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10 吾喪我(오상아·내가 나를 버리 다)

浮萍草 2016. 2. 25. 09:59
    돈·미모·권력에 ‘종속된 나’, ‘원래의 나’를 불행하게 하다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남곽자기가 탁자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을 우러르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멍하니 넋이 나가 마치 자신의 짝을 잃은 듯했다. 제자인 안성자유가 시중을 들다가 의아해서 물었다. ‘ 어째서 그러고 계십니까? 몸은 정말로 말라죽은 나무와 같고 마음은 정말로 불 꺼진 재와 같습니다. 지금 탁자에 기대어 앉아 계신 모습은 예전에 탁자에 기대어 앉아 계시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말했다. ‘자유야, 참 잘 보았다. 지금 나(吾)는 나(我)를 버렸다’….” 장자서의 이론적 틀인 ‘제물론(齊物論)’은 남곽자기와 안성자유라는 두 가공인물이 펼치는 대화로 시작한다. 이런 ‘제물론’ 시작부는 ‘소요유(逍遙遊)’ 시작부와 그 구성 방식에 있어 흡사하다. ‘소요유’는 북쪽 바다(北冥)의 물고기 곤이 남쪽 바다(南冥)를 향해 날아가는 새 붕으로 변한다는 얘기로 시작하는데‘제물론’도 남쪽 성곽(南郭)에 사는 자기(子기) 라는 사람이 나를 상실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변한다는 얘기로 시작한다. 북과 남, 물고기와 사람은 대조적이지만 북명의 물고기와 남곽의 자기가 변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아마도 존재는 고정된 게 아니라 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장자는 이런 구성 방식을 택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유가는 인간이 존재로서 고정돼 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한다. 왕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부인으로 제각각 구분해 각자의 도리를 취하도록 하는 게 유가의 목표다. 특히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받들었던 조선에서는 사람의 신분을 사농공상으로 고정화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존재를 구속하면 상놈은 영원히 평민이 될 수 없고, 평민 또한 영원히 양반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현존재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장자는 내(吾)가 나(我)를 버리면(喪) 비상하는 대붕처럼 초월적 존재로까지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제물론’ 시작부 주제어가 오상아(吾喪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오상아란 무엇일까. 먼저 오(吾)는 태어날 때 지녔던 원래의 나다. 불가에선 이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나라고 말한다. 원래의 나는 의식이 없어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 흐르는 물은 나라는 의식을 갖고서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움직인다는 의식조차 없어서이다. 반면 인간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한다는 의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자아 또는 자기가 작용한 탓인데 이것이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나(我)의 내용물이다. 그러니 원래의 나와 만들어진 나 사이의 간극은 자연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 만들어진 나를 원래의 나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이제 만들어진 나를 지워야만 원래의 나가 드러나는데 이를 위해 장자는 내가 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버려야 한다는 내용은 불가에서도 등장한다. 향엄격죽(香嚴擊竹) 이야기가 단적인 예다. 학식이 높았던 향엄이지만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이 어떤 거냐?’는 스승의 질문에 대답을 못 했다. 이에 하산을 결행한 뒤 어느 날 절의 마당을 쓰는데 깨진 기왓장 하나가 대나무 숲으로 날아가 생긴 딱 하는 소리에 그만 깜짝 놀랐다. 이때 소리를 듣는 향엄도, 소리를 내는 대나무도 없었다. 오로지 딱 하는 소리만이 있음을 알고 향엄은 비로소 본래면목의 나(吾)를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있기 전에는 내(我)가 주관적으로 분별하고 해석한 바깥의 대상을 안의 마음으로 전했을 뿐이다. 그런데 기왓장 소리의 충격으로 인해 내(我)가 사라짐으로써 안과 밖이 하나 되는 내외일여(內外一如) 상태가 됐다. 이것이 오상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나(我)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걸까. 흥미롭게도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감관(感官)작용과 심관(心官)작용으로 생긴다. 감관작용이란 눈·귀·코·혀·몸의 오관으로 이뤄지는 작용이다. 즉 눈을 통해 보고,귀를 통해 듣고,코를 통해 냄새 맡고 혀를 통해 맛보고,피부를 통해 느끼는 것이다. 심관작용이란 오관을 통해 들어온 것들에 대해 마음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을 보면 정열적이고, 키 작은 사람을 보면 왜소하고,학벌이 좋으면 훌륭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이런 의미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불가는 감관과 심관작용으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을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표현한다. 감관이 받아들이는 외부 대상 그 자체가 색이라면 수는 감관작용에 의해 생긴 상(像)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행·식은 심관작용의 결과로 형성되는 의미들인데 서로 차이가 있다. 즉 상은 생각을,행은 의지를, 식은 인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동료에 대해 좋은 느낌이 들면 ‘상’이고,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행’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지면 ‘식’이다. 이처럼 상·행·식으로 진행될수록 의미작용은 더욱 깊어진다. 불가가 심관작용을 상·행·식의 세 단계로 구분한 것은 심관작용이 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아서다. 인간은 어쩌면 뛰어난 감관작용과 심관작용으로 인해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친 감관·심관작용은 인간을 오히려 존재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감관·심관작용을 부채질하는 데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데도 조금 더 아름다워지려고 얼굴을 뜯어고치는 일이 다반사다. 또 조금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조금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영혼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나라는 의식, 즉 아름다운 나, 부자인 나, 권력을 쥔 나라는 의식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아서다. 그런데 이런 내(我)가 원래의 나(吾)를 압도하면서 이를 대체하는 전도현상마저 발생한다. 이런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간파했다는 데 장자 사상의 위대함이 있다. 이에 장자는 감관작용과 심관작용을 멈추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그 방법론이 고목지형(槁木之形)과 사회지심(死灰之心)이다. 고목지형은 몸이 말라죽은 나무가 되는 것이고 사회지심은 마음이 불 꺼진 재가 되는 것이다. 말라죽은 나무와 같은 몸은 일체의 감관작용을 멈출 때 또 불 꺼진 재와 같은 마음은 일체의 심관작용을 멈출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공자가 유가적 삶의 완성으로 제시한 이순(耳順)도 고목지형·사회지심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순이란 귀가 순해져서 싫은 소리든 좋은 소리든 미운 소리든 고운 소리든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똑같이 들린다는 의미다. 이런 상태는 감관·심관작용을 중지해 몸은 말라죽은 나무처럼, 마음은 불 꺼진 재처럼 될 때 가능하다. 고목지형과 사회지심은 불가의 공(空) 개념으로 설명된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則是空 空則是色)’고 말한다. 여기서 색이 감관 및 심관작용을 통해 인식하는 대상의 모습이라면 공은 감관 및 심관작용을 멈춘 상태에서 인식하는 대상의 모습이다. 즉 감관·심관작용을 멈춰 몸과 마음이 말라죽은 나무와 불 꺼진 재가 되면 대상을 공으로 파악하는 반면 감관·심관작용을 활발히 해 몸과 마음이 살아있는 나무와 타오르는 숯이 되면 대상을 색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감관·심관작용을 멈추지 않으면 색만 드러나는 반면 감관·심관작용을 멈추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상태가 된다. 공의 상태에 이르면, 아니 고목지형과 사회지심의 상태에 이르면 만들어진 나는 사라지고 원래의 나만 남는다. 이는 감관·심관작용을 함으로써 분리됐던 나와 내가 하나로 합쳐지는 작업이다. 이는 내(吾)가 나(我)를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오상아 상태다. 이 상태에 이르면 비상하는 대붕처럼 큰 꿈을 품고 훨훨 날 수 있다. ‘소요유’에선 이런 대붕의 비상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유유자적함(遊)을 든다. 유유자적함에 이르는 길이 소요와 낭만이라면 오상아에 이르는 길은 고목지형과 사회지심이다. 소요와 낭만이든, 고목지형과 사회지심이든 간에 이것들은 우리 인식과 감정의 폭을 크게 줄인다. 그래서 알아도 모를 수 있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고, 기뻐도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희로애락의 고착화된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대붕이 유유자적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높이 날아서 가기 때문이다.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 위의 모든 게 구별되지 않고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이것이 ‘가물가물한’ 현(玄)의 상태다. 이런 상태에 이르려면 무조건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이때 존재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는 감관·심관작용을 멈출 때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관·심관작용을 가능한 한 확대함으로써 가까이서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작은 차이도 확대하고 심지어 없는 차이조차 찾으려고 애쓴다. 이것이 ‘드러나는’ 황(黃)의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는 존재를 스스로 구속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움, 재물, 권력 등에 종속되는 것도 이 때문인데 만들어진 나(我)가 작용한 탓이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주범이다. ㆍ오상아(吾喪我)!
    이 얼마나 마음에 와닿는 메타포인가. 내가 나를 죽인다는 뜻인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만들어진 나(我)를 버리겠다, 아니 나를 초상 치르겠다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를 무아(無我)와 몰아(沒我),또 유가에서는 무기(無己)로 표현하지만 오상아 개념에 비해 그 미적 감각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런 메타포를 사용한 것일까. 장자의 관심은 이론과 사상이란 학문적 작업보다 그 실천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학문적 작업이 아무리 훌륭해도 현실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면 그 작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장자가 깊은 의미를 담은 메타포를 동원한 것은 소통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장자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사상가이지 않은가.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草 浮
    印 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