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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기사로 세계 무대를 풍미했던 조훈현

浮萍草 2015. 10. 14. 08:00
    지난 7월의 기념 대국이 끝난 뒤 팬들의 질문을 받으며 파안대소하고 있는 조훈현(왼쪽)과 조치훈. /조선일보 DB
    순을 넘긴 국수는 편안해 보였다. 달변은 아니었지만 답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한 지 벌써 반세기 (조훈현은 1962년 9세에 입단했다.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세계 최연소 기록이다.) 지난 8월 초 기준,54년간 2,768번의 대국을 벌여 1,938승을 거뒀다. 젊은 나이에 바둑계를 제패한 후 이르다 싶은 나이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되찾아오고 빼앗기고… 전쟁 같은 세월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끝난 것 같은 조훈현의 시대가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된 걸까. 사그라든 바둑붐과 함께 서서히 잊히는 듯했던 조훈현이라는 이름이 다시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조 국수는 “응씨배에서 우승한 이래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조치훈 9단과 대국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바둑 7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 형식의 대결이었다. 시작은 한 편의 웹툰이었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은 매 화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응씨배 대국 기보를 실었다. 이후 동명의 드라마가 인기를 끈 후 저절로 ‘조훈현 다시 보기’로 이어진 것. 급기야 젊은 세대가 주로 즐기는 모바일게임의 광고모델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최근엔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도 냈다.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느낀 삶의 지혜를 담담히 풀어썼다. ㆍ스승 세고에와 내제자 이창호 묘한 오버랩
    활짝 웃고 있는 조훈현. /서경리 포토그래퍼
    한국의 바둑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조훈현의 인생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웬만한 영화 시나리오보다 더 극적 이다. 거기엔 두 명의 바둑인이 등장한다. 바로 일본의 바둑 명인 세고에 겐사쿠와 한국의 바둑 천재 이창호다. 조 국수는 1963년, 10세의 나이에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이미 세고에 선생의 나이 일흔셋. 내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에 선생은 처음엔 사양하다가 ‘바둑 인생 마지막 제자’라며 조훈현을 받아 들였다. 10년을 이어오던 사제의 인연은 조훈현의 한국 귀국으로 막을 내렸다. 아 무리 애를 써도 제자의 군 입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 후 세고에 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 조 국수는 한국 바둑계를 평정했다. 세계대회를 차례로 석권하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그에게 또 하나의 인연이 다가왔다. 이창호였다. 20여 년 전의 조 국수처럼 어린 나이(9 세)에 내제자로 스승의 집에 들어간 이창호는 불과 6년 후,스승을 꺾고 ‘10대 국수’가 되었다. 그러곤 이창호의 시대였다. 제자의 천재성과 비례해 스승의 전성기가 단축된 셈이다. 삼대에 걸친 인연에 대한 소회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 국수는 “나이가 드니 세고에 선생님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내제자는 스승의 집에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배우는 제자 지요. 그저 바둑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어떻게 행동하는지,언제 자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말하자면 사고 체계 자체를 배우는 것이지요. 어릴 때는 그저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나이가 드니‘아,그때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문득 생각이 납니다. 세고에 선생님은 정신세계가 남다른 분이었어요. ‘ 바둑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 우 칭위안을 길러 중국에 보답했고 조훈현을 잘 길러 한국에 은혜를 갚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창호에게 졌을 때는, 스스로를 달랬지요. 생각보다 너무 일찍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지만 이왕 자리를 내줄 바엔 제자에게 내어주는 편이 낫다고요.”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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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훈현이 현실의 '장그래'에게 해 줄 말은
    
    ㆍ스승 이기는 제자… 아내 위해 제자 안 받아
    젊은 날의 모습. 바둑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이지만 스무 살 무렵을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조훈현 기사 제공
    터뷰 도중 조 국수의 부인 정미화씨가 다과를 내왔다. 사실,조 국수와 이창호 사이 의 역사를 정씨만큼 잘 아는 이는 없을 터다. 자신이 밥을 해 먹이는 아이가 어느 날부 터 남편을 번번이 이기는 날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조 국수도 이창호 이후 제 자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아내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10대를 일본에서 보낸 그에게 일본은 어떤 의미일까. “세고에 선생님 집에는 일본의 유력한 정재계 인사들도 곧잘 드나들었어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깍듯했지요. 십수 살이었던 어린 저에게도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하며 ‘한 수 가르쳐달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국에 왔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더군요. 보자마자 반말로 ‘바둑 한 판 두자’고 하는 통에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제가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기합을 주자 ‘야, 왜 때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부대 대대장이 바둑을 좋아하는 분이었어요. 군 생활 중에도 기전에 나갈 수 있게 배려를 해주셨지요. 양국의 문화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거나 못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섬세한 접근으로 바둑을 도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면 한국은 특유의 활력으로 세계 바둑을 제패했잖아요.” 묘했다. 세고에 선생과 일본 생활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유독 조 국수의 표정이 미세 하게 굳었다. 일부러 “훗날 저 세상에서 세고에 선생을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하실 것 같 나”고 물어봤다. “만나자마자 혼내시겠지”라는 대답이 헛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세고에 선생님은 오롯이 바둑의 길만을 걸은 분입니다. 바둑만을 위해 사셨지요. 반 면에 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심지어 광고도 찍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갔잖 아요. 저를 보면 왜 그랬느냐고 하시겠지요.” ㆍ 바둑 외연에 관심… 온라인 게임 참여도
    조훈현 9단은 등산 매니아이다. 조 9단은 이제 등산 중독증에 빠져 바쁜 일정으로 며칠 산에 오르지 못하면 등산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난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그에게 일본 생활은 정신의 심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축복인 동시에, 이미 그 역할을 다한 과거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조 국수는 세고에 선생과 기본적인 기질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바둑판 위 세계로 수렴하지 않고 외부로 확장하려는 것이 조 국수의 성향인 듯하다. 실제로 조 국수는 바둑과 차츰 멀어지고 난 후, 바투’ 등 바둑을 응용한 온라인 게임 론칭에 참여하기도 했다. ‘ 바둑의 원래 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더 많은 젊은이가 바둑에 흥미를 갖도록 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말이 다. 그의 말에서 주름살을 찾을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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