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40 안중근 의사 어렸을 적 절벽 꽃 따려다 추락사할뻔

浮萍草 2015. 11. 29. 00:00
    
    1. 안중근 의사 황해도 巨富 장남으로 태어나
    중근 의사는 1879년 7월 황해도 해주 수양산에서 순흥 안씨인 안태훈 진사와 배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반 직의 진해 현감을 지낸 안 의사의 조부 안인수는 도내에서 재산이 많고 재물을 아끼지 않는 호걸 형의 자선가로 유명했다. 
    안 의사 집안은 원래 향리 신분이었는데 고조부 안지풍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양반계급이 되었다. 
    안 의사 조상은 농지를 소유하고 이를 불려 재산가가 되어 갔는데 안 의사 고조부 안지풍 때 와서 거부가 되었다. 
    조부 안인수는 그의 아들 안태훈을 문과 공부시켜 진사가 되게 하였다. 
    안 의사 부친 안태훈은 학문에 뛰어나고 신학문에 뜻이 있어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외국 유학생 명단에 올랐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는 일본으로 피신했고 안태훈은 유학을 못 가고 체포 대상이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피신해 재산을 정리하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이때 안 의사가 6-7세였다.
    순국 직전 안 중근 의사(왼쪽), 안중근 의사 모친 조마리아 여사. /장대성
    > 2. 어려서부터 무인기질에다 사냥 좋아해
    6~7세부터 청계산에서 자란 안 의사는 사냥을 유달리 좋아하여 어린 시절 부터 사냥꾼들을 따라다녔다. 조상의 무인 기질을 이어받은 것에 청계산이라는 자연환경이 더 하여 그러한 성격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들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음주 가무와 사냥을 즐겼으나 의협심이 강해 부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비분강개하였다. 안 의사의 이러한 성격으로 보아 논리가 강한 성격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성품 이라 할 수 있다.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어려서부터 거의 10년 동안 한학과 유학을 배웠다. 그러나 감성적인 안 의사는 논리적인 한학과 유학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의협심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정의와 의리를 우선시하여 옳은 일이라면 모든 이익을 포기해서라도 반드시 성사시키려 했다.
    안 의사는 소년 시절 절벽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 그 꽃을 취하려 절벽 밑으로 몸을 내밀다 떨어져 죽을 뻔했으나 친구들이 구해주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 어려서부터 한 송이 꽃에 목숨을 거는 무모한 행동하는 안 의사의 성격에서 논리적인 면을 찾기 어렵다. 바로 그것이다. 논리적인 사람들은 계산적이어서 자기 이익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거는 행동은 무모하다고 판단한다. 그런 사람들은 손해를 두려워하여 안전한 길만 추구하므로 도전이나 혁신을 꺼리는 성격이 된다. 따라서 논리가 강한 사람에게 국가나 조직을 위해 충성하라고 강조해도 겉으로 하는 척하다 결국은 자기와 가족만을 위한 행동을 취하기 쉽다. 그런데 한국 교육이 논리 중심의 교육이라 이기적인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고 있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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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 가무 즐기던 안중근 의사 감성이 영웅적 거사 가능케 해
    
    3. 16세 안중근 70명 부대의 선봉으로 기습 공격해 2만 동학군에 승리
    
    1894년은 동학농민들이 보국안민의 기치를 걸고 중앙 정부에 대하여 전쟁을 한 해였다.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 진사는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해서소모관(海西召募官)으로 임명되었다. 
    안태훈 진사의 의병들은 다른 의병들과 협력하여 해주 관아와 청계동을 동학군으로부터 지켜냈다. 
    안태훈 진사는 지배계급인 양반이고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를 지키는 것이 돈 있는 양반 선비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이 탐관오리를 몰아내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 왕조를 붕괴시키는 것은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개화파였기 때문에 박영효 등 개화파에 대해 적대적인 동학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협심과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안태훈 진사가 동학군에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하였다.
    압송되어 가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 /장대성

    안 의사는 장남으로서 부친 안태훈 진사와 동학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했고 동학당이 포악한 행동을 했으며 조선 땅에서 청국과 일본이 전쟁하게 했다고 생각 했다. 동학군에 대해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안 의사는 부친의 동학군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때 안 의사는 16세였는데 청계동에서는 이미 사격술로 유명한 소년 장군이었다. 안태훈 진사는 부대원 70명으로 약 2만 명의 동학군과 맞서 싸웠는데 16세의 안 의사가 선봉에 서서 기습 선제공격하여 대승리를 하였다. 이렇게 안 의사는 소년 시절부터 대장군의 기개와 능력을 소유한 영웅이었다. 뛰어난 전투 능력과 사격술이 있었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그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정확하게 조준하여 사살할 수 있었다. 4.친구와 음주 가무 즐기던 안 의사 감성적 성품이 영웅적 거사하게 해
    부잣집 장남인 안 의사가 벗들과 먹는 식사대와 술값을 아끼고 집안에서 책만 읽는 꽁생원이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영웅적 의거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안 의사가 논리만을 앞세워 행동하는 성품이라면 경제적 논리에 집착해 일본세력이 들어올 때 그들에게 협력해 부를 더 쌓아 편안하고 안일하게 사는 인생을 택하였을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는 안 의사의 정의감과 의협심이 함경북도와 연해주에서 의병 대장 활동을 하게 하고 동양 평화 파괴 원흉 이토 히로 부미를 사살하는 영웅적인 거사를 하게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들을 모집해 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성공적으로 사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있어야 한다. 술값과 식사대를 아끼고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과 누가 생명을 내 놓고 의로운 거사를 하겠는가? 호탕하며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재물을 아끼지 않는 안 의사였기에 목숨 건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래는 감성이 풍부한 성격과 논리가 강한 성격을 비교 한 표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들을 모집해 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성공적으로 사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있어야 한다. 술값과 식사대를 아끼고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과 누가 생명을 내 놓고 의로운 거사를 하겠는가? 호탕하며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재물을 아끼지 않는 안 의사였기에 목숨 건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래는 감성이 풍부한 성격과 논리가 강한 성격을 비교 한 표이다.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조국만을 위한다는 단편적인 논리의 거사가 아니다. 안 의사는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감성이 풍부한 성품이어서 세상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보는 통찰력과 혜안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장면. /박영선 화백,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 /역사박물관

    안 의사는 세계정세 전체를 파악하면서 동양의 미래를 보았다. 동양 각국은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도와야 서양 열강의 세력을 방어하고 평화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혜안을 가진 평화주의자며 천주교 신자였다. 안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려는 탐욕에 빠져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이었으며 명성황후를 죽인 것을 포함한 15개 범죄를 저지른 살인 마였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 파괴 두목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히 없애 버려야 동양에 평화가 올 수 있기에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그를 처단한 것이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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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같은 영웅 배출 위한 감성 교육 절실
    
    5. 안중근 의사 동생들 독립 운동가였으나 자녀는 일제에 협력
    중근 의사의 친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의 부인이 되었으니 김구의 며느리가 된 셈이었다. 김구가 19세 때 동학의 접주가 되어 동학군을 지휘할 때 안 의사 부친 안태훈 진사는 김구가 비범한 인재임을 파악하였다. 후에 안태훈 진사는 김구를 불러 자신의 집에서 공부하게 하여 김구는 안 의사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구는 우리 민족의 최고 악질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평생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안 의사 가족을 보호하며 챙겼고 가족관계까지 맺은 것이다. 안 의사는 부인 김아려와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순국 후 가족은 중국 흑룡강 성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12세의 장남 분도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하는 비극을 당했다. 불과 32세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는 청년 안 의사가 신부로 양육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둔 장남이었다. 그런 안 의사의 장남을 일제가 독살한 것이다. 그 후 안 의사 가족은 러시아령 우수리스크로 가서 고생하며 살다가 1919년 이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 프랑스령 조계지에 와서 살게 되었다.
    안 의사 부인과 두 아들들. /안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안 의사 면회하는 동생들. /독립기념관제공

    상하이에서 김구 등 독립 운동가들이 안 의사 가족을 도와 장녀 안현생과 차남 안준생은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거사 이후 상하이를 탈출하지 못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일제 탄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장녀 안현생과 차남 안준생이 일제의 모진 술수와 강압에 못 이겨 서울에 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 에서 이토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그들은 부친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사죄하며 일본에 협력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6. 안중근 의사 같은 영웅 육성 위해 감성 교육 시급해
    젊은이들이 자주 밤이 늦도록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애국심을 나누고 때로는 친구들과 음주 가무도 즐기며 마음을 함께하는 감성적 문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교육은 젊은이들을 자기만 위하는 공부에 가두어 버려 이기적이고 소인배 기질이 되어 조그마한 불이익에도 감정이 날카로워지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런 결과 이제 한국은 남녀노소 거의 모두 이기적이 되었다. 논리와 감성이 균형 있게 통합된 교육을 해야 하는데 한국은 논리적인 교육만 중시하고 감성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아 많은 국민이 논리만 강해져 자신의 경제적 이해타산에만 집착해 상생할 줄 모른다. 운전 중 아주 경미한 손해만 입어도“내가 왜 저 사람한테 손해를 당해야 해”라는 경제적 논리가 발동해 즉시 감정이 고조되어 대로에서 차량 통행을 막고 싸우는 광경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제 차 운전자들은 더 심각하다. 안중근 의사는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 거액의 전 재산을 모두 바친 이회영 선생 형제들과 이승훈 선생 같은 부자 독립운동가들 모두 감성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자본주의란 나만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공존하라는 공유 경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어 극빈자들이 증가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좌파 정부를 원하게 된다. 왜 러시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는가? 국민 대다수가 지독하게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서둘러 학생들은 물론이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감성과 공유 자본주의를 교육하여 상생과 공존하는 자본주의 철학으로 무장시키지 않으면 아래와 같이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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