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해와 달을 읽는 사람들, 역산가曆算家

浮萍草 2015. 12. 10. 19:24
    ㆍ천문 분야 전문기관, 관상감觀象監 국의 경우 고대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 중에 하나가 천문현상과 천체운행의 원리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관련 기록이 국가의 전문 관서에서 정리한 천문지天文志와 역지曆志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특정전문 기관을 두어 역사서에 이러한 천문 관련 기록을 자세하게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천문관측과 원리를 연구하던 전문기관이 관상감觀象監이었다. 이 관상감의 역할은 천문 관련 업무 내용 외에 역법, 지리,풍수,명리학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고유 업무와 더불어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각종 행사와 의례를 거행할 때 길한 날짜와 시각을 정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관상감업무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천문 관련 내용이다. 천문 업무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지속적인 천문관측을 통하여 하늘에 나타나는 이변異變또는 천변天變을 기록하고 이를 국내외의 사건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일이다. 둘째로 천체 관측 기기를 개발하여 제작하고 이를 이용하여 정밀하게 천체의 운행을 파악하는 일이다. 셋째로 태양과 달, 오행성 등의 운행 원리를 파악하여 일식과 같은 천변을 미리 계산해 내는 일이다. 이 계산법을 정리해놓은 것이 역법曆法이다.

    ㆍ해와 달을 읽는 역산가曆算家
    이러한 천문 관련 업무 중에서도 가장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 역법을 이용하여 일식과 월식을 추보推步하는 일이다. 역법의 원리를 체득하여 일식과 월식을 미리 예측해내는 계산을 전담하는 사람을 역산가曆算家라 한다. 역산가는 다른 분야와는 달리 천체운행의 원리를 상세하게 이해하고 이를 당시의 고도의 수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천문현상을 추보하는 일을 맡았다. 따라서 가장 우수한 수학자를 역산에 전념하도록 했다. 하늘에 일어나는 이 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 일식과 월식이었다. 이 현상은 역산가가 주도하여, 나타나기 6개월 이전에 미리 추보해야만 했다. 일식이 나타나는 날은 전국적으로 모든 관공서에서 음주가무를 자제하도록 하였다. 특히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임금이 직접 근정전 월대에 올라 구식례救食禮를 올리는 예식을 거행했다. 이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시각을 미리 예상하여 임금께 알리는 업무가 역산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만일 일식이 일어나는 시각을 잘못 예측하는 경우는 그 책임을 물어 의금부에 구금되어 태형을 받거나,멀리 귀양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일식과 월식 추보가 잘못되는 경우는 역산가의 실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그 계산법이 기록되어 있는 역법서 자체의 결함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역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시대에 중국의 모든 역법을 연구하여 10여 년에 걸쳐『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것도 부족하다하여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이슬람에서 사용하던 역법을 바탕으로 만든『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도 편찬했다. 이 편찬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역산가가 이순지(李純之, 1406~1465)와 김담(金淡, 1416~1464)이라는 인물이었다. 『칠정산』의 완성은 우리나라 과학사에서 큰 획을 긋는 업적이었다. 『칠정산』의 편찬 이후 조선시대의 일식과 월식 추보의 정확성은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ㆍ역산가曆算家들의 활약
    중국은 명나라 말기 이후 서양에서 온 많은 선교사를 통하여 기존의 천문 역법의 문제점을 밝혀내면서 개력改曆을 단행하게 되었다. 서양인의 주도로 개력한 역법이 시헌력時憲曆이며 이것은 청나라시대인 1645년부터 시행되어 두 번 정도 개력 과정을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사용했다. 조선도 김육(金堉, 1580~1658)의 주장에 따라 시헌력을 1653년(효종 4)부터 정식 역법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게되었다. 그러나 시헌력으로 개력한 이후 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태양과 달의 위치를 예측하는데 고도의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각함수표와 다양한 종류의 대수표를 활용했다. 조선의 역산 전문가들은 시헌력의 방대한 수표와 계산 원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러한 시헌력 사용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650년대에는 관상감 관원인 김상범金尙范을 중국에 파견하여 배워오도록 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705년에는 허원許遠을 청에 보내 수표 사용법을 배워오게 하고,다시 1710년에는 청의 흠천감欽天監에서 시헌력의 추보법推步法을 배워오게 하였으나 문제점은 여전히 있었다. 그 후 1741년 관상관원 안국빈(安國賓,1683∼1752)이 역관과 함께 당시 청나라에 와있던 서양인과 전문가를 만나 그 산법을 배우고 다양한 천문 역법서를 구해 가지고 와서 분석을 하였다. 이후 시헌력 사용상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헌력을 익히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에는 많은 역산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역산가 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안국빈이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시헌력을 도입하여 시행한 이후 거 의 90년 지난 후에 어느 정도 이해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최고의 역산가를 이순지라 한다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역산가로는 안국빈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조선 역산가의 활동은 우리나라 수학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글. 이용복 서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소남천문학사연구소 소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