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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의 서양철학적 분석

浮萍草 2016. 3. 7. 11:42
    “현상세계는 집착할 것 없는 환(幻)”
    “空에 어떤 實在로서의 위상을 부여하는 순간 수많은 철학적 문제에 직면” ㆍ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의 서양철학적 분석
    승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非有非無妙有”라는 문장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아마도 천여 년 이상 가장 많이 회자되어 온 구절의 하나일 것이다. 불과 여섯 자로 이루어져 외우기 쉽고 또 시적 표현의 묘미까지 있어서 읊조리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감마저 준다. 본고는 “非有非無妙有”라는 짧은 구절 속에 담겨 있는 대승의 진리를 현대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여 그 이해를 돕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ㆍ“非有非無妙有”라는 표현의 논리적 문제
    본고의 주제와 관련된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 구절의 신비감 속에 숨겨져 있는 논리적 결점부터 간단히 지적하겠다. 非有非無妙有란 (1) 非有: 세상의 사물이 자성(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常主(상주)하지 않으며 (2) 非無: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斷滅(단멸)도 아니고), (3) 妙有: 사물은 이 상주와 단멸이라는 두 극단 사이 가운데 (中道(중도)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연기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現象(현상, phenomenon, 幻(환))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밑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묘하게 있다는 妙有란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俗諦 속제 the conventional truth)이며 그것은 동시에 본질이 없이 空 (공)한 세계 (眞諦 진제 the ultimate truth)를 말한다. 눈 밝은 독자라면 벌써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논리적 문제를 간파했을 것이다. “非有”에서의 “有”는 상주론에서 말하는 자성을 가지고 영원히 있다는 존재자(恒有)를 의미한다. 그런데 “妙有”란 이 세상 사물이 연기로 인해 자성을 결여(空)한 채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非有非無妙有”에서 첫째 “有”는 상주하는 존재자라는 뜻이고 둘째“有”는 “妙”라는 서술어를 가지고 연기로 인해 空한 현상으로서의 존재자라는 뜻 이다. 한 문장에서“有”라는 같은 글자가 두 개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학에서 경고하는 모호한 표현의 오류 (the fallacy of equivocation)에 해당된다. 의미의 섬세한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또 존재론적 특성의 차이를 무시한 채 대승의 가장 중요한 논제의 하나를“非有非無妙有”와 같이 엄밀하지 못한 표현으로 이해해 왔음이 당황스럽다. 이 구절은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니,이제 우리는 비판적 논의를 통해 보다 엄밀한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외우기 쉽도록 짧게 표현하려고 진리를 왜곡시키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ㆍ논의를 위한 방법론
    대승의 여러 종파에 따라“非有非無妙有”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다르겠는데, 나는 가급적 龍樹(용수 Nagarjuna)의『근본중송(Mulamadhyamakakarika)』 의 내용에 충실하게 이 논제를 이해하고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非有非無妙有라는 논제는 천여 년도 더 전에 완성되었는데 그 동안 서양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제들과 관련해 신학적 또 철학적으로 많은 이론적 발전이 있어 왔다. 그래서 나는 서양철학의 가장 최근의 경향인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非有非無妙有 논제를 조명하고 비판하며 내 나름대로 그 이해를 향상시켜 보겠다. ㆍ논의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성철스님은 불교를 위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다보니 불교를 공부한다고 했다. 구도자로서 가장 훌륭하고 정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방법론적으로 달리 진리에 접근하려 해 온 나 또한 서양현대분석철학을 아무리 공부해 보아도 결국은 언제나 불교의 견해가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서 불교(철학)를 계속 공부한다. 불교의 철학적 논의는 학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적 황홀경에 빠뜨릴 정도로 정말 깊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느 중요한 철학적 논의도 극히 진지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다. 또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해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명확한 개념 정리가 요구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도 몇 가지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實在(실재 reality). “實在한다”라는 한자어는 ‘실제로(actually) 존재한다(exist)’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실재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영어로는 ‘real’에 가깝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이 ‘real’이라는 말이 그 뜻이 분명치 않게 쓰여 왔다. 아비달마론 계통에서는 ‘real’에 대한 분명한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은 채, 다르마(dharma 法)에 대해 ‘impartite(부분이 없는,복합체가 아닌)’이라고 하며 다르마들만이 실재한다(real)면서 ‘real’과 ‘impartite’를 의미는 다르나 그 적용 대상은 같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인 두 개념으로 보고 있다. 디나가(Dinnaga)와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를 중심으로 하는 Yogacara-Sautrantica 학파에 와서는 ‘real’이 ‘causally efficacious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 이라는 뜻으로 정의되고 이해된다. 중관의 空(공)사상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이라는 구절을 ‘연기의 그물망 안에 존재하는’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겠다. 한편 내가 읽을 기회가 있었던 한글로 된 몇 글들에서 “非有非無妙有”에서 “妙有”를 현상세계를 가리킨다면서 “實在(실재)한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는데,“실재한다”를 내가 해석하는 대로‘실제로 존재한다(actually exist)’라고 이해한다면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실재하는’이 영어에서의 ‘real’로 이해된다면 번거로운 철학적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현대철학에서 實在論(실재론 Realism)과 反實在論(반실재론 Antirealism)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실재론이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그것들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주관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의 본질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견해지만, 현재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이렇게 순진하게 존재세계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실재론은 실제로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 (dogmatic metaphysical realism)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요즈음은‘real’이라는 의미와 관련해서“실재”라는 말을 쓰면‘자성을 가지고 (인식주관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게 되어 현상세계로서의 妙有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현상세계에 대해 “실재하는”이라는 표현보다는 좀 번거롭지만“실제로 존재하는 (actually exist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妙有고 또 이것이 사물이‘실제로 존재하는’방식이라면 우리가 이 ‘번거로운’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2. 實體(실체 substance). 어떤 것이 그것의 존재를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즉 독립적 존재(independent existence)라면 그것이 실체이다. 한편 基體(기체 substratum)라는 개념이 가끔 실체의 개념과 혼동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체란 실체와는 다르다,우리가 사물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려 할 때,사물을 속성들이 어떤 한 바탕에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바탕이 바로 기체가 된다. 혹자는 기체를 속성 걸게(property hang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기법을 받아들이는 불교는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나 기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불교는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킨다. 불교에서는 실제로 있다고 인정하는 존재자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에도 - 오컴의 면도칼 (Occam’s Razor) - 잘 맞는다. 나는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불교 이론이 제대로 된 해석에 의해 모두 會通(회통)한다는 점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차이점이라면 모를까 만약 실체나 기체를 형이상학적 實在로 인정하려는 학파가 있다면 회통을 위한 해석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아뜨만(我, 참나,참마음)이나 브라흐만(梵, 절대적인 객관적 실재 또는 그것으로 잘못 이해된 空)과 같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 들은 연기와 空으로 존재세계를 이해해야 할 불교의 이론으로 해석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3. 同一性(동일성 identity). ‘동일하다(identical)’는 것은, 철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數的(수적)으로 하나이고 質的(질적)으로 같다’는 (numerically one and qualitatively the same) 뜻이다. 물론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 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겠다. 그러나 동일성의 개념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꽤 있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identical twins)는 실은 동일하지(identical) 않다 (Identical twins are not identical). 왜냐하면 생김새 등이 질적으로는 같지만 (qualitatively the same) 수적으로는 둘이어서 (numerically two)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not identical). 예를 몇 가지 들며 이 동일성의 개념을 더 설명해 보겠다. (1)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동전 두 개를 상상해 보자. 이 둘은 동일한가(identical)? 철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질적으로는 같지만 수적으로는 둘이어서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수적으로 하나여야 동일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2) 백범이 김구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 나중에 백범이라는 사람과 김구라는 사람이 비록 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백범과 김구가 하나의 (동일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하나의 인물이 두 다른 이름을 가진 경우일 뿐이다. 이 경우에는 철학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성이 성립된다. (3) 어떤 정사각형의 네 변을 각각 a, b, c, d라고 할 때 그것들의 길이가 모두 같으므로 수학자들은 흔히 쉽게 “a = b = c = d”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때 ‘=’ 기호는 네 변의 길이가 같다는 의미이지,각각 다른 네 변이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여서 철학적인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a, b, c, d의 네 변은 질적으로 길이가 같을 뿐 철학적으로 말할 때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수학의 엄밀하지 못한 표현이 우리를 오도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겠다. 4. 不一不二(불일불이). 동아시아 불교권에서“不一不二”라는 표현은“一(일)”과 “二(이)”라는 단어가 ‘하나’와 ‘둘’이라는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같다’와 ‘다르다’라는 질적 차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不一不二”와 같이 중요한 표현이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수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면 엄밀한 비판적 사고와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 하기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은 부주의한 (sloppy) 표현방식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不一不二’에서 “一”과 “二”를 숫자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떤 것이 수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어진 경우에 수의 전체집합이 {1,2}로서 이 두 숫자밖에 없는 경우에는 어떤 것이 수적으로 하나이거나 둘이어야지 하나도 둘도 모두 아닐 수는 없으니 不一不二는 명백한 모순이 된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 동시에 수적으로 둘일 수도 없고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해석에서는 “不一不二”가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편 “一”과 “二”를 질적으로 ‘같다(same)’와 ‘다르다(different)’로 생각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不一不二”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는 의미의 문장이 된다. 위에서 수의 전체집합이 하나와 둘만을 원소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듯이 여기서도 질적 속성의 전체집합은 {같다, 다르다}의 두 개 선택지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不一不二”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의미가 되어 위에서 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택지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질적으로 같은 것이 동시에 다를 수는 없고 또 다른 것이 같을 수도 없으니 질적인 해석에서도 수적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不一不二”가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어 온 “不一不二”라는 표현에 제대로 뜻이 통하게 하려면 좀 예외적인 해석이 필요하다.‘非有非無妙有’에서 ‘不二’는 ‘非有非無’에 쉽게 적용되고 이해되지만 ‘不一不二’는 ‘妙有’에 적용해야 논의가 시작되겠다. ‘妙有’에 대해 ‘不一不二’를 뜻이 통하게 하려면, 밑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경험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세계와 空의 세계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읽어야 된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했듯이 수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동시에 둘도 아닐 수는 없으며 또 질적으로 같지도 않으며 동시에 다르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위에서 밝힌 대로, 엄밀히 말해 “不一不二”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는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이 문장이 이치에 맞는 뜻을 가지게 하려면,“不一”일은 ‘질적으로 같지 않지만’으로, 그리고 “不二”는 ‘수적으로 둘도 아니다’로 해석해야 한다. 현상 세계와 공의 세계가 질적(속성)으로는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두 세계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백범과 김구가 같은 이름은 아니지만 이 두 다른 이름이 지칭하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이라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不一不二”라는 한 문장 안에서 숫자로 표시된 두 단어들이 첫째 숫자 “一”은 “不一”에서 ‘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고 또 다른 숫자 “二”는 “不二”에서 ‘수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는 논리학에서 경고하는 모호한 표현의 오류에 해당된다(the fallacy of equivocation). 그래서 불필요하게 신비감을 주는 “不一不二”와 같은 표현은 詩語(시어)로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엄밀한 논의를 위해서는 멀리해야 할 종류의 문장이다. 원래 신비감을 주는 표현은 논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거나 개념적 문제점을 은폐하는데서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우리는 이런 표현을 접할 때마다 일단 이런 저런 의심을 해 보아야 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로 그 문제점들을 파헤치려 노력해야 한다. 천여 년 전에 좀 덜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동아시아 불교의 표현들은 이제 엄밀하게 재검토해서 한국어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妙有에 대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인 것에 대해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다르게 기술된다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길을 찾아야 하겠다. 이 작업은 영어에 파묻혀 사는 나보다는 한국에 계신 독자들께서 맡아 주시는 것이 좋겠다.
    사진=장명확
    ㆍ칸트와 不二
    한 손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장미의 색깔과 향기 등을 느끼고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개는 색맹이어서 이 장미의 빛깔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벌집모양의 수 만개의 낱눈으로 형성된 겹눈을 가진 잠자리는 이 장미를 어떻게 볼까? 부엉이는 적외선도 볼 수 있다고 하며 매나 독수리는 놀라운 시각을 가졌다. 하지만 시력이 거의 없어 음파로 사물을 감지해야 하는 박쥐들에게 이 장미는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모든 種(종)의 개체들이 하나의 같은 꽃송이를 모두 다르게 본다. 그렇다면 이 꽃송이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모습일까? 칸트식으로 질문하자면, 그것의 物自體(물자체)는 무엇일까? 물자체는 존재하지만 생명체들은 물자체로부터 인식주관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해서 얻어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種(종)도 다른 종보다 물자체에 더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물자체는 우리가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that we know not what). 칸트에 의하면,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천적 직관 형식으로 받아들인 잡다한 내용을 12개의 개념(범주)로 질서지어주어 우리의 경험적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구성한 현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자체는 우리 현상의 인과적 근원으로서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상식과 통하는 견해이고, 또 한편 바라문교(힌두교)와 같이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주장과도 쉽게 양립가능하다. 한편 칸트는 경험적 실재론(empirical realism)은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고도 하는데,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 세계가 선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12개의 개념(범주)로 구성된 관념의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라고 해석한다. 20세기에 들어와 비트겐슈타인도 말하듯이, 실재론(realism)과 관념론(idealism)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는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견해가 언뜻 불교의 不二論과 유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출발하는 바라문교의 견해에 더 가깝다. ㆍ현상세계의 현대철학적 이해
    그러면 서양현대분석철학은 현상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지금 이 시각에도 여러 이론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지만 불교의 아비달마론과 유사한 트롭론(trope theory)이 많은 주목을 받아 오고 있다. 트롭이란 아비달마론의 다르마(dharma 法)와 유사한 존재자인데,트롭론은 만물을 속성개별자(property trope)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먼저 트롭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떤 이가 검은 색 구두를 신고 있다고 가정하자.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는 이 두 짝의 구두가 검은 이유가 ‘검정’이라는 보편자(universal 또는 보편적 속성)가 이 두 짝의 구두에 예화(instantiation)되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트롭론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그 대신 각각의 구두 짝에 우리가 통상 ‘검정’이라고 부르는 속성개별자(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가 존재 한다고 설명한다. 트롭론에 의하면 만물이란 아무런 基體(기체 substratum)도 없이 온갖 다양하며 무수히 많은 속성개별자들만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체가 허상 또는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는 아비달마론부터 개진되어 온 불교의 여러 논증을 알고 있고 또 현대 형이상학에서도 집합체 허구론은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의 하나이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대승에서는 아비달마론이나 트롭론과는 달리 다르마(法)에 어떤 자성이 있음도 부정한다. 이 점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지만 나는 다르마나 트롭들도 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空하다는 대승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현상세계를 설명하려는 현대철학의 트롭론은 대승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다소 빈약한 이론이다. 좀 순진하게 들릴 이야기가 되겠지만 자연과학적 시각을 비유로 도입해 보면 현상세계의 모습을 좀 더 불교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을 떠올려 보자. 태풍은 근본적으로 수많은 공기분자와 물분자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이동하는 현상이다. 태풍은 여러 인과적 작용에 의해 – 연기에 의해 – 생성 지속 소멸하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또 이 태풍들의 바탕이 되는 基體(기체)같은 것도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풍이나 허리케인은 “카트리나”나 “샌디”와 같은 고유명사까지 가지며 엄청남 인과적 결과를 초래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실체로서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아서 현상으로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우리를 포함한 모든 물체들의 모습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 몸만 하더라도 이 태풍과 같이 무수히 많은 여러 입자들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대 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심리현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도 두뇌에서 일어나는 이런 물리현상과 그 작용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는 어떤 것들일 뿐 이다. 한편 여러 입자들 자신도 그것들을 점점 더 미시차원으로 내려가 살펴볼수록 그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의 관계와 변화의 관점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소립자 물리학도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현대 과학적 이해는 불교의 현상에 대한 이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ㆍ데이빗슨과 不二
    존재세계 전체가 하나의 실체이며 정신(마음)과 물질이란 이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양상(mode)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17세기 스피노자의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데이빗슨(Donald Davisdon)의 사건이론(event theory)은 不一不二를 설파하는 불교철학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나는 그의 철학이 불교의 깊은 진리에 그래도 많이 접근한 견해로 판단한다. 그의 사건이론을 예를 들며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다리가 무너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무너졌다. 마포구에서 여의도를 잇는 서울대교가 무너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구조상의 문제점으로 무너졌다. 다리 하나가 갑자기 무너졌다. 어제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사건이 한강 위에서 벌어졌다. 어제 모든 석간신문 1면을 장식한 일은 한강에서 벌어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어제 오후 4시 35분에 무너졌다…. 원칙적으로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모두 어제 한강 다리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기술(describe)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많은 문장들이 수많은 다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술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데이빗슨은 우리의 심리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 머릿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어떤 신경다발이 흥분된 (excitation) 현상이지만 심리적으로 볼 때는, 예를 들어, 어떤 통증이 일어난 사건이다. 존재세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사건만이 존재하지만 물리적 관점과 심리적 관점을 적용해 보니 신경다발흥분이라는 사건과 통증 이라는 사건으로 달리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데이빗슨의 견해는 어떤 사건이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두 관점(개념)으로 기술된다는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사건이 두 개의 주요 관점 (심리적 물리적)에 따라 심리사건으로 또 동시에 물리사건으로도 기술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두 개의 사건이 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時空 속에 존재하는 어떤 구조가 없는 개별자 (a spatiotemporally bound unstructured particular)를 두 개의 관점에서 보고 기술한 것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빗슨을 비롯해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이 두 기술이나 관점들이 서로 상호교환가능하거나 환원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빗슨은 자신의 견해를 존재론적 일원론이자 개념적 이원론 (ontological monism & conceptual dualism)이라고 결론짓는다. 不一不二를 연상시키는 데이빗슨의 주장이 반갑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현상의 근원이 되는 그 자체로는 알려질 수 없는 존재자로서의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그의 견해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불교보다는 바라문교의 관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event)의 개별성(individuation)과 동일성(identity)이 그 사건이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맺는 인과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그의 견해도 대승의 非有非無妙有의 논제를 보여주는 모델로 나쁘지는 않으나, 우리의 기술과 관점에 존재적으로 선행하는 사건의 實在性(실재성)을 인정한다는 한계가 있다. 사건이 일단 우리의 인식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적용하는 관점에 따라 사건이 이러저러하게 기술된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 이것은 여전히 實在論(실재론)의 입장이어서 反實在論(반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대승불교와는 거리가 있다. 한편 데이빗슨보다 앞서 20세기 초반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도 우리가 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감각 현상을 “그것은 (實體로서의) 무엇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無도 아니다 (It’s not something, but it’s not nothing either)”라고 하며 非有非無妙有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불교보다 천여 년 이상 늦었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따라와 주어서 반갑다. ㆍ현상과 空 그리고 不二
    그러면 이제 不二의 진리를 常主도 斷滅도 아니라는 차원(非有非無)을 넘어서 妙有에 해당하는 空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해 보자. 不二가 진정한 진리라면 모든 차원의 존재에 끝까지 적용되어야 할 테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현상(phenomena)으로만 존재한다는 견해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삼라만상을 속성개별자들의 (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 집합체로 보거나 또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와 소립자들로 이루어진 것들로 보는 견해보다도 오히려 더 세련된 철학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객관 세계가 그것을 파악하는 주관의 인식능력과 구조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 모습이 현상 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철학에서 받아들이는 反實在論(antirealism)의 입장인데, 지금은 상식이 된 이 반실재론은 서양에서 198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응스님(현 조계종 교육원장)은 그가 1980년대에 쓴 글을 모아 놓은『깨달음과 역사』에서 이미 우리 일상의 경험세계를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단지 현상으로 또는 幻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常主와 斷滅뿐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二分法(이분법)도 넘어서는 不二를 주장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의 책이 ‘실재’라는 개념을 현대철학의 입장에서 보아도 문제가 없이 사용한 한글로 된 유일한 불교관련 서적이다. 현상과 空도 不一不二라고 보아야 한다면,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뜻이 잘 통할까. 현상에 대해서는 위에서 여러 번 설명했으니 이제 空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다. ‘ 空’이란 개념은‘(본질 또는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is empty of (svabhava))’라는 형용사로부터 생겨났지만 자성을 결여한다는 존재의 양상(mode)을 표현하는 명사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명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빨갛다”라는 형용사로부터 “빨강”이라는 명사가 나왔는데,“빨강”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어떤 형이상학적 공간에 빨강이라는 추상적 존재자가 있고 그것이 존재세계에 예화된다는 (instantiated) 플라톤류의 철학은 역사상 수많은 반론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현대철학에서는 거의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결여되어있다(空)”라는 형용사로부터 “결여(空)”라는 명사를 만들어 낸 후 이 존재세계에 그것이 지시하는 ‘결여(空 또는 空性)’라는 존재자가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많은 비약을 내포하는 주장이다. 그 스스로 철학자였던 루이스 캐롤의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 이 점을 더 명확히 해 보겠다. “여기 오는 길에 누구 본 사람 있어?” “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I saw nobody.)” “그래 맞다, 걸음이 빠른 내 친구도 그 느린 Nobody를 지나쳐 왔어.”
    이 대화가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질문자가 답변자의“nobody”라는 단어를 실제로 존재하는 “Nobody”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 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자들이 즐길 법한 논리적 코미디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I saw nobody”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Nobody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결여(空)”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결여(空 또는 空性)가 존재 자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한다면 불교의 空사상이 서양철학자들 사이에 회자할 또 다른 코미디의 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空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물이 空하다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자성을 가짐을 부정할 뿐이다. 사물은 현상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단지 자성을 결여할 뿐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도 말하듯이, “자성을 결여함이란 (즉 空이란) 언제나 否定的으로 또 俗諦(현상)세계의 한 특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Lack of inherent existence must always be understood as negative and as a feature of conventional reality).” 그리고 시더리츠(Mark Sideritz) 교수가 주장하듯이 “空은 경험을 개념화하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 이상의 것이 아니다 (Emptiness is no more than a useful way of conceptualizing experience).” 내가 다른 에세이에서도 한번 밝혔지만,나는 空을 논리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空은 연기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결과여서, 연기와 공은 결국 같은 진리에 대한 두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상세계 사물의 생멸에 연기법을 적용해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동시에 공의 관점을 적용해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동아시아 불교 일각의 空사상에서 空이 어떤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 신비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제되지 않은 채로 空사상이 서양에 더 많이 알려진다면 머지않아 뉴욕 브로드웨이에 空을 주제로 한 코미디 뮤지컬이 오를지도 모른다, 역사상 성리학자들이 불교의 여러 모습을 가혹하게 조롱거리로 만들어 책을 써 냈듯이. 그렇다면 이제 空과 현상세계가 不一不二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앞에서도 밝혔듯이 一과 二를 모두 숫자로만 해석하거나 아니면 둘 다 같거나 다르다고 질적으로만 해석하면“不一不二”는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다. 그래서 데이빗슨이 사건(event)을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인 구조가 없는 개별자이지만 (不二) 각각 두 개의 다른 기술로 표현될 수 있다고 (不一) 한 것과 마찬가지로, 空의 세계와 현상세계는 하나의 존재자를 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각각 성립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게 뜻이 통할 수 있다. 시더리츠 교수와 더불어 서양불교철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가필드(Jay Garfield) 교수도“空과 현상세계는 구분되는 두 개의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두 특성묘사이다. (Emptiness and the phenomenal world are not two distinct things. They are, rather, two characterizations of the same thing.)”이라고 하며 나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리의 인식과 기술의 차원에서는 두 접근방식이 가능해서 하나인 기술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不一) 존재론적으로는 두 구분되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자라는 것이다 (不二). 여기서 나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철학적 문제를 다시금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空을 唯名論的(유명론적 nominalistic)으로 이해하며 우리가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존재자들의 존재 양상에 대한 기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서 무리하게 더 나아가 空에 어떤 존재론적인 實在로서의 위상을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철학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댄서와 그가 추는 왈츠를 상상해 보자. 댄서는 분명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고, 왈츠란 댄서가 춤을 추는 동안에 보여주는 댄서의 존재양상이다. 왈츠는 댄서의 몸동작의 양상을 쉽게 표현해 주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어서 이 왈츠라는 것이 댄서와 떨어져 세상에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만약 왈츠가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 예쁜 상자 안에 넣어 멋지게 포장해 백화점에서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는데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왈츠의 예로부터 우리는 어떤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空이, 불교계 일각에서 보는 바와 같이,현상과는 달리 궁극적 진리로서 변하지 않는 어떤 고유한 존재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상정된다면 이는 생멸하는 현상세계와 존재론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空과 현상세계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게 되어 (不一) 대승의 不二의 원리에 어긋나게 된다. 결국 우리는 空에 어떠한 독자적 존재 영역을 인정해서도 안 된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시더리츠 교수도 그가 번역 해설한 『근본중송』 24장 18절에서 空을 단지 개념적 허구(a mere conceptual fiction)로 번역하고 그런 취지에서 해설을 덧붙인다. 그리고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空이란 ‘경험을 개념화하는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에 어떤 實在性(실재성 reality)을 부과해서도 안 된다. 한편 왈츠를 유명론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또 空도 하나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Occam’s Razor 오컴의 면도칼)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존재세계를 가장 적은 수의 존재자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또 어떤 이론도 가장 적은 수의 공리와 가정들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리인데,인도에서는 이것이 ‘가벼움의 원리(the principle of lightness)’라고도 불려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소중히 지키는 원리다. 그런데 空과 현상세계에 대해 “空과 현상세계는 구분되는 두 개의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두 특성묘사이다. (Emptiness and the phenomenal world are not two distinct things. They are, rather, two characterizations of the same thing.)”라는 가필드 교수의 해석은 우리에게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앞에서는 그의 해석이 가진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켜 소개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우리가 가필드 교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논의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그 어떤 것(the same thing)’에서 이 ‘것’이라는 것조차도 실체로서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되겠고, 또 인식주관과 상관 없이 나름대로의 속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보아서도 결코 안 되겠다.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도 극히 더 섬세하고 미묘한 진리를 보여준다고 보는 이유는 불교가 이 어떤 ‘것’의 實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세계 전체를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은 이미 거의 30년 전 그의『깨달음과 역사』에서 이런 ‘것’조차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런 ‘것’조차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空의 진리를 끝까지 철저히 이해해 나가면 그렇게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응스님의 이 해석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본다. 그래서 이 ‘것’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겠다. 앞에서 살펴 본 데이빗슨의 時空으로 제한된 구조가 없는 개별자 (spatiotemporally bound unstructured particular)로서의 사건의 개념이 이 ‘것’과 유사하지만, 데이빗슨의 경우에는 사건이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술하든 말든 스스로 존재하면서 다른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말하자면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real) 무엇이다. 그러나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 ‘것’은 더 미묘하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알 수 없는 물자체나 데이빗슨의 無構造(무구조)의 개별자는 모두 그것들의 독립적인 형이상학적 實在가 인정된 후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 이다. 비유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하자면,어떤 길이 이미 있고 우리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발로, 네 발 짐승은 네 발로, 그리고 뱀은 기어서 그 길을 간다. 각 種이 가진 인식능력의 구조에 따라 길을 달리 파악하고 가겠지만, 함께 걸어가는 길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같은 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길 가기의 해석과는 달리 나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걷는 곳이 길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길의 독립적 존재가 선행하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서 동시에 길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구성된다고 (logically constructed)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길은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 인식작용의 특성 때문에 그 존재가 요구되고 구성될 뿐이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이동할 때 또는 기러기들이 V자를 그리면서 날아갈 때,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 같은 一자나 V자의 線(선 line)이 우리의 인식주관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實在(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인식구조가 그 線의 존재를 그렇게 구성하는 것인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 (Occam’s Razor)를 존중한다면, 우리 인식능력이 線의 존재를 구성해 내는 것으로 판단함이 옳다. 그런데 논리적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든 우리가 걸어가며 길의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길의 바탕이 되는 땅이 먼저 있기 때문이니 그 바탕이 되는 (브라흐만 같은) 땅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반론할 논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이동하는 우주선이 그리는 항로(route) 같은 것을 상상하면 그럴 오해의 소지가 좀 줄어들겠다. 항로 같은 것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또는 지도에서 그리는 線일 뿐이지 존재 세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 공간이라는 것도 바탕으로서 미리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實在가 아니겠느냐고 하는 반대자가 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용수의 『근본중송』 을 잘 읽어 보고 나서 다시 토론하자고 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현상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그 어떤 ‘것’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게 만든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물자체가 미리 존재하거나 또는 무구조의 개별자가 존재한 다음에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그것들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현상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사는 현상세계라는 경험의 내용이 동시에 논리적으로 그 어떤 ‘것’의 존재를 구성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그 어떤 ‘것’의 존재를 구성하게 되는 이유는,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어떤 ‘것’의 존재가 미리 있어야 그것에 대한 경험으로 현상세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습관 -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습관 (beginningless habit) - 때문일 뿐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지만 이 세상에 원래 길이 있어서 우리가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는 곳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空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세계의 경험을 편리하게 개념화하는 도구 또는 경험을 기술하는 매우 편리한 개념에 불과하다. 가필드 교수가 空과 현상세계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두 존재자가 아니라 같은 것(존재자)에 대한 두 특성묘사로 보아야 한다고 표현했을 때 나는 이 같은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 존재가 구성될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필드 교수의 견해는 많은 철학적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어떤 ‘것’조차 실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현응스님의 말이 옳다고 본 것이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이야기되었고 또 현응스님도『깨달음과 역사』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이 현상세계를 집착할 것이 없는 幻의 세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나는 그 幻의 바탕이 존재하고 그 바탕이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幻의 세계의 경험 내용이 곧 그 어떤 ‘것’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구 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형이상학적 실재론에서와 같은 ‘實在’는 아니어도,幻으로서의 현상세계는 실제로 존재한다 (actually existing)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물론 이 幻으로서의 현상세계가 自性이 없이 空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ㆍ7,000장의 기저귀 갈기 수행
    이번 글에서는 꽤 진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했으니 마지막을 좀 가벼운 이야기로 맺으려 한다. 원래 어려운 이야기도 웃으며 해야 덜 어렵게 느끼기에 그렇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실참을 통해 깨침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좀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실제로 14년 전 태어난 우리 쌍둥 아이들 기저귀를 2년 반 동안 7,000장쯤 갈았을 때 살짝 깨쳤다는 경험을 했다. 내가 종신교수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조교수였을 때 당시 듀크대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아내가 내가 있던 미국 미네소타주로 돌아와 쌍둥이를 출산했다. 사고무친한 곳에서 첫 아이를 쌍둥이로 얻은 우리는 물론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 아무런 감이 없었다.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다니고 군복무를 마친 후 유학해 미국대학에서 미국현대분석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때까지 나는 누구 못지않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겪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종신교수심사 준비하며 강의하고 그 와중에 대학원생이었던 아내를 뒷바라지하며 집안일과 쌍둥 아이들 양육을 거의 도맡아 한 2년 반이 이제 한국 나이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내게 아마도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쌍둥이여서 작게 태어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더 자주 먹었어야 했기 때문에 첫 6개월은 하루에 기저귀를 하루 종일 밤새도록 20~40장까지도 갈았어야 했다. 도와 줄 일가친척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그랬다. 종신교수가 되자마자는 2년 동안 휴직하고 아내의 대학원이 있던 1,800마일 떨어진 노쓰 캐롤라이나주로 가족이 모두 내려가 내가 아이들 키우고 집안 살림하며 아내 박사과정 공부 뒷바라지했다. 여러 모로 무척 바쁘고 어려웠던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두 살 반 정도 되던 어느 날 여전히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나는 홀연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극히 상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멋지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 여러 날 지속되었다. 그 경험 후 나는 불교(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 해 동안은 영어로 된 책들밖에 구할 수 없었지만. 복이 많은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곳이 숭산스님이 미국에 와서 처음 세운 관음선원 (Providence Zen Center)이 있는 곳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어서,바쁜 대학원 생활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음선원에 다녀왔고 또 숭산스님이 그곳에 들리셨을 때는 법회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서양현대분석철학이 전공인 내게 불교 공부를 하게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기저귀 7,000장의 수행(?)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 덕분에 아빠가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내가 불교공부로 쌓는 공덕은 자기들 덕이라고 뽐내곤 한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한국에서 여성재가불자들이 보살님이라고 불려야만 하는 이유를 좀 알게 된 것도 같다,남성재가자들은 아무리 올라가도 거사에 불과한데 말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기저귀를 떼지 않았더라면,기저귀를 끊임없이 갈았었어야 했을 나는 언젠가 결국 완전히 깨쳐 금강열반에 들어 명호를 ‘기저귀 가는 부처님’ 으로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쉽게도 되었다. 그래도 온 가족의 성원 아래 아내는 대학원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금은 생명과학철학 전공으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맨케이토 철학과 교수가 된지 9년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가정과는 달리 우리 집에서는 엄마보다 기저귀를 더 많이 간 아빠가 보살님이다. 철학적으로 무거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들 가시라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살아 온 이야기 하나를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열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철학적 분석 자체가 열반을 직접 가져다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열반을 가리키는 여러 손가락 가운데 하나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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