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36 1000여명 중공군 공세를 34명으로 막아낸 한국전쟁 영웅 김만술 특무상사

浮萍草 2015. 9. 20. 10:45
    1. 장군보다 위대한 전쟁 영웅 김만술 특무상사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에게 훈장을 받는 김만술 소위.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불법 기습 남침했다. 미국 등 16개 우방국의 참전과 도움이 있었으나 국군 장병 약 14만 명 전사와 13만 명 실종(거의 전사 추정) 그리고 70만 명 부상이란 위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김일성 일가 독재 치하의 지옥 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3년 1개월 동안 매일 평균 약 270명의 병사가 전선에서 처참하게 죽거나 실종되었고 640명이 부상을 당한 셈이었다. 37개월의 치열한 전쟁 동안 용감하게 싸운 장군도 많았지만,적에게 포위되자 사단병력을 버리고 도망 간 사단장과 군단병력을 둔 채고 비행기로 혼자 탈출한 군단장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불과 34명의 소대 병력으로 1000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를 섬멸한 부사관 출신의 김만술 소대장이 있었다.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서열 1위인 금성태극무공훈장을 미국정부로부터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최고 훈장인 십자훈장을 받은 그는 1960년 대위로 제대한 후 전투 중 입은 부상 후유증 때문에 1991년 63세로 사망했다. 그 위대한 전쟁영웅 김만술 대위를 아는 한국인은 극소수다. 바로 이것이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이다. 2. 34명의 소대원과 1000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와 전투 시작
    김만술은 1929년 10월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고등학교 졸업 수준이면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는데 부사관으로 입대한 것을 보면 오사카 공업학교가 중학교 정도의 학교인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김만술은 여순반란사건 진압 작전과 태백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특무상사가 되었다. 1947년 6월부터 약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전투로만 일관해오던 중 1953년 7월 15일 직속상관인 제1사단장 김동빈 준장의 구두 명령으로 특무상사에서 소위로 특진 하였다. 1953년 7월 중순은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과 북한 양쪽 군대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해 사투를 벌일 때였다. 김만술 특무상사는 제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이 되었다. 1사단 11연대의 전초기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방 베티고지였고 2대대 7중대 1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막심했다. 신임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1소대와 진지교대 명령을 받았다. 진지를 교대하자마자 김만술 소위와 34명의 소대원은 공격해오는 1000명 이상의 중국군 2개 대대와 전투를 시작했다. 3. 김만술 소대 35명이 중국군 314명 전사와 450명 부상시키고 섬멸
    휴전협정 조인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15시 30분경에 베티고지 (동봉,중앙봉,서봉 등 세 봉우리가 있었는데 서봉은 중국군이 장악하고 있었음) 중앙봉과 동봉에 도착한 김만술 소대장은 대대장으로부터 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봉은 중앙봉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만술 소대장은 17시 30분 1개 분대를 직접 지휘하여 서봉을 먼저 기습 공격하여 5명의 적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곧 19시 30분이 되자 약 800명의 중국군 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중국군이 아군의 참호 속까지 뛰어들어오자 김만술 소대장은 총검으로 과감하게 적을 죽이고 물리쳤으며 이를 본 소대원들은 용기가 솟아 용감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22시에 적은 다시 동봉과 중앙봉으로 각각 1개 중대 병력(160명)과 2개 중대 병력(320명)으로 공격하였다. 공격 중인 적들이 교통호로 침입하자 김만술 소대장은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적을 죽이고 또 죽였다.
    ▲   베티고지 전투 호국화와 베티고지 세 봉우리.

    16일 오전 3시 30분 중국군 대대급 부대가 또 공격해오자 불과 30여 명의 병력을 갖고는 사격,수류탄 투척과 백병전 등을 해도 도저히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김만술 소대장은 소대원들을 참호 속으로 대피시키고 아군에게 진 내 포격을 요청하였다. 진 내 포격이란 전투현장에 아군과 적군을 안 가리고 무차별 포격하는 것으로 아군도 아군 포격에 적군과 같이 전사할 가능성이 많다. 네 차례의 진 내 포격으로 중국군은 일시 퇴각했다.

    오전 6시 30분 중국군은 대대 이상의 병력으로 또 공격해 와 아군 병력의 1/2 이상이 전사하였다. 나머지 10여 명은 후방 지원이 없어 수류탄,총검,철모와 야전삽 등으로 적들과 죽이고 죽는 처절한 백병전을 계속하여 중국군 314명을 죽이고 450명을 부상시키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 오전 7시 30분 퇴각하였다. 적이 퇴각한 후 12명의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쳇더미에 얽혀 있는 23명의 전우 시체를 껴안고 통곡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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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졸 학력 부사관 출신 25세 전쟁영웅 어떻게 탄생했나?
    4. 김만술 소대장 감성 리더십으로 기적의 대승 만술이 특무상사에서 소위로 특진해 소대장으로 부임한 소대에는 총 34명의 병사와 부사관들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모두 처음 보는 병력이었다. 김 소대장은 병사들의 성격과 사기는 물론 전투능력에 대하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을 지휘하여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성도 잘 모르는 34명 병력으로 1000여 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 병력과 13시간 전투를 하여 적을 무려 314명 죽이고 450명을 부상시키면서 승리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에 버금가는 전과였고 단일 전투의 전과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사관 출신의 25세 청년인 김만술에게 위엄이 서린 카리스마가 있을 리 없었고 그의 학력은 중학교 졸업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장군들도 할 수 없는 영웅적인 승리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아래 그림과 같이 선두에서 단신으로 적들을 격살해 병사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34명의 소대원은 약 800명 규모의 중국군 대대가 처음 공격해 오자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때 김만술 소대장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침착하고 용감하게 선두에 서서 총검으로 수없이 달려드는 중국군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병사들이 용기를 얻어 소대장과 한마음이 되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투를 하여 신화 같은 대승리를 이루어 냈다.
    5. 한국경제 기적은 나라를 구한 참전 용사들이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군대 작전과 전략이 종전 후 현대경영학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 한국 군대는 물론 정부와 기업 조직도 해방 후 미국 군대의 행정 조직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군과 한국전쟁을 함께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더하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실전경험을 한 예비역 장병이 1960년대부터 한국 상품을 팔기 위해 배를 곯아 가며 전 세계를 맨발로 뛰었다. 고달프면 그들은 진중 가요 “삼팔선의 봄”을 부르면서 상품을 팔러 다녔다.
    ▲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떠나는 국군 장병들(왼쪽), 중동행 비행기 앞의 건설 회사원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예비역 장병이 중동건설 현장에 진출해 군대에서 부르던“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를 부르면서 진군하는 식으로 일해 다른 나라 어느 건설 회사보다 저렴한 공사가격으로 신속하게 품질 좋은 공사를 해 인기를 끌며 달러를 벌었다. 예비역 장병의 근로자들이 달러를 벌려고 중동 등 전 세계로 떠날 때 부인들은 김포공항에서 눈물을 흘리며 문주란의“공항의 이별”을 불렀다. 이 예비역 장병이 뼈가 저리도록 서럽고 가난했던 1961년 1인당 국민 소득 70불의 한국을 지금의 번영된 경제 강국 한국으로 만들었다. 6. 전역 연기 장병 SK그룹 특채는 김만술 같은 애국충정 청년 육성 계기
    필자가 군대 생활 중 부르던 한 군가에 “우리는 피 끓는 젊은 사자들 내일의 조국은 우리들의 것,적진을 향해 돌진할 땐 노도 같지만 예쁜 처녀 앞에서는 수줍은 총각” 이란 가사가 있었다. 군가의 가사처럼 김만술 소위와 소대원들의 피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것이다. 피 끓는 젊은 군인들에게는 이해타산이 없다. 지극히 평범한 김만술 소대원들이었지만 조국과 부대의 위기가 바로 그들의 위기였으며 전우의 목숨이 그들의 목숨이었다. 부대가 공격을 받고 전우가 전사하면 피 끓는 김만술 소대원들의 피는 더 끓어 넘쳐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중국군을 향해 작렬하는 포탄과 빗발 치는 총탄 속을 뚫고 용감하게 돌진하였다. 지금 한국에는 위기 시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장군 같은 고위층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총리 등 고위층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국가 위기 시 책임을 회피하고 도주할 사람들을 걸러내는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북한 도발 시 전역 연기 신청 장병 전원을 우선 채용하겠다는 SK 그룹의 인사정책을 다른 재벌 기업들과 공무원 채용에도 적용한다면 김만술 소대장과 소대원들처럼 피가 끓는 애국 청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물론 일본도 감히 어떠한 도발도 못 하고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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