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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와 다른 학문의 비교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浮萍草 2016. 1. 5. 12:29
    “비교논의, 융합 차원으로 승격시켜야”
    “존재하는 모든 진리에 대한 포괄적인 가르침 체계로서의 불교가 존재할 뿐”
    한국에도 제법 많은 눈이 냈다. 그러나 미국의 미네소타에는 지난 2일에 벌써 20cm 가량의 눈이 내렸다. 미네소타 주립대 철학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홍창성 교수가 한 편의 글과 함께 서울 날씨는 어떠냐고 물어왔다. 답변을 해드려야 했으나,동국대 김건중 학생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터라 경황이 없어 제대로 답변도 드리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미디어붓다>에 홍창성 교수의 에세이가 연재된다는 점을 알려드리는 것인 것 같다. 홍창성 교수는 “한국에서 불교와 서양철학 또 불교와 과학에 대한 비교논의가 많이 이루어져왔다는 것을 보고 이런 비교논의의 학문적 성격에 대해 한번은 비판적 (철학적) 성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에세이를 써 보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논문 쓰기에 익숙한 학자로서 에세이 스타일의 글은 생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자의 생각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것에는 에세이가 더 유용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어떤 특정인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 글을 읽고 좀 당황하실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계에 꼭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서 써 보았다. 일반대중을 위한 소프트한 글도 써 보라고 권유하셔서 시작한 작업인데,걱정한 대로 역시 딱딱한 철학논의처럼 글이 되었다. 다음에는 부드러운 글을 짧게 쓰도록 노력해 보겠다.” 이 글에서의 글쓰기는 저서나 논문을 표기하는 한국식 표준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홍창성 교수가 편리한 방식의 글쓰기가 될 것이다. 월 3차례 안팎으로 게재될 ‘홍창성 교수의 철학 에세이’에 <미디어붓다> 독자 여러분의 동행을 바란다. - 편집자

    ▲   사진=장명확

    불교와 다른 학문의 비교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ㆍ비교논의와 학문성 국을 떠난 지 오래지만 복이 많아 몇 해 전부터 한국의 몇몇 스님들 그리고 불교계 인사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불교와 서양철학 또 불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져 온 것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논의가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비교논의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었다. 내가 비교논의의 방향과 그 학문성에 대해 비판해 보고자 함은 기존의 비교논의가 가진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앞으로 더 나은 논의를 이룰 새로운 시도를 해 보자는 것이다. 비판적 고찰 없이 진행하는 불교와 서양철학 그리고 불교와 과학의 비교논의는 자칫하면 그 학문적 엄밀성을 결여할 수 있다. ㆍ마르크스변증법과 소립자물리학
    일화를 소개하며 비교논의가 학문적 엄밀성을 확보하기 어려움을 보이겠다. 내가 대학원생이었던 1980년대 말 한국의 대학가 특히 철학과는 공산주의철학을 신봉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공산주의철학을 옹호하기 위한 학위논문을 쓰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당시 한 학생의 석사학위논문 발표회에서 이명현 교수가 제기한 날카로운 질문을 2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논문은 마르크스변증법과 현대 소립자물리학의 비교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 요점은 소립자물리학과 마르크스변증법이 잘 통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변증법이 소립자물리학만큼 아니면 그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주장은 이명현 교수의 질문 하나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네의 주장은 변증법과 소립자물리학이 양립가능(compatible)하다는 것인가,아니면 변증법이 현대 물리학을 포함하고(include) 있다는 것인가?” 그 학생은 질문의 뜻을 이해 못했는지 아니면 답변을 할 수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질문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궁색한 답변을 했다.
    이명현 교수(왼쪽 사진)의 질문을 분석하며 비교논의의 학문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1) 이 논문의 요지가 변증법과 물리학이 양립가능하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면 이 논문은 다분히 사소한(trivial) 의미를 지니는 논의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소립자물리학과 양립 가능한 철학이나 종교 이론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불교와 도교가 물리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음은 잘 알려져 있고 또 역사상의 수많은 철학 이론이 물리학과 양립 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변증법이 소립자물리학과 양립 가능한 수많은 이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면 이렇게 순진하게 양립 가능성을 주장 하는 사소한 논지는 석사학위논문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야 한다. 한편 서양철학에는 어떤 한 현상도 기존의 이론에 일치하는 것으로 또 동시에 위배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논증이 있다. 말하자면 소립자물리학이 설명하는 미시현상은 변증법에 일치하는 것으로도 또 동시에 위배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변증법과 물리학의 비교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학생의 논지가 (2) 마르크스변증법이 소립자물리학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만약 이것이 옳다면 변증법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만 하면 현대 물리학이 자동으로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물리학자들은 철학자들로부터 논리학을 배워 변증법을 분석하기만 하면 그들의 물리학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물론 허황된 이야기다. 이 학생의 주장이 변증법이 물리학을 포함한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1)과 (2) 이외에 비교논의의 논지가 지향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명현 교수의 질문의 의도는 변증법과 물리학의 비교논의는 학문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작업임을 보이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목적이 명쾌하게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학문적 성과로 주목받을 만한 제대로 된 비교논의를 이루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런데 겉으로 나타나는 비교논의의 신기함과 흥미로움에 현혹되어 학생들이 엄밀한 학문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기는 생각보다 쉽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시절에 경험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ㆍ논리학의 기본원리와 데카르트의 <명상>
    영국인 교수가 데카르트의 <명상>을 대학원 세미나로 가르치고 있었는데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 학생이 <명상>의 모든 논증이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일률(A는 A이다)과 모순률(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복이 많아 한국에서 이명현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는 이 주장이 <명상>과 논리학의 기본원리가 양립가능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논리학의 기본원리로부터 데카르트의 <명상>이 도출된다는 것인지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위에서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는 그 작업이 사소한 가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또 후자의 경우는 전혀 불가능한 작업임을 덧붙여 코멘트 하기도 했다. 사람은 사람이고 또 사람은 사람 아닌 것이 아니며,하늘이 푸르면 하늘이 푸르고 하늘이 푸르면 하늘이 푸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 원리와 양립가능하지 않은 학문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양립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학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한편 이런 논리학의 원리를 아무리 분석한들 도대체 어떻게 데카르트의 <명상>에 나오는 철학적 논의들을 도출해 낼 수 있겠는가. 가망 없는 이야기들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최고의 엄밀성을 요구하는 미국 주류 철학계에서 이런 종류의 비교논의는 설 자리가 없다. 그 세미나의 담당교수는 나와 십분 동의했는데, 헝가리 출신 학생과 두 미국인 학생은 이 비교논의의 신기함에 매료(현혹?)되어 그 주장을 그대로 견지했다. 20여년이 지난 오늘 뒤돌아보면,이 가운데 한 미국인 학생은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대학원을 떠나야 했고 다른 미국인 학생은 학위를 마치는데 16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헝가리 학생은 졸업은 했으나 정규 교수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분석철학계통의 학자들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의 미국 철학계에서 학문의 엄밀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대학원생들이 학자로서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ㆍ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
    비교논의가 미국 주류 철학자들로부터 존경받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철학회에서 어떤 중국 철학자의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비교논의를 주제로 한 논문 발표가 있었는데,이때 논평을 맡은 미국철학자가“멀리서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하게 보이기 마련이다”라면서 비교논의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낮추어 보는 코멘트를 한 것을 기억한다. 공자의 윤리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virtue ethics)가 유사성이 있다는 이 중국 철학자의 주장에 철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논평자도 유사성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논평의 요점은 ‘그래, 그래서 뭐하자는 것인가 (OK, so what?)’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위대한 만큼 공자의 윤리설도 위대하다는 것인가.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국판인 공자의 윤리설을 미국철학계도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는 것인가. 실은 대부분 미국대학 철학과에서는 비교 및 대조를 주제로 한 과제물은 학부 저학년에서만 받아 주지 학부 고학년이나 대학원 과정에서는 이런 주제로 글을 써서는 과목을 제대로 이수할 수 없다. 교수들이 학문적 성과에 대한 기준을 철저히 견지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중의 대부분이 교수들인 미국철학회의 발표회에서 학부 저학년 수준의 논문을 발표한 그 중국 철학자에게 거의 예의에 어긋나는 논평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 것이다. ㆍ비교논의와 취향
    비교논의에는 사물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 비슷하게도 또 다르게도 보일 수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도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이 문제점을 살펴보자.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비슷한가 아니면 다른가? - 답변은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둘 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다녔고 민주당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는 점에서는 같으니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남부 출신의 체격이 큰 백인이고 다른 사람은 북부 출신의 호리호리한 흑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렇게 보는 관점에 따라 비교의 내용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비교논의에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엄밀한 학문성을 요구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적용하는 기준과 관점에 따라 그때그때 그 작업의 성공 여부가 달리 결정되는 비교논의를 미국과 영국의 주류 철학자들은 일종의 호기심거리나 지적 유희를 즐기는 취미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ㆍ불교와 다른 학문과의 융합적 논의는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지금까지 비교논의의 문제점들을 비판해 보았으니 이제는 내가 생각하는 비교논의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보겠다. 불교와 다른 전통의 철학 그리고 불교와 과학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 것만으로는 학문적으로 성취하는 바가 거의 없고 따라서 불교에 큰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많은 이론들에서 서로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단순한 비교논의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해 전까지 한국에서도 학생들을 여러 해 가르쳤던 불교철학자 마크 시더리츠 교수(오른쪽 사진)가 주장해 온 것처럼 우리는 비교논의를 융합(fusion)의 차원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이 ‘융합’이 비교와 어떻게 다른가를 예를 통해 살펴보자. 요즈음 서양철학계에는 불교의 무아(無我 non-self)론이 자아(self)론에 관한 철학서적의 가장 마지막 챕터를 이루곤 한다. 불교의 무아론은 서양에 존재했던 자아에 관한 최초의 이론보다도 더 오래 전에 제시되었다. 그러나 역사상 존재했던 그들의 어떤 자아론보다도 철학적으로 더 세련되고 앞선 논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결론 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런 챕터들에는 불교의 무아론이 서양철학의 용어들과 논증방식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 또 서양의 자아론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불교철학이 선명하게 뚫어보고 그 답변을 제시해 왔음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서적의 불교 무아론에 관한 챕터들은 결코 신기하고 흥미로운 비교논의로 독자의 주목을 끌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챕터들은 서양 철학자들 입장에서 볼 때 자아에 관한 철학적 논의의 깊이를 더해 주는 책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론이 서양철학의 자아에 대한 논의를 한층 더 세련되게 만들어 주었고 또 한편 불교 무아론을 서양철학의 용어와 논증들로 재구성해 봄으로써 아직껏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던 일부 논의를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얼마 전부터는 신경과학자들과 인지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 결과를 불교의 무아론으로 표현하며 자아 또는 무아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더 깊게 해 가고 있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무아론은 불교가 서양철학과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해 주고 또 지금껏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 좋은 예이다. 물론 그 반대의 방향으로도 좋은 만남이 이루어져,서양철학과 과학 덕분에 이제 우리는 불교의 무아론을 좀 더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조명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는 융합논의의 좋은 사례이다. 나는 지금까지 불교계에서 이루어진 비교논의가 이렇게 융합논의로 승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또 나아가 그것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학문적 논의로서의 자격이 있지,그렇지 않고 단지 특정 관점에서의 비교를 통해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그 가치를 부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몇 해 전 우연히 접한 현응스님(왼쪽 사진)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는 한국의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융합논의를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실현하고 있는 불교철학서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스님은 동아시아의 여러 고전을 인용하며 스님의 논지를 펴고 있는데,옛 문헌의 내용들을 스님의 현대적 언어로 완전히 소화해 독자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저술은 현대서양분석철학에서 이룩한 철학적 성과물도 불교의 주제들을 논의하는데 서로 어색하거나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자연스럽게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극히 이질적일 것 같은 동서양의 서로 다른 전통의 철학적 논의들이 서로 아무런 거부 반응도 일으킴 없이 잘 녹아 있다. 독자들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물론 스님 스스로가 어떤 비교나 대조 또는 융합논의를 지향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이 책을 저술하지는 않았다. 스님은 그저 다양한 출처로부터 주제와 내용을 선택해 스님이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불교의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도 더 융합논의가 잘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ㆍ모든 학문을 융합하는 가르침으로서의 불교
    조성택 교수(오른쪽 사진)는 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그 외에 다양한 학문적 성과들이,그것들이 진리를 규명하려는 노력인 한, 모두 불교의 가르침 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언뜻 보기에 다소 파격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조교수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부처님 가르침의 깊이와 그 다양성을 헤아려 본다면 오늘날 여러 학문분야의 훌륭한 연구 성과들을 불교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이들 분야의 연구 업적을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의 가르침 안으로 받아들여 진리를 가르치는 포괄적인 체계 로서의 불교를 더 내용이 풍부하고 또 엄밀한 가르침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옳은 가르침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게 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어떨까. ‘비교논의’나 ‘융합논의’라는 말도 실은 모든 가르침이 결국은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잠시 수단으로 쓰는 교육 목적상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불교 안으로 다른 학문들이 포함된 다음에 뒤돌아본다면,‘비교논의’나 ‘융합논의’라는 표현들이 실은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하겠기 때문이다. 불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 안으로 포함되어야 할 철학이나 과학이 불교 밖에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에게는 존재 하는 모든 진리에 대한 포괄적인 가르침의 체계로서의 불교가 존재할 뿐이다.
    ㆍ 홍창성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 분과위원회장 역임.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계통의 영어로 된 논문들을 발표해 왔고, 불교 철학과 관련된 한글 저술로는‘서양철학으로 논증하는 불교의 무아론’,‘불교– 역사 사회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의 에세이와 논문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언어논증’이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불교철학 소개서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 등을 집필하고 있다.

          color="#9932cc" size="1">■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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