 행동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는 퉁소소리다. 이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퉁소소리는 대지의 퉁소소리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는데 이 소리가 장자가 제물론을 통해 문제 삼으려는 퉁소소리다. 그렇다면 희로애락의 감정, 여탄변집의 생각, 요일계태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을까. 장자에 따르면 내가 나를 버리는 오상아(吾喪我)의 상태에 이를 때 가능하다. 즉 오(吾)가 자신의 짝(偶)인 아(我)를 버릴 때 가능하다.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은 모두 ‘아’가 있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라는 의식이 있기에 기뻐하고,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걱정하고, 한탄하고, 변덕 부리고, 고집 부리고, 아첨하고, 방자하고, 솔직해지고, 꾸민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내는 온갖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퉁소소리들이다. 그래서 ‘아(我)’의 마음에서 생겨난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퉁소소리를 지워야만 ‘오(吾)’의 마음으로 하늘의 퉁소소리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대지의 퉁소소리와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퉁소소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지의 퉁소소리에선 바람이 약하게 불면 약하게 응답하고, 강하게 불면 강하게 반응한다. 또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로 반응하고,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화답한다. 또 바람이 멈추면 이내 조용해진다. 거센 바람에 의해 휘청휘청 구부러졌던 나뭇가지조차 바람이 멈추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살랑살랑 흔들 뿐이다. 이에 반해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퉁소소리는 부는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조그마한 기쁨과 슬픔에 크게 반응해서 희로애락의 골만 깊게 한다. 인간이 흔들리는 갈대보다 더 연약하고, 무수한 현을 타는 거문고의 음색보다 더 미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대지의 바람소리는 연암의 ‘열하일기’에선 계곡의 물소리로 바뀐다. “내가 사는 연암협 산중에 큰 개울이 있는데 여름철이 돼 소낙비가 쏟아지면 물이 불어 온갖 소리들이 난다…. 언젠가 문을 닫고 그 소리들을 들었더니 소나무 숲의 퉁소소리 같은 물소리는 청아한 마음으로, 산이 짜개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물소리는 분노한 마음 으로, 개구리 떼가 다퉈 우는 것 같은 물소리는 뽐내고 건방진 마음으로,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는 것 같은 물소리는 놀란 마음으로,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것 같은 물소리는 아취 있는 마음으로, 가락에 맞게 똥땅거리는 물소리는 애잔한 마음으로, 문풍지가 떠는 듯한 물소리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그렇다! 물소리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 그 물소리를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즉 청아한 마음, 분노한 마음, 건방진 마음, 놀란 마음, 아취 있는 마음, 애잔한 마음, 의심하는 마음에 따라 제각각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들이 왜 번갈아 가며 자꾸만 생겨나는 걸까. 그것은 마음에 아(我)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이런 자의식이 있기에 같은 물소리라도 소나무 숲의 퉁소소리처럼, 산이 짜개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것처럼,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것처럼, 문풍지가 떠는 것처럼 제각각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아(我)라는 의식, 즉 자의식을 없애는 일이 중요하다. 장자는 이런 자의식을 없애는 방법으로 고목지형(槁木之形)과 사회지심(死灰之心)을 든다. 고목지형은 말라죽은 나무(槁木)처럼 몸을 만드는 것이고, 사회지심은 불 꺼진 재(死灰)처럼 마음을 이루는 작업이다. 여기서 말라죽은 나무란 눈·코·귀·혀·피부의 오관에 의한 감관작용을 멈출 때 가능하고, 불 꺼진 재란 의미작용에 입각한 심관작용을 멈출 때 가능하다. 이는 ‘금강경’에서 “색과 공이 다르지 아니하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아니하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다(色則是空 空則是色 受相行識 亦不如是)”와 같은 방법론에 해당한다. 색·수·상·행·식을 공(空)으로 만드는 일이 고목지형이고 사회지심이기 때문이다. 불가의 유명한 향엄격죽(香嚴擊竹)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다. 향엄은 어느 날 절의 마당을 쓸다 깨진 기왓장 하나가 대나무 숲으로 날아가 딱 하는 소리를 내자 그만 깜짝 놀랐다. 이 딱 하는 소리를 청아한 마음, 분노한 마음, 건방진 마음, 놀란 마음 등으로 들은 게 아니라 청정한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듣는 향엄도 없고, 소리를 내는 대나무도 없고, 오로지 대나무 소리만이 있었다. 향엄은 비로소 하늘의 퉁소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결과 기왓장이 부딪치는 평범한 소리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인 오(吾)를 깨달았다. 제물론의 주인공 남곽자기(南郭子기)도 향엄처럼 아(我)를 버림으로써 본래면목의 오(吾)를 찾아 오상아 상태에 이른 인물이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草 浮
    印 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