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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의 겨울,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浮萍草 2015. 12. 15. 22:30
    1636년(인조 14) 4월 후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수도를 심양에 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원 장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청 태종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명나라에 대한 총력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전 단계로 조선에 대해 군신(君臣)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전통적으로 북방 민족을 오랑캐라 멸시했던 조선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선은 요구를 거부하고 청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했지만 청나라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 군사강국이었다.
    1636년 12월, 강추위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가 조선에 밀려왔다. 
    청 태종의 명으로 심양에 집결한 12만명이 넘는 병력 중 기병 선봉 6000여 명이 12월 8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1627년 정묘호란을 겪었지만 별다른 방어대책이 없었던 인조와 조정 대신은 서둘러 피란길에 나섰다. 
    청군의 선발대가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해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자 인조 일행은 차선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636년 12월 15일 남한산성은 청의 대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성 안에는 쌀과 잡곡을 합쳐 1만6000여 석이 있었는데 이는 1만명이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청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장기전으로 들어갔고 항전이 길어지자 성 안 사람과 짐승이 굶주려 말과 소가 죽고,살아있는 것도 서로 꼬리를 뜯어먹는 상황이 지속
    됐다. 
    매서운 추위에 눈과 비가 내리면서 군사들은 얼어 죽기도 했다. 
    12월 24일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인조는 세자와 승지, 사관을 거느리고‘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 몸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 주소서’라며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12월 29일 북문 밖에서 청군의 기습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1월 15일 산성 외곽에서 저항했던 충청도 관찰사 등의 패전 소식도 들려 왔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해지자 주화파의 중심인물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작성했다. 
    여전히 척화파의 목소리가 컸지만, 형세의 불가함을 파악한 인조도 결국 최명길의 주장에 동의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47일간 버티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현재 잠실 석촌호수 부근)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1636년의 병자호란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분만 강조한 강경 외교가 얼마나 큰 우를 범하는지를 생생하게 기억시켜 줬다. 
    그리고 남한산성은 그 아픈 역사를 지켜본 공간이다. 
    남한산성은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380년 전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이했던 남한산성을 찾아 그날의 역사를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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