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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유, 방편 그리고 방종…

浮萍草 2016. 2. 1. 11:36
    “깨달음도 비판에 노출될 수 있어야”
    “방편에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와 반증 가능성의 원리 함께 적용돼야”
    홍창성 교수의 4번째 기고는 한국불교계에서 자주,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방편에 대한 이야기,그리고 깨달음의 권위적 위상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글이다. 서양의 불교학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한국불교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던 명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편집자
    사진=장명확

    자유, 방편 그리고 방종 “자유” - 듣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한 말이다. 그래서도 누구나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가 보다. 우리 가운데 용기 있는 일부는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소중한 것들을 모두 뒤로 하고 떠나 치열하게 정진하기도 한다. 그런데 상당수 불교인들이 이상으로 받아들이는‘완전한 자유’와 ‘걸림 없는 방편’은 역설적으로 ‘자유’와 ‘방편’이라는 이상 자체를 훼손하게 될 수 있다. 본고는 철학계가 수 세기 동안 받아 들여 온 칸트의 도덕법칙의 보편화 가능성 원리와 20세기 철학자 포퍼의 반증 가능성 원리를 원용하여 이 점을 논의한다. ㆍ자유는 자율(自律 autonomy)
    자유에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걸림이 없다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가 있겠다.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이 좋다는 데는 이의가 없겠으나 ‘걸림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의 걸림 없는 행위가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서‘자유는 자율’이라는 칸트의 말을 많이도 들었다. 자유란 아무 것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방종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을 제어하는 자율이라는 것이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주어진 규칙을 알아서 잘 지키라는 뜻으로 반복시켜 주입시키려 한 구절이었지만 실은 나는 그 말이 ‘자유가 자율이다’라는 사실판단을 의미 하는지 아니면 ‘자유는 자율이어야 한다’는 당위판단을 의미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결국 나는 이 말을 모든 행위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규칙 내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뜻의 당위판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한문수업시간에 공자가 고희(古稀 70세)에 이르러 도달했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멋진 구절과 연결시켜 자유를 이해하려고도 했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규칙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인데 신비로운 듯도 하지만 언뜻 자기모순같이 들리는 이 말은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 수양이 높이 쌓여 규칙에 어긋나는 것을 처음부터 원하지도 않게 되다보니 마음이 원하는 그 나머지 모든 일을 다 해도 아무런 법도도 어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이다. 나는 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의 경지라고 생각했고 공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이라고 판단했다.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의 말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칸트(왼쪽 사진)는 모든 도덕법칙이 충족시켜야 할 필요조건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어떤 법칙이든지 그것이 도덕법칙이려면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이에만 적용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적용 안 되는 규칙들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 사회 전체에는 보편화 될 수 없으니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는 분들에게만 친절하고 낯선 사람들에게는 적대심을 품고 대하라’는 규칙이 있다고 해 보자. 이것이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일부 집단에서 한 동안 통용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인류 전체에 적용하면 다른 낯선 사람들에게는 우리 또한 낯선 사람이어서 결국 그들도 우리를 적대감을 가지고 대해야만 한다는 규칙이 되고 만다. ‘ 의견이 다른 이들을 적대하라’라는 규칙 또한 마찬가지 문제에 다다른다. 우리도 그들에게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니 그들이 우리를 적대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理性)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결과다. 칸트가 직접 든 좋은 예는 ‘약속’인데,만약 ‘약속은 편리에 따라 마음대로 깨도 좋다’는 규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쉽게 약속을 어기게 되어 결국 곧 ‘약속’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너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규칙은 약속이라는 제도 자체와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의 실천이성은 이렇게 보편화 불가능한 규칙을 도덕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정직하라,’‘훔치지 말라,’‘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규칙들은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서 도덕법칙이 될 필요조건을 충족한다.
    자유에 대한 규칙 또한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 아래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가 자율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엇이든 걸림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해를 입히는 결과가 되어 결국 모든 이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율 없는 자유는 자유 자체에 대해 모순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율이어야 한다’라는 규칙만이 보편화 가능하고 따라서 도덕법칙이 될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도덕법칙의 보편화 가능성 원리는 윤리학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그 원리에 따르면 자유는 자율이어야 한다. ㆍ방편
    내가 서양 불교철학자들과 토론하다가 놀란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방편(方便)’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뜻밖이었는데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고려해 보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방편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고 서양인들이 그것에 관대하지 못한 이유를 들어 보겠다. 석가가 열반한 뒤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석가의 가르침이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른 점이 여럿 발견되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석가가 한 지방에서 “(키가 175cm인) 철수는 키가 크다”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철수는 키가 작다”라고 말했다는 예를 가정해 보자. 일견 상호 모순되는 주장이다. 둘 가운데 최소한 하나는 틀렸다. 이렇게 외견상 모순으로 보이는 석가의 가르침을 정합적으로 뜻이 통하게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방편’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처럼 사람들이 작은 곳에서“철수는 키가 크다”라고 함이 적절하겠고, 네덜란드처럼 남자 평균 신장이 185cm가 넘는 곳에서는 “철수는 키가 작다” 라고 해야 옳겠다. 또 컵에 반쯤 찬 물을 가지고도 우리는 보는 관점에 따라 “겨우 반밖에 안 남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반이나 남아있네”라고도 볼 수 있다. 둘 다 옳다. 석가가 방편을 도입하는 경우는 주로 중생구제와 관련된 맥락에서 듣는 이의 교육적 배경이나 석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의 정도에 따라 가장 적절한 가르침을 선택할 필요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는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쉽게 업과 윤회를 설하셨지만 좀 더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같은 목적을 위해서도 무아와 연기를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논하는 진제(眞諦 ultimate truth)와 속제(俗諦 conventional truth)의 구분도 이렇게 중생구제가 궁극적 목표인 불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준비된 정도에 따라 그들에게 최상의 혜택을 주기 위해 선택적으로 마련된 방편들로 보기도 한다. 서양 불교철학자들이 ‘방편’을 좋아하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들이 옳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의 거부감을 이해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불교를 전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다. 첫째는 서양 특히 미국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patronizing’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데 이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친절하게 행동하거나 설명하는’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번역이 잘 안 된다. 친절한 척 하지만 그것이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쾌하다는 것이다. 평등의식이 강하고 개인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미국인들은 그들이 성인(成人)인 이상 개인을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진리의 가르침이 있다면 이를 솔직하고 분명 하게 그리고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제시해야 하며 이를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못하는 것은 듣는 이의 몫이라고 본다. 그래서 듣는 이의 자질을 고려한다면서 방편을 사용한다면 무례하다고 반발할 것이다. 선의로 사용하는 방편을 많이 허용하는 한국에서는 생경하게 느껴질 문화인데 미국인들에게 ‘어리석은 중생’과 같은 표현을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불교를 쉽게 오해하게 될 우려가 있다. 위보다 더 중요한 둘째 이유는 서양학자들은 동아시아 여러 불교학파들의 극히 상이하고 때로는 상호 모순되기도 하는 견해들을 모두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이론적으로 배치됨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일부 불교도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 및 티베트 불교 전공인 한 세계적인 철학자는 예전에 내가 동아시아불교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보겠다고 하자 심지어 극구 반대하기까지 했다. 동아시아 불교가 학문적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그의 말을 안 들었지만, 석가의 연기법이나 대승의 공에 대한 가르침이 시절인연에 따라 불교라는 같은 이름 아래 그와 정반대인 실체론이나 실재론의 모습 으로 제시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니 문제가 없다는 것과 같은 입장에 이들은 강하게 반대한다. 그들은 이를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판단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이것이 최소한 학문적으로는 무책임한 태도로 여긴다. 또 한편 이런 식의 해석은 각각의 다른 불교학설이 모두 정당화되는 이유가 ‘우월의식을 가지고 중생을 내려 보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가엾어서 알아듣기 쉬운 가르침으로 살짝 바꾸어 (속여?) 가르쳐 주어도 상관없다’는 (patronizing하는) 태도를 반영한다고 비칠 수도 있어서 서구인들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비불교도들 에게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방편이란 내게는 불교의 훌륭한 교육 방법이고 우리 삶을 더 풍부하고 융통성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러나 나는 불교인들이 이것을 너무 많은 목적을 위해 빈번하게 또 간혹 무절제하게 사용한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이들이 방편이라는 도구의 존재 이유에 회의를 품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을 우려한다. 위에서 예로 든 ‘약속은 편한 대로 깨라’ 또는‘자유는 무제한의 자유’라는 것과 같은 태도가 약속과 자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모순된 결과를 초래하듯이,방편도 남용하면 사람들이 방편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또 거부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설을 진지하게 제시해 놓고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건 그냥 방편으로 내놓은 것이었을 뿐이야’라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한 두 번이면 모를까 결국 내놓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잃게 되고 또 더 나아가 방편이라는 도구 자체에 대한 신뢰감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마찬가지로 방편의 사용 또한 조심스럽게 제어되어야 한다. ㆍ반증 가능성 원리 (the principle of falsifiability)
    고대 그리스에는 신탁(oracle)으로 유명한 델피라는 곳이 있었다. 그리스 어느 도시국가의 왕이 막강한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염려되어 델피의 사제들에게 부탁해 신탁을 얻었다: “더 강한 자가 승리하리라.” 이를 두고 자신의 국가가 더 강하니까 승전할 것이라고 해석한 왕은 한껏 고무되어 페르시아에 전쟁을 걸었다가 무참히 패했다.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 온 그는 델피로 다시 찾아가 사제들에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사제들은 “페르시아가 더 강한 자였으니 신탁은 역시 옳았다”라고 대꾸했다. 이것이 신탁이나 점성술(astrology) 또 사주팔자 보는 점술가들이 그들의 예언을 내놓는 방식이다. 표현을 애매하게 하고 또 모호한 말들을 끌어들여 이런 저런 천차만별한 방식으로 해석을 가능하게 해 놓고는 자신들의 예언이 언제나 적중한다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태연하게들 말한다. 해석만 요령껏 한다면 “내년에 동쪽으로부터 온 귀인을 만날 것이다”나“소중한 이가 그대 곁을 떠날 것이다”와 같은 예언이 맞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들은 온갖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언제나 확증될 수 있는 것들이다. 결코 반증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표현들을 쓰는 방법을 이용해 점술사들은 수 천 년 동안 꽤 성공적으로 생계를 이어 왔다. 당한 사람들은 물론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신비한 예언이라고 착각한 우리 보통 사람들이다.
    20세기 중반 철학자 칼 포퍼 (Karl Popper,오른쪽 사진)는 점성술이나 아들러(Adler)의 정신분석학 같은 체계들은 그 주장들이 언제나 옳다는 쪽으로 해석 가능하게 되어 있어서 결코 반증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뢰할 수 없다고 논증했다. 흔히들 말하듯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이론은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 이론으로 빛이 태양과 같이 중력이 큰 물체 곁을 지날 때 그 중력으로 인해 빛의 진행 방향이 휘게 된다며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히 반증 가능한 예상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이 예상이 적중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포기하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그 이후 인도에서 관찰된 일식을 통해 빛이 휨이 실제로 확인되었고 이것이 그의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포퍼는 아인슈타인이 스스로의 이론을 선명히 기술하고 그 이론에 따라 나오는 예상을 분명히 내놓으며 관찰이나 실험으로 비판에 노출시켜 반증 가능하도록 해 놓은 열린 자세야말로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태도라고 하면서 반증 가능성 원리를 제시 한다. 포퍼는 반증 가능성 원리를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 원리가 신뢰할 만한 가르침과 그렇지 못한 가르침을 가르는 기준으로도 ㆍ원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 천 여 년 동안 교회는 교황은 오류가 없다(infallible)는 무류론(無謬論)을 주장했다. 지금 보면 참 황당한 이야기지만,당시에는 교회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신의 권위를 내려 받았다는 교황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모두 신의 섭리에 맞는다는 생각이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20세기 중반부터 회교권을 침략한 십자군 전쟁이나 과학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과 처형 그리고 마녀 사냥과 같이 여러 세기 전에 저지른 일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 왔다. 중세 천 년 이상 교황의 어떤 말이나 행위도 언제나 옳아서 그것이 결코 반증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반세기 이상 교회와 교황은 스스로 그들의 견해가 반증 가능하다고 천명해 왔다. 이분들을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어 반갑다. 그런데 나는 오늘날 우리 불교계 일부가 혹시 다른 분들에게 서양 중세 교황과 비슷하게 보일까봐 염려될 때가 종종 있다. 깨달은 (깨친) 다음에 보면 역사상 존재했던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불교 학설들이 모두 시절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방편에 불과해서 궁극적으로는 이런 상이 점이 아무 문제도 없다는 주장이 그런 것이다. 깨친 차원에서는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무류(無謬 infallible)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신의 오묘한 섭리를 대행하는 교황의 견해가 무류라는 이야기와 구조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학설 뿐 아니라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세 교황의 어떤 행위도 인간의 도덕적 판단 영역을 초월하고 있으므로 인간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과 깨친 이들의 초월적 행위를 일반 도덕이나 계율로 판가름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서로 그다지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가 무류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20세기 중반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그것을 이해했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래서 신뢰를 많이 회복했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는 어떤지 궁금하다. 아직도 이론적으로나 행위로나 무류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가? ㆍ깨침, 자유 그리고 방편
    어떤 학설이나 이론도 분명히 기술하고 선명히 제시해서 당당히 비판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것이 학문하는 열린 자세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요구할 것이다. 이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포퍼가 밝힌 바와 같이 점성술이나 아들러의 정신 분석학처럼 오로지 이론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 임시가설을 도입하거나 궁색한 해석을 남발해서 반박을 피하려고만 의도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 우리 시대가 지향하는 제대로 된 소통을 위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반증 가능한 형태로 분명히 내놓아야 한다. 처음부터 반증 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애매모호한 기술을 하거나 아니면 편리에 따라 그때그때 해석을 바꾸어서는 정상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소통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소통이 막혀 불통이 되면 결국 남에게 자신의 의견과 의지를 강요하는 권위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막무가내 식 갈등이 불가피하다. 나는 불교의 깨달음(깨침)에 대한 가르침도 그것이 무엇인가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명히 기술되고 반증 가능한 형태로 제시되며 비판에 당당히 노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신심을 기대할 수 없는 비불교들에게도 설득력이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침이 언설로 기술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고 단지 어떤 특정한 체험이나 체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는 처음부터 비판에 노출될 수 없고 또 원칙적으로 반증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깨침에 대한 견해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비불교도들에게 새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깨치면 대자유인이 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자유는 자율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과 그의 보편화 가능성 원리가 깨친 이들의 자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대다수 불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불자들도 자유를 남용하면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구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깨치기만 하면 실천이성의 영역인 도덕법칙을 넘어서는 초(超)도덕의 차원으로 (또는 그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지로?) 들어가니 보편화 가능성 원리를 적용받지 않고 아무 걸릴 것도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주장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될지 의문이다. 방편 또한 마찬가지다. 방편을 남용하면서 잘못을 저지르고는 그냥 방편일 뿐이었다고 하거나 또는 맥락에 다르게 해석을 바꾸어 잘못된 방편에 줄곧 변명을 하면 결국 사람들이 방편 이라는 도구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되어 방편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하게 될 것이다. 자유와 방편 모두 남용하면 방종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ㆍ자유와 방편 그리고 보편화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
    불교인들의 자유도 자율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와 관련해서 논의했듯이 자유는 방종이 되어 결국 우리 모두의 자유를 훼손시키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실천이성은 자유는 자율이어야 함을 명령한다. 한편 방편에 대해서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 외에 반증 가능성 원리도 추가하여 우리 불교인들 스스로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 어떤 가르침이나 학설을 방편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1) 이론적으로는 그 내용을 분명히 기술하고 표현해서 반증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합리적 토론의 규칙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어야 하고 (2) 실천적으로는 도덕법칙의 보편화 가능성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깨쳤다고 말이나 행위가 모두 자유분방해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적이 있는가.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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