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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도 행렬 속, 사라진 왕은 어디에?

浮萍草 2016. 1. 22. 22:06
    婚禮式의 생생한 現場 영조,정순왕후嘉禮都監儀軌  
    1759년 음력 5월 66세으ㅔ 영조가 15세의 어린 신부 정순완후를 게비로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이 열린다. 혼례식의 전 과정은 으ㅔ궤(儀軌)의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50면에 걸쳐 그린 반차도(班次圖 )는 그날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빈차도를 작성한 과정과 빈차도에 나타난 왕과 왕비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ㆍ돌다리도 두들겨 보고자, 미리 만든 ‘반차도’ 리가 보고자 하는 반차도는 왕실 혼례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례인 친영(親迎) 의식을 그렸다. 친영은 간택을 받은 후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는 신부를 왕이 직접 모셔오는 의식을 말한다. 먼저,반차(班次)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했다. 반차도는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대의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과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 셈이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도의 친영 날짜는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에 이미 제작되어 왕에게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앞부분은 왕의 행차를,뒷부분은 왕비의 행차를 그렸다. 중심을 이루는 것은 왕과 왕비의 가마이고,행차의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뒤를 호위하는 후상(後廂),후사대(後射隊)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 행사에 참여한 고위관료,호위병력,상궁,내시,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행렬의 기강을 잡는 뇌군(牢軍: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다.
    ㆍ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는 ‘왕의 어진’
    주목할 만한 점은 왕과 왕비의 가마 모양이다. 왕의 가마는 사방이 열린 개방형의 구조이고,왕비의 가마는 사방의 문이 모두 닫힌 폐쇄형을 띠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가마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지나가는 백성들까지도 모두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의 모습은 오간데 없다. 애초에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왕의 얼굴을 조선왕실의 어떤 행사 기록에도 남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절대 존엄인 왕의 위상을 강조한 것이다. 영조는 1760년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지휘하고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격려하러 간 적도 있는데 이 행사의 모습을 그린「준천시사열무도」에서도 영조의 자리만 표시되어 있을 뿐 왕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활쏘기 행사를 한「대사례도(大射禮圖)」나,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입학식 광경을 그린「왕세자입학도」와 같은 그림에도 왕이나 왕세자의 인물은 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화성행차를 단행한 과정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도 정조가 탄 말만 그려져 있을 뿐 왕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예외적으로 조선시대 왕의 모습은 최고의 화원들이 왕의 어진(御眞)을 그려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진이 소실되었고, 현재 당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왕은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다섯 명뿐이다.
    ㆍ250여 년 동안 생생하게 살아 있는 1,118명의 인물들
    왕의 가마 주변으로는 호위 병력도 많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등장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별군직,전부고취,봉촉별감 등이 중앙의 행렬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그 좌우에는 왕의 경호 임무를 맡은 금군(禁軍)과 특별히 발탁한 군사들인 가전별초(駕前別抄), 장교복을 입은 호위군관,가후별초(駕後別抄)가 말을 탄 자세로 수행하고 있다. 협연포수(挾輦砲手), 나장(羅將)들이 창과 방망이를 들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왕의 행차에 경호 병력이 모두 출동한 상황을 읽어 볼 수 있다. 왕비의 가마 앞에는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문서와 도장,옷 등을 각각 실은 교명요여(敎命腰輿),옥책요여(玉冊腰輿),금보요여(金寶腰輿),명복채여(命服彩輿)가 앞 에서 인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왕과 왕비의 가마 뒤에는 말을 탄 어의(御醫)와 승지 및 사관(史官)의 모습도 보이는데 왕의 건강을 체크하고 당시의 현장 모습 을 모두 기록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반차도에는 총 1,118명(보행 인물 797명, 기행 인물 391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혼례식 행사를 주관하는 관리들인 도제조,제조,도청,낭청 등 의정부 대신들과 호위를 맡은 무관들은 왕과 왕비의 연과 함께 중심부를 이루면서 행렬을 선도하고 있으며, 인물과 말을 비롯하여 의장기, 의장물,가마 등의 각종 물품을 목판으로 새겨 도장을 찍듯이 인쇄하고 채색한 것도 흥미롭다. 반차도의 채색그림은 2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어서 당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의장물은 깃발, 우산, 부채, 도끼, 창 등 다양한 물품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중 의장기는 국가와 왕실의 상징적인 표시 기능을 갖고있기 때문에 의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은 뒷모습을 그린 것,조감법으로 묘사한 것,측면만을 그린 인물 등 다양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묘사해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행렬을 생동감 있게 연출한 화원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물은 신분에따라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있다. 다양한 색상의 의상은 물론 너울을 쓴 여인의 모습이나 각종 군복을 착용한 기병,보병들의 모습은 당시 복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는 총 50면에 걸쳐 그려져 있으며 각 면은 45.8×33㎝, 총 길이는 1,650㎝에 달한다. 혼례식이라는 왕실의 경축 행사에 참여하여 수백 명이 대열을 이룬 장엄한 행렬은 당시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궤의 반차도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양질의 문화콘텐츠 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왕실문화의 적극적인 홍보와 세계로의 전파는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다 높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글‧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미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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