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35 대한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기 위해 합심한 이승만과 김구

浮萍草 2015. 8. 13. 11:20
    1.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우리에게 기쁨이 아닌 비통을 갖고 와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면서 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독립이 된 것이 아니었다. 
    1910년 8월 일본에게 강탈당한 주권을 우리의 힘으로 못 찾고 타국들의 힘으로 되찾게 되면서 국토가 분단되는 아픔을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우리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전쟁을 하였다면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총독부의 일장기를 내리고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8월15일은 광복절 행사가 아니라 대일본 승전기념 행사로 외국 귀빈들을 초청하여 자랑스럽고 성대하게 군사 퍼레이드를 하면서 치를 수 있었다. 
    독일의 나치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주권을 빼앗겼던 프랑스는 드골의 망명 정부 군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통일된 승전국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민족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도 프랑스와 같이 자랑스러운 승전국이 될 수 있었으나 매국노 이완용의 방해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한국과 소련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권을 강탈당해 일제의 방해로 우리 한국을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제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1945년 9월 9일 미군이 내리는 총독부 일장기(왼쪽)와 미군 앞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아베 총독.

    2. 매국노 이완용의 고종 암살로 고종의 망명 정부 수립 실패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서명하고 8월 29일 발표한 한일합병 조약은 순종 황제가 최종 재가를 하지 않아 국제적 효력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던 이회영은 한일합병의 내막을 알고 있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한 고종 황제와 함께 중국에 가서 망명정부를 세운 후 일본과의 전쟁을 계획하였다. 고종 황제가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후 조선의 전 백성들을 궐기시켜 일본군을 몰아내고 강탈당한 주권을 되찾을 계획이었다. 일본군을 국내에서 축출하지 못하더라고 황제가 있는 망명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중국군대 및 미국군대와 함께 조선 망명정부 군대가 전쟁을 수행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의 일원 으로 승전국이 될 수 있었다.
    ▲  조선닷컴

    그러나 이 계획이 새어 나가 망명 직전 고종 황제가 이완용 측이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고 1919년 1월 갑자기 사망했다. 이완용은 정말 천인이 공노할 매국노이자 역적이었다. 고종 황제의 사망으로 망명정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황제가 있는 망명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임시정부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광복군의 일본군과의 전쟁 참여 및 승리를 위해 합심하여 노력하였다. 그런 두 애국 지도자의 관계는 광복 후에 나빠지기 시작했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草浮
    印萍

    광복군, 미군과 함께 국내진입 합동작전 계획하다
    3. 일본의 미국 침공 후 한국 임시정부 즉각 대일본 선전포고 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은 1940년 김구가 주석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미 외교위원부 위원장 및 워싱턴 전권대사의 임명을 받고 대미외교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승만은 1941년 초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일본이 침략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일본과 미국의 전쟁은 꼭 일어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면 미국이 직접 일본의 침략을 막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출판 당시에는 별로 팔리지 않았으나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 후 미국 전역에서 매진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이 책은 미국 정부와 전미국인들에게 일본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되었다. 일본군의 하와이 공격 다음날인 1941년 12월 9일 김구가 주석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본 선전포고를 했고 이승만은 이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에 전달했다. 이승만의 외교활동 주목적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이었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코델 헐 미 국무장관의 특별 보좌관 히스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일본과의 전쟁을 위한 무기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독립정부로 인정해주면 소련의 한국강점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친소파인 히스는 이승만의 한국 대표성 문제에 시비를 걸면서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에 대한 비난은 수용할 수 없다고 하며 임시정부 승인을 완강히 거절 하였다. 이승만은 그 후에도 대일본 전쟁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큰 공헌을 할 것이라며 계속 승인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  광복군 사열식 광경.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4. 광복군과 美 OSS 국내 진입해 일본군 격파하고 대일본전 승리 계획
    1939년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임시정부가 정식 군대인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미국은 대외 첩보공작 부대 OSS를 만들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이승만에게 그 내용을 알려 주었다. 그 내용을 접수한 이승만은 OSS와 광복군 합동작전을 중개했다. 그리고 재미 한인청년들 100 여명을 OSS에 가담시켜 훈련을 받게 한 다음 동남아시아 등에서 항일 유격전으로 연합군을 도와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청년들 중에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훈련을 마친 다음 인도와 미얀마 접경지역에 배치되어 활동했다. 그런 후에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나아가서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켜 일본군을 격파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미얀마서 영국군과 작전 중인 광복군(왼쪽), 오른쪽은 미 OSS대원과 광복군 사진으로 가운데 이범석 장군이 앉아 있다.

    김구는 미국의 이승만에게 광복군과 OSS와의 합동작전 추진을 계속 독촉했고 그 결과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이 승인되었다. 광복군은 중국 서안에서 미군으로부터 국내 진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비밀리에 3개월간 받았다. 김구는 서안으로 가 OSS 책임자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 제2지대에서 작전회의를 했고 1945년 8월 9일 도노반 장군은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적 일본을 항거하는 합동작전을 결정했다고 공언했다. 지청천(다른 이름: 이청천)과 이범석이 지휘하는 광복군 요원들은 미군 장교들이 실시한 전투력 테스트에서 매우 우수한 판정을 받고 국내 진입을 위해 대기 중 이었다. 김구는 이제야 그리던 고국에 광복군이 진입해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할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런데 합동작전 결정 하루 뒤인 8월 10일 일본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항복의사를 전하자 작전이 취소되었고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김구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통탄했다. 광복군이 대일본전에 승리할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草浮
    印萍

    루즈벨트 대통령의 한국 인식 부족으로 승전국 될 기회 못잡아
    
    5. 광복군 국내 진입 직전, 일본 항복으로 승전이 아닌 광복으로 맞이해
    복군과 미국 OSS와의 합동작전 계획이 보름만 더 일찍 결정되었다면 광복군은 중국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타고 한국으로 진입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은 일본군을 이긴 승리 군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본과 정식 교전을 하지 못한 한국 임시정부는 종전 후 국제사회에서 일체의 발언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최고 승리국인 미국으로부터 종전일인 1945년 8월 15일까지 한국 임시정부는 정식 정부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물론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위해 활동하던 이승만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우리 한국은 8월 15일을 미국, 중국, 러시아처럼 대일본 승전 기념일로 행사를 하지 못하고 겨우 광복절 기념일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6. 귀족적이고 병약한 루즈벨트는 약삭빠르고 음흉한 스탈린에게 밀려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 요청을 거절한 루즈벨트는 귀족적인 상류층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1944년 4선 대통령으로 당선될 당시 그는 병약했다. 병든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피 튀기는 투쟁에서 승리해 온 소련의 스탈린은 종전 후 유럽과 아시아로 세력 팽창을 계산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 전쟁 문제 해결을 위한 루즈벨트,처칠과의 회담 장소로 일부러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소련의 흑해 연안 도시 얄타를 고집하여 얄타가 회담 장소로 정해졌다. 얄타 회담 당시 루즈벨트의 혈압은 200 mmHg를 넘었고 회담 2개월 후인 1945년 4월 그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  얄타회담에서 모인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왼쪽 사진)과 회담이 열린 흑해 연안의 휴양 도시 얄타(오른쪽).

    루즈벨트는 워싱턴에서 흑해의 얄타까지의 장시간 여행에 지쳤다. 그리고 스탈린은 여러 이유를 들어 회담을 지연시키고 회담 중에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여 마라톤회담으로 만들어 루즈벨트는 회담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빨리 미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루즈벨트는 주변의 반공주의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스탈린에게 일본과의 전쟁을 요청했다. 소련은 1941년에 맺은 일소중립 조약에 의해 일본과 전쟁을 할 수 없었는데 루즈벨트가 일본과의 전쟁을 요청하니 스탈린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받아들이며 원하는 것을 다 챙겼다. 종전 후 한국의 신탁통치안도 있었다. 노련한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3개월 내 시작하기로 약속한 일본과의 전쟁을 일본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미루는데 미국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이제 미국 단독으로도 일본에 완전히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약속을 지킨다고 원폭 투하 2일 후인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했다. 8월 9일 120만 병력의 소련군은 약 1,200 대의 T-34 탱크를 앞세우고 북만주로 진격해 껍데기 부대인 일본 관동군을 짓이기고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치스차코프 대장의 소련군 제25군이 8월 12일부터 북한으로 진주해 8월 하순 평양에 소련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낸 후 38도선까지 점령 하였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분단되었다.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일본과의 전쟁 요청만 안했어도 한국은 분단되지 않았다. 7. 미국에게 한국이 일본보다 더 중요하고 믿을 수 있는 국가라 설득해야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을 이기고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살릴 수 있었으나 그렇게 못 하였다. 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한국 임시정부 승인과 군사지원 요청에 대한 거절 때문에 한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이 될 수가 없었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에게는 일본이 한국보다 전략적 가치가 훨씬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주권을 강탈해간 일본과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의 온갖 방해로 우리의 실상과 처지를 미국에 제대로 알릴 수도 없었다. 지금도 일본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등에 없고 유사시 미군이 한반도에서 작전할 때 한국의 동의 없이 일본 자위대를 한국에 투입시키려는 야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일본을 더 경계하고 미국에게는 침략의 야욕과 근성을 버리지 않는 일본보다 한국이 더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라고 설득을 하면서 우리의 힘을 강하게 키워야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고 통일도 할 수 있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