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한식의 탄생

[33] 비지찌개

浮萍草 2015. 12. 9. 12:33
    日帝時代 貧民의 生存 飮食, 겨울철 美食으로 身分 上昇
    배기에 바글바글 끓여 나오는 비지찌개는 겨울 진미로 손색없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 때 콩물을 빼고 남은 콩가루다. 이남에서는 비지찌개를 콩가루 찌꺼기로 만들지만 이북에서는 콩을 통째로 갈아서 쓴다. 정확한 표준어는 되비지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콩과 참깨를 10대1 비율로 갈아 돼지고기를 넣고 새우젓국이나 곤쟁이젓국으로 간을 한 되비지탕을 먹고 평안남도에서는 되비지에 불린 쌀을 안쳐 짓는 비지밥이 유명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1681~1763년)도 비지를 즐겨 먹은 듯하다. 그는 성호사설(星湖僿說)에'맷돌에 갈아 정액(精液)만 취해서 두부(豆腐)를 만들면 남은 찌꺼기도 얼마든지 많은데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고 적었다. 비지의 한글 표기는 최세진이 지은 사성통해(四聲通解·1517년)에 '비지(渣)'로 처음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에서 1960년대까지 비지는 도시 빈민들의 생존 음식이었다. ' 경성의 조선인 24만명 중 10만2천명은 극빈자임으로 백미뿐만 아니라 서속,보리,감자 등은 오히려 상등식물 이오 대개는 비지를 주식으로 여기고 사는 터인데'(1928년 8월 2일자 동아일보)라는 눈물겨운 기사는 1960 년대에도 계속된다. '살찐 돼지는 사람보다 낫다. 새벽 2시부터 열을 지어야만 가까스로 비지를 사다 물을 타서 다섯 식구가 한 끼니를 잇는다는 서울시내 H동의 이야기.지게벌이를 해서 하루살이를 해나가는 노동자나 논밭을 팔고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농민들이 두부 찌꺼기의 단골 구입객. 두부 공장을 찾는 허기진 군상은 초만원 사례'(1964년 5월 26일자 경향신문)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밥줄이었다.
    분식장려운동으로 비지는 정부가 권장하는 음식이 된다. 1970년대 이후 비지는 생존 음식에서 겨울철 미식(美食)으로 신분이 바뀐다. ' 콩비지는 언제 대해도 친근감이 있다. 더욱이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에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는 비지찌개를 올려놓으면 모든 피로가 풀리고 식구끼리의 저녁상의 친근감을 새롭게 한다.' (1975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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