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조훈철의 문화재 이야기

15 팔만대장경의 육로 운송이 불가능한 이유

浮萍草 2016. 1. 16. 07:00
    자는 그 동안 문화재를 공부하면서, 많은 건축물들을 직접 실측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남긴 건축물들을 정밀하게 측량해보면 서양의 건축물처럼 반듯하거나 좌우대칭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는 궁궐, 사찰, 서원, 사대부 종가 등 거의 모든 문화재에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방식에는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주변 자연과의 깊은 일체감이 내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문화재가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처럼 웅장하지 않고 유럽의 도시들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재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자에는 이 점을 빠뜨리고 있다.
    선조들이 만든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터를 직접 가서 느껴 보아야 한다. 
    경주 첨성대를 알려면 동짓날 새벽 일출 광경을 첨성대에서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첨성대 설계자는 동짓날 일출을 염두에 두고 그 조형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경주에 있는 야외 문화재는 동짓날 일출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려진 것이 의외로 많다. 
    석굴암,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남산의 감실석불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문경 고모산성 봉수대와 진남문. /조훈철
    현장을 모른 채 문헌기록만 가지고 연구를 하는 박제된 지식의 대표적인 경우가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강화도에서 판각한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강화도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으로 내려오는 육상 운반,또 다른 하나는 강화도 선원사에서 강화해협을 빠져나와 남으로 서해 안과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으로 올라가는 해상 운반의 경우이다. 이 가운데 육상 운반의 경우 학자들이 지도를 펼쳐서 그 코스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주,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는 뱃길로,충주에 도달해서는 육로로 문경세재를 건너 낙동강으로 가면 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관련 강의를 할 때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심코 강의하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다. 학생 : 선생님, 혹시 문경에 있는‘토끼비리’라는 곳을 가 보셨는지요? 필자 : 아니,‘토끼비리’가 뭔데? 학생 : 아니 선생님 현장을 보시지도 않고 그렇게 용감하게 말씀하시면 무식하다는 말 듣습니다. 필자 : 용감하다니 그리고 무식하다니 무슨 말이니? 학생 :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치기위해 남쪽으로 진군 시 이곳에 이르러 절벽과 강으로 길이 막혀 헤매고 있을 때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 가 보니 벼랑 옆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어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는 전설이 서린 길 말입니다.
    문경 토끼비리 문화재 관람제한 안내. /조훈철

    문경 토끼비리 잔도. /조훈철
    그 강의가 있었던 주말 문경 현장답사를 했다. ‘고모산성’의 진남문을 지나 ‘토끼비리’를 직접 체험했다. 이곳이 바로 한양에서 영남지방으로 가는 최단코스 옛길이었다. 현장을 모르고 책속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문화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관념적이면서 위험한 것인지 토끼비리 잔도가 가르쳐 주었다. 이 곳을 한번이라도 방문하고 글을 쓰는 학자라면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현장이었다. 문화재의 현장답사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문화재 조형 원리를 제대로 밝혀 놓은 문헌 자료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글을 남기거나 아예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풍수사상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문화재 현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숭례문의 위치 및 방향, 창덕궁 인정전 앞마당이 삐뚤어진 이유, 창경궁이 남향(南向)이 아닌 동향(東向)인 점, 정조시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지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바탕으로 평면을 사각형으로 만들고 연못 중앙은 섬을 조성하여 그 모양을 둥글게 했다. 그런데 수원화성 내 방화수류정의 연못을 조성할 때 정조는 왜 둥근 형태의 연못을 만들었을까? 다른 서원들은 남향(南向)인데 반하여 도동서원이 북향(北向)인 점, 안동 병산서원의 동재 건물은 왜 방향이 뒤틀려 있는지 등등 이 모든 것을 문헌자료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면 오리 무중에 빠져 버린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시각인 풍수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으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서양 건축의 어떤 이론을 도입하더라도 설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지녔던 높은 안목으로 창출한 전통 문화의 결정체이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서양식 사고방식과 잣대를 가지고서 우리 문화재를 해석하는 경우 오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문화재는 서양시각이 아닌 우리 선조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agora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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