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조훈철의 문화재 이야기

13 창경궁(昌慶宮) 궁궐배치에 담긴 비밀

浮萍草 2015. 11. 28. 12:15
    경궁(昌慶宮)은 조선 후기 역사적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숙종 시대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장소이면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명칭을 격하시키는 동시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밤 벚꽃놀이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해방 후에도 휴식공간이 거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창경원은 최고의 위락공간 및 놀이동산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80년 중반 정부는 민족정기의 회복 차원에서‘창경궁 복원 사업’을 단행했다. 
    먼저 그 명칭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환원했으며,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심었던 수많은 벚나무는 모두 국내 수종인 소나무,느티나무 등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재정비 작업을 통해 궁궐로서 면모를 갖춘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창경궁은 당초 생존해 계시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라는 궁터였으나,성종 15년(1484)에 살아 계신 세 분의 대비를 위해 
    그 터에 주요 건물인 명정전,문정전,통명전 등과 같은 주요 전각들을 완공하면서 이름도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그 후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지만 당시에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이라기보다는 왕실의 대비들이 거주하는 내전 
    기능이 강한 일종의 ‘대비궁’ 역할을 담당한 궁궐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의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1616년)이며, 동향이 특징인 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226호. / 조훈철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경궁은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후 광해군 8년(1616) 창경궁은 복구가 되었지만 몇 차례의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 구역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화재에서 살아남은 것들과 순조34년(1834)에 다시 지은 건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명정전(明政殿)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창경궁 배치의 핵심은 그 좌향(坐向)에 있다. ‘군주는 남면’이란 유교 예제에 따라 기존에 조성한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남향(南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동향(東向)으로 배치를 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창경궁을 복구할 때 광해군은 명정전의 좌향을 남향으로 할 것을 어명으로 내리지만 유교 예제에 정통한 유학자들조차 정전 건물의 남향배치를 반대한다는 상소들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남향을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치열한 풍수 논쟁이 실록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감안해볼 때 결국 유학의 이론과 반하는 풍수에서 그 답을 찾는 유학자들의 고뇌가 읽혀진다. 이런 현상은 조선 초기 남대문을 서쪽에 치우치게 건설해 놓고 실록에서 도성 축조와 각 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정남(正南)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처럼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agora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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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왕궁은 남향인데 창경궁(昌慶宮)만 동향인 이유는?
    수(風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 일’이 풍수의 핵심이다. 
    옛 선조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있는 장소가 인간 살기에 좋은 터라고 보았다. 
    ‘장풍득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면 된다. 
    즉, 뒤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서는 물을 얻는다는 원리이다. 
    창경궁의 입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득수’부분이다. 
    득수란 물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때 말하는 물은 명당수를 의미한다. 
    명당수는 혈 자리에 모여 있는 좋은 땅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감싸면서 돌아가야 그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다. 
    따라서 남향을 하고 있는 건물의 경우 명당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남향 배치를 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서입동출’하면서 흐르는 궁궐 내의 물줄기는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경궁의 편전 문정전(文政殿), 왕이 경연을 하거나 집무를 보는 공간이며, 영조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훈철

    그런데 창경궁의 명당수는 옥천교 아래로 흐르는 옥천이다. 옥천의 물줄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현재 종로4가에서 청계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남향으로 배치하게 되면 건물과 물길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 내려와 창경궁에는 실제로 명당수가 존재할 수 없게 상황이 연출된다. 창경궁이 동향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교 예제에서 ‘임금은 남면’이라고 강조한 남향보다 물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창경궁에서 건물의 배치와 더불어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건물의 기둥 형태에 관한 것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입각해서 건물을 지을 때 궁궐의 외전 구역인 정전과 편전의 건물은 원기둥을 사용하고, 생활공간인 침전의 건물에서는 사각 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창경궁의 경우 편전 건물인 문정전을 보면 사각기둥을 하고 있다. 정전인 명정전을 동향으로 정하고, 편전인 문정전의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만든 창경궁 프로젝트의 최초 기획자는 성종이었다. 효심의 발로로 조성한 궁궐에서 기존 원칙과 다른 다양한 배치방식을 시도한 성종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창경궁에 담긴 비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agora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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