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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지런함과 정신적 게으름 (mental laziness)

浮萍草 2016. 1. 12. 12:37
    “한국불자들 지적·정신적으로 부지런한가”
    “현재의 불교는 우리를 지적·정신적으로 더 부지런하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홍창성 교수(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의 두 번째 철학에세이는 정치 종교적 구호가 주는 함정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내용이다. 홍 교수는 정치 종교적 구호의 대부분은 고의로 논리적 오류를 범하면서 우리의 정신적 게으름을 이용해 모두의 고뇌를 더 깊게만 하는 문제들이라고 분석하고 이들 모두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판적 사고의 기본 법칙을 무시하면서 정치 종교와 같이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는 것은 수학과 자연과학을 무시 하며 만든 공학을 바탕으로 기계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이런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고 오히려 오작동으로 우리를 해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첫 번째 글에서 이미 많은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은바 있는 홍창성 교수의 두 번째 에세이에도 불교 지성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ㆍ부지런함과 정신적 게으름 (mental laziness) 양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아테네 유력 정치인들의 위선을 비판했다가 재판을 받고‘불경죄(不敬罪)’라는 추상적인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독배를 마셨다. 명목상으로는 신에 대한 불경이 죄였지만 실은 정치인들에게 지은‘괘씸죄’가 문제였다. 철학을 하는 나도 형이상학이나 심리철학 같은 이론철학 분야의 글을 쓸 때는 몰랐는데 현응스님(조계종 교육원장)이 설파하시는‘역사 속에서의 실천’과 관련된 글을 시작해 보니 곧 어쩔 수 없이 정치 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과 지도자들에게 괘씸죄를 짓기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들을 따라 다니는 업인 것 같다. ㆍ마녀사냥과 지적 게으름
    ▲  사진=홍창성 교수 일괄 제공.
    서양 중세에 악명 높던 마녀사냥 재판이 있었다. 이때 피의자가 마녀인지를 가리고자 그를 강이나 호에 던지고 관찰하곤 했다. 살아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물 위로 떠오르면 오직 마녀만이 그런 힘이 있다며 그를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가라앉아 익사했다면 그가 마녀가 아님이 분명하니 이제 신의 구원을 받았다 고 생각했다. 결국 일단 마녀로 의심받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재판이었다.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재판부의 지적 게으름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세의 종교재판에서 물어졌을 법한 질문 하나를 해 보겠다. “이제 신을 부정하기를 멈추었느냐? 그러냐, 아니냐?” 이 물음에 피고가 아니라고 답한다면 재판부는 “아직도 신을 부정 하는 너는 화형에 처해 마땅하다”라며 그를 처형할 것이다. 그러나 피고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재판부는“늦게나마 다행이지만, 너는 과거에 신을 부정했었다고 인정했으니 그 죄는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며 그를 화형에 처할 것이다. “예”라고 하든“아니요”라고 하든지 피고는 어차피 화형으로 죽게 되어 있다.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대학 교양과목인 일반논리학의 오류론(theory of fallacy)에 의하면 위의 물음은 복수 질문(complex question)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개의 질문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오도(誤導)하며 묻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과거에 신을 부정한 적이 있느냐?” 가 그 첫 질문이고 이 답변에 “예”라고 답한 경우에만 물어져야 할“그러면 지금은 그러기를 멈추었느냐?”가 그 둘째다. 그런데 “너는 이제 신을 부정하기를 멈추었느냐?”라는 물음은 이 두 질문을 하나의 질문인 것처럼 묻고 있다. 그래서 “예”나 “아니요”의 답변에 상관없이 신을 부정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재판부 판사들이 피고를 유죄로 몰아 처형할 목적으로 고의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어야 할까? 부지런히 지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한 번도 신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그러지 못해 그냥 “예” 또는“아니요”라고만 답변했다면 화형을 당했겠고.물론 중세에는 사람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적어서 위와 같이 “한 번도 신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있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에서 이 오류론을 비롯한 비판적 사고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지런히 지적 훈련을 쌓아 나가야 삶과 세계에 일어나기 마련인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잘못된 점을 정확히 잡아내며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지적·정신적 게으름이 몸을 덜 움직이는 게으름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ㆍ지적으로 부지런하다는 것
    유태인들이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 왔음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대학에 재직해 오다 보니 나는 어딜 가나 유태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대학원생 시절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 실은 좀 실망했다. 기호논리학 (수리논리학) 강의 조교를 하며 유태인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백인 학생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시험 고득점자의 대부분은 동아시아와 인도계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태인들이 언어 능력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교육방식 덕에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기회만 있으면 토론하고 논쟁한다. 지적으로는 누구에게나 도전하며 그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의 이야기로 이들이 얼마나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를 살펴보자. “키 큰 랍비와 키 작은 랍비가 유태교 성전 토라 한 구절에 있는 신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논쟁을 벌였다. 이들이 건강까지 해칠까 염려한 신이 찾아와 키 큰 랍비의 해석이 옳다며 이제 논쟁을 그만하고 쉬라고 일렀다. 그랬더니 키 작은 랍비가 ‘이제는 2대 1이로군!’이라며 신과 키 큰 랍비 모두에게 다시 질문을 퍼부었다.” 신과도 논쟁한다는 이 이야기는 그들이 지적으로 얼마나 공격적으로 훈련하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한 영화에서는 나치 수용소에 감금된 유태인들이 신을 피고로 법정에 세워 논쟁 끝에 신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유태민족을 보호해 주겠다는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신마저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그 어떤 권위에도 예외를 두지 않고 정열적으로 지적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며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논쟁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무척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유태인들이 지적으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며 이들의 지적 부지런함이 그들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본다. 불경의 많은 부분이 부처와 제자들 또는 부처와 외도와의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통에 따라서는 깨침을 위해 부처와 조사들의 권위에도 도전할 수 있다고 보는 불교는 유태인들의 문화와 공통점이 많다. 미국에서는 여러 유태인들이 그들 종교의 이런 저런 면에 지쳤다고 생각할 때 그들 종교의 장점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더 자유롭고 풍부한 문화 전통을 가진 불교를 접해 매료되어 불교로 개종해 왔다. 실제로 몇 해 전 한 유태교 회당을 방문했을 때 불자인 나를 그들이 참으로 반겨 주었고 어떤 분은 자신의 아들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 주기도 했다. 또 그 회당의 랍비는 미국에서는 유태교가 불교도 포함한다는 농담까지 해 회당에 모인 400여 명의 유태인들을 웃기기도 했다. 불교는 유태교가 가진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가진 문제점들로부터는 자유롭다. 불자들은 복도 많다. ㆍ우리의 지적·정신적 게으름
    우리는 유태인들만큼 지적·정신적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가.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게으르도록 강요받으며 자라고 교육받고 또 일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사들이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이 궁색해지면 다른 꼬투리를 잡아 학생들을 구타하곤 했던 기억이 여럿 있다. 질문에 답해보려는 노력에 게으르고 감정 조절에 게으른 탓이었다. 수업시간에 맞을까봐 질문 못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지적 훈련이 가능하겠는가. 머리를 쓰면 처벌받는 문화에서 어떻게 미래를 선도할 지성인들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교사가 말해주는 내용을 외워 사지선다 및 단답식 문제에 잘 답하면 우수한 학생으로 여겨졌다. 대학부터는 질문 때문에 구타당할 걱정은 안했지만 졸업 때까지 강의 시간에 열띤 토론이나 논쟁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강의 잘 받아 적고 외워서 시험 잘 치면 우수한 성적으로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다. 수리 능력 세계 최고의 한국인들의 사고력을 마비시킨 것은 맹목적 권위주의와 주입식 교육이다. 서양에는 존경은 ‘노력과 실천으로’ 얻어져야지 (Respect should be earned) 강요될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두려움과 공포는 강요될 수 있지만 존경심은 결코 그렇게는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자들이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라고 생각한다. 철저히 그리고 섬세히 준비해서 잘 가르치고 토론으로 학생들을 깨우쳐 줄 만큼 부지런하지 못해서 그렇다. 정성껏 가르친다면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애정을 받을 것이고 그렇다면 권위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 교육자들은 부지런해야 한다. 몇 해 전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강의 우수상을 받은 한 중진 교수가 자신은 상을 받게 해 준 그 강의를 위해 일 주일에 열 시간이나 준비했다고 자랑하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심리형이상학 세계 최고 권위이셨던 미국 대학원 시절 나의 논문지도교수는 70대 중반이실 때도 월요일 저녁 세미나 강의를 위해 최소한 토요일 일요일 이틀 이상을 읽고 쓰며 준비하셨다.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학교를 다녔는데 단 한 번도 내가 쓴 글에 대해 수업담당자의 코멘트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코멘트 없이 그냥 점수만 받고 논문만 통과되었다. 그러나 코멘트 없이 어떻게 글을 더 잘 쓰고 더 세련된 사고를 다듬어 나갈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 나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들이 쓴 글에 대해 담당 교사로부터 코멘트를 받아 왔다. 뿐만 아니라 구글 등을 이용해 친구들과도 서로 끊임없이 코멘트를 주고받는다. 나와 아이들 엄마도 에세이 수정을 도와준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모든 에세이를 친구 다섯과 부모의 코멘트를 받으며 하나씩 완성해 가고 있다. 그러면서 더 세련된 문장을 쓰고 비판적 사고력도 기른다. 물론 교사들도 세밀한 안내문으로 에세이 쓰는 요령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에세이에 코멘트를 달아 준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또 대학원까지도 이렇게 끊임없이 코멘트를 받으며 그들의 글과 사고능력을 계발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반면에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나는 미국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처음 유학 오자마자 첫 과제물을 제출하기도 전에, 미국 교수 들이 외국 학생들 특히 아시아 학생들은 논문을 제대로 쓸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옳았다. 한국에서 학교 다닌 거의 20년 가까이 한 번도 글쓰기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한국의 교육 환경이 열악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는 말라. 왜냐하면 한국의 교육자들에 대한 대우는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더 좋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인당 GDP는 미국이 두 배 정도 많은데,달러로 환산한 두 나라 교육자들의 급여 수준 등은 비슷하다. 그러나 미국 교육자들은 학생지도를 몇 배 더 많이 해 준다. 나도 내가 가르치는 모든 학생의 모든 에세이에 코멘트를 해 준다, 거의 모든 단락마다. 그래서 이런 교육자들로부터 훈련받은 미국인들은 실제로 사고력이 우수하다. 수학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아 상대적으로 수리 능력이 떨어지고 암기를 하지 않는 탓에 상식 문제에는 답을 잘 못하지만 평소 대화와 끊임없는 비판적 토론을 통해 쌓는 사고력 훈련 덕에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 능력은 우수하다. 현재 미국 인구가 3억 명 정도인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ㆍ지적·정신적 게으름을 보여주는 몇 예들
    내가 한국을 떠난 90년대 초반까지도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쉽게 편을 가르며 다투곤 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 보니 사교모임에서 특히 식사를 같이 할 때는 정치나 종교를 논의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식당이나 예술품 전시회, 영화나 연극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서양인들은 정치와 종교는 그 속성상 견해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서로 감정을 많이 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교모임 대화 주제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한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주제들을 피한다.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기 꺼리는 게으른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정치나 종교 같이 감정을 유발하기 쉬운 자극적(?)인 주제들만 논의하는 사람들을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보곤 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해 보겠다. 미국 대학 교수들은 정치학(political science) 전공 학생들이 여러 다른 전공 학생들과 비교할 때 지적으로 별로 성실하지 못하다고 여길 때가 많다. 여러 전공생들이 함께 듣는 일반 교양과목을 가르치다 보면 이를 확인하게 된다. 정치는 큰 주제를 다루기 마련이고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킨다. 그래서 아무 준비가 안 된 학생이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스스로 근사하게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거창한 이야기(big talk)들이 좋아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지성은 큰 주제를 대충 거창하게 토론할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제를 깊이 섬세하게 파고들며 논의할 때 드러난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어느 누구도 큰 주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지만,지적으로 부지런히 훈련한 사람들만이 작은 특정 주제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한국에서 소위 ’86세대의 수많은 학생들이 교수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교수들을 지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양서적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영어 수학만 공부하다가 대학에 들어와 감성을 자극하는 이데올로기 성향 서적 몇 권 읽고는 수 십 년을 연구한 교수들을 함부로 재단하곤 했다. 지적으로 게으른 학생들의 오만이었다. 원래 비판적 사고력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받아들이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으로 쉽게 흥분하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래 왔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사회에서 대학생들을 왜 지성인이라고 불러 주는지 이해 못했다. 영어 단어 몇 개 더 많이 외우고 수학 문제 몇 개 더 풀면 지성인인가? 저자나 편집자도 불분명한 이런 저런 글을 무책임하게 짜깁기 해 놓은 이데올로기 서적 몇 권만 읽으면 더 공부할 것이 없는가? 미국에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의 평균 IQ가 5점 정도 낮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참 불편한 진실이다. 나는 기독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를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일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신앙과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고 감성적인 면만 부각시키다 보니 교회를 통해 지성을 훈련할 기회가 적고 또 그러다 보니 지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게 돼서 그럴 것이다. 역사상 중세 천여 년 이상 서양의 지성을 보존하고 또 대변해 오던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불교계도 불자들의 평균 IQ가 일반인들 평균과 비교할 때 어떨지 한 번 조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미국 기독교 사회에 대해 위에서 비판한 바와 같이, 한국 불교가 부처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신심과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지 않나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또 혹시 불교를 통한 수행으로는 지성을 훈련할 기회가 적고 또 그러다 보니 지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불교계를 떠나가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치와 종교는 우리 삶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정성스런 마음으로 지적으로 예민한 수준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격한 감정 충돌 없이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밑에서 구체적인 예들을 더 들어가며 이 논의를 계속해 보겠다. ㆍ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중요성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지적·정신적 게으름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가를 살펴보며 우리 스스로의 나태함을 경계해 보자. 역사상 교회의 포교 목적상 다음과 같은 논리가 많이 사용되었다: “(갑)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야.” “(을) 어째서?” “(갑)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 “(을) 그렇게 쓰여 있다고 어떻게 다 믿어?” “(갑)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야. 거짓이 없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 논리는 결국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주장이다. 명백한 순환논법(circular argument)의 오류이다. 내가 가르친 미국 대학생들 대부분이 이런 논증을 들어보았다고 했는데 이런 문제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경전들이“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如是我聞)”로 시작한다고 해서 그 다음에 전개되는 내용이 온전히 부처의 강의 그대로인 것으로 믿는 것은 선결문제요구 (begging the question)의 오류에 해당된다. 정말로 부처의 강의를 들은 대로 전한다는 것을 증명할 독립적인 근거가 따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온 가르침을 후대에 문자로 기록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반박한다면 그것은 논쟁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답변이 아니다. 쓰여진 글을 그대로 믿는 사람에게 그런 증명의 의무(burden of proof)가 있지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그것을 보여줄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의도적으로 논리적 오류를 사용하며 우리의 지적·정신적 게으름을 이용해 왔다. 우파는“자본주의는 경제 분야에 있어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외치며 자본주의의 한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며 (강조(accent)의 오류) 쉽사리 흥분하는 대중의 감성에 호소한다.(대중에의 호소(appeal to people)의 오류). 반면 좌파는“사회주의는 경제 분야에 있어서의 평등을 추구한다!”라며 다른 문제점들은 언급 않고 평등만을 부각시키며 (강조의 오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대중에의 호소의 오류). 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흔히 썼던 ‘기득권과 민중’이라는 구분,그리고 요즘 많이 쓰는 ‘강자와 약자’라는 대결 구도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단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버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hasty generalization)를 통해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강자라고 다 나쁠 리 없고 또 약자라고 모두 선하지 않을 텐데, 이런 구호로 사람들을 감성적으로 자극해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이다. 정치적 운동의 편의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편의상’이라는 말은 결국 ‘게으르다’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이렇게 논리적 오류에 기반한 감성적 구호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우리는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지적·정신적으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기업체들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무수한 논리적 오류를 이용한다. 유명 영화배우가 사진 한 장 찍어 서류가방을 선전해 주면 그 가방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곤 하는데,이것은 그릇된 권위에의 호소(appeal to the inappropriate authority)의 오류이다. 서류가방 직접 들 일도 없을 그 유명 배우가 가방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런데도 정신적으로 게을러 이런 판단을 안 하는 우리는 그가 선전하는 가방을 산다. 또 상류층 사람들이 루이비똥 가방을 산다는 식의 광고를 보고는 계층 상승의 기분을 잠시나마 맛보려고 덩달아 무리하게 돈을 모아 같은 가방을 사려고도 한다. 이는 분위기에 휩싸이기 쉬운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종류의 대중에의 호소의 오류이다. 이렇게 쉽사리 흥분하기 쉬운 대중의 감정을 이용한 역사상 최악의 사례는 아마도 한국전쟁 당시 남침한 공산군과 중국의 문화혁명 때의 홍위군 그리고 월남에서 베트콩들에 의해 자행된 인민재판들일 것이다. 재판을 이끈 사람들은 현지인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감성과 분노를 자극하는 말 몇 마디 해 주고는 동의의 표시를 보이라며 박수 한 번 치게 하고는 피고들을 즉결 처형했다. 반지성주의의 극치였다. 내가 한국을 떠난 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의 지역갈등은 미국의 인종갈등보다도 더 심했다는 평을 들었다. 아무개는 어느 지역 출신이어서 어떻다는 선입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논리학에서 이는 사람에 대한 논증(argument against the person)의 오류에 해당된다. 무라까미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거나 아론은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의 의도는 탐욕에 기반하고 있다는 식의 판단이 그런 것들이다. 그 사람이 한 말의 진위를 그 자체로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의 출신배경이나 종교 또는 정치적 신념 따위로 그의 말을 재단하는 것을 논리학은 천 년 이상 동안 경고해 왔다. 저 사람은 남자여서 어떠어떠하고 또 저 분은 여자여서 어떻다,이 분은 불자여서 어떻고 저 사람은 기독교인이어서 또 어떻다는 식의 판단들도 모두 사람에 대한 논증의 오류에 해당된다. 그런데 역사상에는 자신들이 ‘철학’을 한다고 표방하면서도 이 오류를 부끄러움 없이 저지른 자들도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저 자는 자본가의 아들이고 또 저기 다른 자는 가방 끈이 긴 자이어서 저들의 말은 자신들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므로 노동자 농민은 저들을 신뢰하면 안 된다”고 사람에 대한 논증의 오류를 고의로 이용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러나 과학적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스스로가 부유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자가당착인가를 쉽게 볼 수 있다. 또 한국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는‘당파성(parteilichkeit)’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맹목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논증의 오류와 함께 대중에의 호소의 오류도 범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강자와 약자’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를 대중에게 밀어 붙이는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논증의 오류와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 모두 이용하고 있다. 한편 이‘약자’라는 말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차분히 이치에 맞게 설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의 정에 호소하며 논점을 흐리는 오류(appeal to pity)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죄인이 재판정에 어린 자식들이나 병들고 늙은 부모를 데리고 나와 선처를 호소하는 식이 이런 오류에 해당된다. 정이 많은 분들에게는 믿기지 않겠지만, 서양 사람들은 이렇게 동정심이나 감성에 호소하여 이성적 관점을 흐리고 문제를 비켜가려는 태도를 거의 경멸한다. 서양인들이 재미있어하는 일화를 하나 전하겠다. 부모를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청년이 재판정에 서서는“나는 이제 부모도 없는 불쌍한 고아이니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그것이다. 서구인 들이 감성해 호소하는 논점에 얼마나 거부감을 느끼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정치 종교적 구호의 대부분은 고의로 논리적 오류를 범하면서 우리의 정신적 게으름을 이용해 모두의 고뇌를 더 깊게만 하는 문제들이다. 이들 모두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의 기본 법칙을 무시하면서 정치 종교와 같이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는 것은 수학과 자연과학을 무시하며 만든 공학을 바탕으로 기계를 만들어 운영 하겠다는 것과 같다. 이런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고 오히려 오작동으로 우리를 해치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이들이 비판적 사고를 연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인터넷이나 서적 등을 통해 일반논리학 또는 비판적 사고 강의교재의 오류론 부분을 한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두 세 시간이면 족한 분량이다. 그 한 번 읽은 경험이 우리 삶의 질과 방향을 달리 결정할 수도 있다. 오류론은 게을러지기 쉬운 우리들의 정신적 면역력을 강화시키고 또 유지시켜 준다. ㆍ어느 재가자의 55년 용맹정진(勇猛精進)
    복이 많은 나는 미국 대학원 시절 심리형이상학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이셨던 한국 출신의 김재권 교수님을 논문 지도교수로 모셨다. 모든 대화와 이메일을 당시 불편했던 영어로 주고받았지만 내가 쓴 그 어떤 글의 단 한 줄도 오해하지 않으셨던 유일한 교수 셨다. 명민하실 뿐 아니라 성의껏 읽어주셔서 그랬다. 그런데 몇 해 동안 가까이서 모시다 보니 이분께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용맹정진’해 오신 것도 알게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평생을 같이 하신 사모님에 의하면 교수님은 대학원생이었던 20대 중반부터 80이 되어 은퇴하실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초저녁에 잠자리에 드셨다가 자정 무렵 일어나셔서 아침까지 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셨다고 한다. 여름에 휴가지에 가셔서도 사모님이 주무시는 새벽마다 홀로 일어나 연구를 계속하셨다고 한다. 말씀 몇 마디만 나누어도 김재권 교수가 얼마나 맑은 정신의 소유자인지를 알게 되는데 그런 정신으로 55년 동안 철학적 연구를 위해 용맹정진하셨다. 어찌 보면 수십 년간 세계 최고 권위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현대철학을 이끌어 오신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 것도 같다.
    내가 대학원생 시절에도 환갑이 넘으신 분이 토요일도 없이 언제나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연구실에 나오셔서 하루 종일 연구에 몰두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댁에 가셔서 자정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또 연구하셨다. 평생을 그렇게 하셨다. ‘경외(敬畏)’라는 표현이 부족하다. 타고난 맑은 정신만으로 그분의 학문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에서 나온 어리석은 판단이다. 지적·정신적으로 지극히 부지런히 사시면서 55년 동안 용맹정진하셔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하며 이번 논의를 마무리하겠다. 한국의 불자들은 지적·정신적으로 부지런한가.그리고 현재의 불교는 우리를 지적·정신적으로 더 부지런하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한국을 떠나 외국에 산 지 24년째인 내가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다. 어떤 답변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다가 문득 스스로 불교에 애정이 깊다고 하신 김재권 교수의 55년 철학적 용맹정진이 불가에서의 수행으로 치면 몇 년 정도에 해당 될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궁금하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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