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조훈철의 문화재 이야기

3 성리학자 정도전이 한양 축조 때 사용한 풍수지리

浮萍草 2015. 10. 21. 11:20
    청운대 /조훈철
    마 전 종영된 인기 사극 ‘정도전’에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그러면서 현장 경험이 풍부하며 발로 뛰는 정치인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 조선왕조의 창업 1등 공신인 그가 고종 때 복권될 때까지 거의 500년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해 국가를 건설하고 다스리겠다는 그의 철학은 그가 남긴 저서 에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궁궐 조성을 하는 대목에서 그의 기량은 정점을 치닫고 있다. 궁궐의 입지 선정과 전각의 배치,그리고 각 전각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보여준 해박한 지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궁궐 입지를 선정한 후 그 방향성을 정할 때 무학대사와 벌인 논쟁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정도전은 풍수에 있어서도 대가라는 점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건국한 국가에서 신진사대부 세력을 대표하는 정도전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조선의 정궁은 정도전의 의견을 따라 오늘날과 같이 백악 아래에 자리 잡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도전의 생각대로 궁궐의 배치 및 좌향이 정해졌고, 궁궐 및 각종 전각의 이름도 짓고, 동서남북으로 성곽을 쌓은 후,성문의 이름도 정했다. 이렇듯 수도 한양의 도성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성리학적 이념을 근거로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축시켰다고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풍수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예전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풍수적 삶을 결코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적 논리로 관철시켰으나 실제 도성을 건설할 때는 풍수비보책을 하나씩 하나씩 전개해 나갔다. 이는 문헌자료에서 절대로 알 수 없는 오직 현장에서만 확인이 가능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려면 서울시 지도 한 장과 나침판,그리고 약간의 발품을 팔면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 정상을 올라가 보시라. 정상 부위인 백악마루에서 다시 조금만 내려가면 청운대(靑雲臺)라는 장소가 나타난다.
    숭례문 정면 /조훈철

    이곳에서 경복궁을 중심으로 옛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풍수에 대한 정도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다. 군주는 남면(南面)한다는 큰 원칙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산의 기운을 받아 궁궐을 조성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에서 남쪽 관악산 연주암을 잇는 남북축을 중심으로 그 축선상에 경복궁 숭례문을 배치한 것이 경복궁 입지의 커다란 골격이다. 다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경복궁 중심 건물의 축선이 세종로 광장과 어긋나면서 조선일보 건물과 동화면세점 사이로 축이 연결되어 숭례문이 자리 하고 있다는 정도까지 일 것이다. 그리고 숭례문 현장에 직접 가서 살펴보면, 궁궐의 정문인 숭례문이 정남쪽에 위치하지 않고 서쪽으로 치우친 점,그리고 숭례문 대문의 위치가 정남쪽이 아닌 서쪽 오늘날 효창구장쪽으로 바라보도록 배치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성리학적인 관점이 아니고, 풍수비보책의 관점에서 배치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궁궐의 정남쪽에 남대문 즉 숭례문을 배치한다고 적어놓았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측량과 독도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기에 이런 부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논문이나 학술서적은 별로 본적이 없는데 공론화 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장 답사때 아쉬운 점은, 백악산 정상 청운대 주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는 점이다. 경계근무를 쓰는 군인들의 감시가 심해서 눈으로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이 계시는 청와대 안전에 큰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관련 기관들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이 곳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도전, 그는 비록 성리학자였지만 풍수를 알고 실천에 옮긴 한국인이었다. 단지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명분이 앞서 글로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 그가 직접 실천에 옮긴 풍수비보 현장은 오늘날 서울을 역사도시로 각인시키는 자양분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Premium Chosun ☜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agora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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